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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0/112)
  • <70화>

    “선 자리가 1년 365일 매일 들어오……진 않죠?”

    아냐, 진정하자! 그 자리를 피해서 잡으면 돼!

    하지만 네드 님은 좀 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제 입으로 답하기 뭐하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365일 매일 들어오는 거?

    진짜?

    현실에서 대체 뭐 하는 사람이세요?

    “부모님께서 조금 관심이 많으셔서요.”

    그게 조금이야?

    서른 넘어서도 결혼 못 하면 곤란하네 뭐네 하면서 내 친척들도 내게 사람을 소개시켜 주려고 안달이긴 했지만, 1년 365일 찰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일정도 있고요.”

    네드 님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으으으음.”

    포기해야 하나?

    내가 아무리 게임에 미쳤기로서니 멀쩡하게 일상생활 하고 있는 일반인을 이 망겜의 구렁텅이에 끌어들이는 건 좀…….

    그때였다.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리 시간이 조율 가능하다면, 시간을 빼놓을 순 있습니다.”

    “오.”

    오. 오!!

    난 네드 님 앞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냐, 진정해! 난 간신히 끓어오르는 냄비 같은 속을 가라앉혔다.

    “근데 가변성이 있는 일정이 많아서요, 당일에 일정이 잡힐 수도 있고…….”

    네드 님은 연신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게임에 들어와 우편을 남길 수도 없으니.”

    그렇다면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는데!

    있긴…… 있는데!

    난 네드 님을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말했다.

    “그……럴 땐 보통 쓰는 방법이 있거든요?”

    “방법이요?”

    고개를 기울이는 얼굴은 순수하기만 했다.

    내가 이런 순수한 뉴비를 낚아도 되는 걸까?

    아니 근데 나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

    게임 하다 보면 흔한 일이거든?

    “연락처를 교환하면 되긴 하는데, 이게 게임 하던 사람들이면 익숙한데 그게 아니면 좀 곤란해 하시는 분들도 많아서요.”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저 새하늘땅 아니고요, 사람 장기는 병원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거든요?

    진짜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귀찮게 연락할 틈도 없거든요?

    그냥 딱 공대 시간만 잡을 자신 있거든요?

    제가 이렇게나 쿨하거든요?

    “게임에선 흔한 일이에요.”

    난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의심 안 받으려고 덧붙인 말인데 왠지 더 수상해져 버렸다.

    아니 근데 정말 이쪽 동네에선 흔한 일이라니까요?

    제 초콜릿톡에 괜히 파개한다 그놈이 저장돼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다가 그 속초 바닷가 빌런들처럼 모바일 청첩장도 보내고 그러는 경우 많다니까요?

    내가 눈을 반짝일 때였다. 네드 님이 옅게 웃었다.

    “그럼 메신저로 연락하는 것으로 하죠.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색하긴 합니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게 해 드릴게요.”

    난 나도 모르게 말했다. 네드 님이 멈칫했다.

    “예?”

    “아아아닙니다.”

    파개한다 같은 놈들이 네드 님 연락처 못 따게 사수할 거라고요!

    겜친한테 번호 따이는 거 처음이자 마지막이게 만들어드릴게!

    나만 바라봐!

    [010-XXXX-XXXX]

    난 그의 [노트] 아이템에 번호를 적어서 건네주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 이거 나중에 템창 바뀌죠?”

    결국 우리는 원래 퀘스트 퀴즈 풀이용으로 유저마다 가지고 있는 메모장에,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가지게 되었다.

    그니까 내 공대 파트너가 생겼다는 말이다.

    이거 가짜번호 아니겠지?

    있을 법한 번호인데?

    이거 다 클리어하고 나가면 날아가는 거 아니겠지?

    * * *

    일단 연락처는 교환했으니 좋았다. 이제 정할 것이 있었다.

    “그래도 대략 주에 몇 회쯤 가능할 것 같으세요?”

    난 슬쩍 주에 1회도 감사하다는 이야기는 뺐다.

    2회 이상이면 좋잖아요!

    네드 님은 내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매주 같은 날 같은 시간으로 못 박기는 힘들지만, 자유시간이라면…….”

    네드 님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뵐 때마다, 몇 시간 정도 함께 있는 건가요?”

    요컨대 몇 시간 트라이하냐는 소리?

    이건 나와 네드 님의 손끝에 달려 있는 문제였지만 얼마든지 조율 가능했다.

    보통은 시간을 맞추는 인원들이 8명이다 보니 다 같이 되는 시간이 얼마 없어서, 2~3시간 정도 맞추기도 했다.

    주말엔 더 많이 하기도 하고.

    그런데 으음, 둘이면 4시간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뉴비가 견디기엔 너무 긴 시간이 아닐까요?

    일단 처음에는 부담 갖지 않게 조금만 불렀다가, 천천히 시간을 늘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아무리 봐도 사기꾼이 되는 기분이었지만 난 고개를 홱홱 저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 완벽 갓벽한 공대 파트너뿐이라니까?

    “한두 시간…… 아니, 세 시간 정도요?”

    난 슬쩍 말을 꺼내 보았다.

    곤란하다고 하면 그때부터 줄이는 거다!

    원래 템 팔 때 선제시도 가격 높게 부르고 시작하는 거야!

    “곤란하시면 맞출 수도 있고요.”

    재빨리 난 말을 덧붙였다.

    네드 님이 고민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난 그 순간이 한 시간쯤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저기 실례지만 렉 걸리셨나요?

    석화 디버프 걸리셨나요?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말해 주시겠어요?

    “최대한 맞춰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네드 님의 답이 떨어졌다.

    만세!

    난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아아니야, 참아!

    정상인으로 보여야 한다! 게임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된다!

    * * *

    “연락처를 교환하면 되긴 하는데, 이게 게임 하던 사람들이면 익숙한데 그게 아니면 좀 곤란해 하시는 분들도 많아서요.”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말은 강이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쉽게 나왔다.

    그녀는 그가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느꼈는지,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게임에서 흔한 일이에요.”

    흔한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 게임에서 나가고 나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연락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게 한 번에 해결되어 좀 놀랐을 뿐이었다.

    [010-XXXX-XXXX]

    번호를 건네주자 유니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오오……!”

    그러면서 주먹까지 꽉 쥐어 보이는 게 아무래도 신나서 방방 뛰고 싶은 것을 자제하는 듯했다.

    강이현은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뵐 때마다, 몇 시간 정도 함께 있는 건가요?”

    문제는 이거였다.

    연락을 해서 만나는 거야……, 일단은 게임에서 만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몇 시간을 당신을 위해 비워야 하는지 미리 듣고 싶었다.

    내가 하루에 얼마 정도를, 편히 숨 쉴 수 있는지.

    “세 시간 정도요? 곤란하시면 맞출 수도 있고요.”

    그녀는 아주 많은 고민 끝에 내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그녀는 아무래도…….

    “음…….”

    네드는 옅은 미소를 삼켰다. 고민하는 얼굴로.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건 미덕이 아니라고 배워 온 그였다.

    그건 천박하고 밑지는 짓이라고.

    을이 되는 짓이라고.

    하지만 눈앞에서 원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드러내고 있는 유니의 모습은 오히려 반대였다.

    강이현은 제가 그녀에게 맞춰 주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내어 주고 싶었다.

    “최대한 맞춰 보겠습니다.”

    그의 고민은 짧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무언가를 내어 주어야 할 때.

    얼마나 고민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상대의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느냐에 따라 얻어낼 수 있는 게 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긴장하면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유니를 보자니 제가 버틸 수가 없었다.

    상대가 애타게 해야 원하는 것을 더 크게 얻을 수 있는데, 되레 답을 하지 않자 속이 타는 건 자신이었다.

    그건 강이현이 난생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나이쓰으!”

    유니가 결국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탁!

    그러더니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왔다.

    네드는 멈칫했다.

    이렇게 불쑥 다가와 닿아 오는 것도 그가 배워 온 비즈니스 매너에는 없는 것이었다.

    늘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오가는 대화. 몸짓 표정 어투 하나하나가 공격이 되고 약점이 되는 작은 전장이 그가 생각하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불쑥, 생각지도 못한 때 그에게 다가와 그를 흔들어 놓았다.

    신기하게도, 불쾌하지 않게.

    “우리 앞으로 잘해 봐요!”

    그러면서 제가 원하는 말을 해 준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딱 맞춰 해 준다.

    너무나도 쉽게.

    하지만…….

    네드는 그것에서 괴리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유니가 제게 가지는 감정은 제가 유니에게 가진 감정과는 전혀 달랐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그를 원하고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기적임을 알기에.

    비록 그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건 기회였고, 강이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였으니까.

    지금 유니가 원하는 건 네드였지만, 그는 네드가 아니라 강이현으로서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실수해도 괜찮아요.’

    내 앞에서 당신이 내 숨통을 틔워 줄 때마다, 나는 당신 앞에서만큼은 편히 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괜찮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만족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존재가 되면.

    당신이 나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느끼게 되면, 나는 당신이 나를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할 것이다.

    그가 결심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새하얗고 가벼운 깃털 같은 감정이겠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새까맣고 진득하며 무거운 것이었다.

    “…….”

    그게 염려되는 것도 잠깐, 강이현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저는 새까만 사람이다. 그리고 원래,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든 치르는 사람. 그리고 절대.

    손해는 보지 않는 사람.

    “좋아요.”

    강이현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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