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12)
  • <65화>

    “고기 먹은 걸 들켰다간 엘프들의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걸세!”

    라이미트의 얼굴은 절박했다.

    난 결국 입을 열었다. 이제 알려줄 때가 됐다.

    “그거 말인데요…….”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네드 님이 내 말을 받았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라이미트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난 펠릭스라는 얘기만 쏙 빼놓고 바깥의 엘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들 알음알음 고기 맛을 알아가고 있던데요?”

    “뭐라고?”

    라이미트가 입을 떠억 벌렸다.

    “우리 엘프들의 전통이…….”

    본인도 전통을 박살 낸 주제에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니, 아주 잠깐 복잡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곧 화색이 돌았다.

    “그렇단 말이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라이미트는 전통보단 고기 같이 먹을 엘프가 더 급해 보였다.

    * * *

    엘프들의 연락 수단이 어떻게 구축되어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남부 숲에 소문이 도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른 듯했다.

    특히 어둠의 고기 네트워크는 더한 것 같았다.

    숲을 뒤져 라이미트가 고기를 먹는 엘프들을 현장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남쪽 숲에는 곧 고기의 물결이 닥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고기를 뜯다 말고 수장과 마주친 엘프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외쳤지만, 수장은 오히려 그 앞에서 고기를 먹어 보임으로써 그들을 무장 해제시켜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걸 알게 되었다.

    “이미 거의 모든 엘프들이 고기를 먹어봤다고?”

    라이미트도 충격받았는지 입을 떠억 벌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멋쩍은 표정의 엘프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수장님께서 실망하실까 봐…… 차마 입에 더 댈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장님은 숲 한가운데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으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었다.

    “엘프들이라고 언제까지나 고리타분한 전통에 갇혀 있을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라이미트는 장로 펠릭스의 등을 팡팡 두드리면서 호탕하게 외쳤다.

    펠릭스는 귀신 보는 듯한 표정으로 라이미트를 쳐다보았다.

    “수, 수장님?”

    이쪽도 라이미트의 변한 성격에 적응하지 못한 듯했다.

    “자, 오늘은 파티다!”

    그가 당황한 사이 라이미트가 선포했다.

    유네리아 대륙 엘프 역사상 전무후무한 고기 파티가 열리는 것이다.

    “그냥 구워 먹는 것보단 이렇게 소스에 찍어 먹는 것도 맛있어요.”

    난 날고기를 불에 구워 먹기만 하는 그들이 안쓰러워 소스 레시피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엘프들의 눈이 번쩍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인간들과의 교류도 추진해야겠습니다.”

    “더 맛있는 요리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안 알려주면 전쟁이라도 불사할 기세였다.

    순식간에 파티를 준비하느라 분주해진 엘프들 사이로, 라이미트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네들 덕분에 앓던 이를 하나 뺀 기분이네.”

    그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나와 네드 님에게 손짓했다.

    “그 보답으로 내가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데, 따라오겠나?”

    그러면서 선택지가 떴다.

    [① 네.

    ② 고맙습니다.]

    거절은 거절한다야? 난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

    호감도가 올라서 나오는 히든 퀘스트라면 거절할 수도 있어야 했다.

    이렇게 거절할 수 없는 선택지가 뜨는 건 반드시 우리가 저놈을 따라가서 봐야 하는 사건이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저놈은 리리스한테 용의 피를 받아 마신 놈이 아닌가?

    [M]

    게다가 잘 보니 퀘스트 뒤에 메인 퀘스트 마크도 아련하게 박혀 있었다.

    이렇게 자꾸 보험약관처럼 숨겨 놓을 거야? 응?

    수상함이 110% 증가했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뒤통수칠 것 같은 페이스야!

    생각해 보면 이 게임은 10년간 역사적으로 갈색 곱슬머리에 녹안을 가진 놈들은 무조건 뒤통수를 쳤어!

    난 라이미트의 연한 갈색 곱슬머리와 녹안을 보면서 생각했다.

    촉이 온다, 촉이!

    “고맙습니다.”

    그래도 일단 선택지를 고른 다음, 난 네드 님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거든요?”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네드 님은 내가 뭘 더 말하기도 전에 방어 스킬 구슬을 만들어 소매에 숨겨 놓으신 상태였다.

    ‘메디테이션’이라는 저 스킬은 10분 동안 유지되는 구슬을 만들 수 있었다.

    스킬이 저장되어 있어 깨기만 하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구슬.

    대신 마력 소모는 크지만, 지금 이 순간 딱 필요한 스킬이었다.

    이렇게 적절하게 스킬을 활용하는 걸 보면 감탄만 나왔다.

    역시 내 미래 공대 파트너!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따라간 후, 아니나 다를까.

    “자자, 이쪽으로 들어오게! 깊은 숲일수록 귀한 보물이 숨겨져 있는 법이지!”

    라이미트는 점점 우리를 으슥한 숲 안쪽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숲길조차 사라지고 수풀을 헤치고 나가야 할 즈음.

    ―파파팟!

    별안간 옆의 나무들이 허리를 꺾으며 우리를 덮쳤다.

    “!”

    [네드의 ‘견고한 방어막’ 효과를 받습니다.]

    네드 님은 재빨리 구슬 하나를 깨뜨렸다.

    ―쿠쿵! 쿵!

    나무들이 방어막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럴 줄 알았지!

    “라이미트!”

    내가 토르의 검을 들었을 때였다.

    “하하하하! 리리스 님께서 하찮은 인간들과 어울리실 리가 없지!”

    라이미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들리는 방향을 보니 머리 위였다.

    내가 토르의 검을 들고 뛰어오르면 나무를 박살 내고 놈한테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할 때였다.

    “여기, 여기예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네드 님 목소리 치고는 너무 작고 가녀렸다.

    네드 님을 돌아보니 네드 님도 같은 것을 들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

    여기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좌표를 불든 지도에 표시를 하든 하라고!

    하지만 그 ‘여기’는 정말 가까웠다.

    “발 아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쿠쿵! 쿵!

    견고한 방어막을 나보다 유연한 허리를 가진 나무들이 두드리느라 온통 주변은 소음이었다.

    그리고 조명은 나무들이 움직이는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뿐이었다.

    그리고 이 정신없는 상황에, 나와 네드 님은 우리의 바로 앞 나무둥치 아래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하늘색 머리칼의 엘프와 눈이 마주쳤다.

    반투명한 모습이 투명화 스킬을 쓴 것 같지만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얼른 이쪽으로!”

    그녀가 손짓했다.

    “안 그럼 죽을 거예요!”

    난 입을 떠억 벌렸다.

    아니, 세레나가 여기서 왜 나와?

    어차피 이 숲 다 박살 내고 라이미트랑 보스전을 하는 것 말고는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세레나가 우릴 해치고 싶었으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우릴 부르는 대신, 우리를 공격했을 것이다.

    “일단 들어가 보죠.”

    짧게 판단을 내린 내가 손짓했다.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NPC세레나의 ‘투명화’ 효과를 받습니다.]

    * * *

    이 엘프들의 숲은 잡다한 설정이 많은 곳이었다.

    오죽하면 설정이 파도 파도 나와서 여길 패치한 팀장을 엘프아빠라고 부를 정도였다.

    물론 욕이 난무하는 유네리아 게시판답게 좋은 패치를 하면 ‘엘프아버님’, 어이없는 패치를 하면 ‘엘프애비’까지 호칭은 왔다 갔다 거렸다.

    그리고 그 엘프아빠가 추가한 설정에 따르면, 엘프들의 수장은 이 숲 전체와 교감하고 있었다.

    강한 수장일수록 숲의 모든 나무들과 교류할 수 있고 약한 수장이라면 숲의 일부 굵직한 나무들하고만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미트는 강한 수장이었다.

    숲 거의 모든 곳의 소식을 바로 알 수 있었으므로.

    괜히 내가 숲에 불 난 거 몰랐다고 했을 때부터 수상하게 생각한 거 아니다.

    내가 이 긴 얘기를 왜 하냐면.

    “이 나무는 괜찮아요?”

    우리가 들어온 곳이 나무뿌리 아래의 지하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사를 해서 지하 공간을 다져 놓은 건 둘째치고, 한눈에 봐도 굵직해 보이는 이 나무가 라이미트와 교감하는 순간 위치가 발각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무 아래만은 괜찮아요. 저와 교감하고 있거든요.”

    난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오.”

    교감은 수장만의 능력이다. 정확히는 수장의 핏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수장이 되기 전에는 그 능력이 강한지 약한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야 나무는 한 명의 엘프하고만 교감할 수 있고, 전대 엘프 수장이 죽기 전엔 나무들과 교감해볼 수 없으니 당연하다.

    ……이상 유네리아 5주년 공식 방송에서 엘프아빠가 혼자 떠들던 설정이었습니다.

    “음…….”

    네드 님을 위해 이 긴 설정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고민할 때였다.

    자기소개가 특기인 NPC답게 세레나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현 수장 라이미트의 딸, 세레나예요.”

    네드 님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난 세레나가 라이미트의 딸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부분이 문제였다.

    내가 아는 NPC 세레나는 아버지인 라이미트의 말을 끔찍이도 따르는 딸이었다.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아빠 할 일에 반기를 든 꼴이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내가 묻자, 세레나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다섯 번째예요.”

    뭐가? 나와 네드 님이 서로를 마주 볼 때였다. 세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숲에 제물로 바치려던 모험가가요.”

    여기서 갑자기 제물? 이런 설정이 숲에 있었다고?

    내가 그 대학교 사이버강의보다 지루하다는 엘프아빠 패치노트 방송을 끝까지 들은 사람이지만 이런 설정은 들은 적도 없었다.

    “네. 얼마 전부터 물과 바람의 정령이 숲을 떠나려고 했거든요.”

    “그건…….”

    네드 님은 이야기를 듣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불 정령과 다른 두 정령의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불 정령이 득세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간 겁니까?”

    그런가?

    세계관 이해력이 탁월한 네드 님다웠다.

    네드 님 같은 유저를 엘프아빠가 매우 좋아했지만, 이미 엘프아빠는 다른 게임의 팀장이 되어 그 게임을 착실하게 말아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공대로 모시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맞아요! 그러자 숲이 마르기 시작했고, 그걸 마력으로 채우려고…….”

    세레나가 말했다.

    요컨대 오는 모험가들을 제물로 바쳐서 숲의 마력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뜻이었다.

    듣자 하니 앞의 네 명의 이름 모를 모험가는 이미 숲의 양분이 된 듯했다.

    이 세계는 우리밖에 없으니 아마 그 모험가는 NPC였겠지만.

    “아니, 근데 엘프들이 인신 공양도 해요?”

    아무리 고기도 먹게 됐다기로서니 이건 좀 선을 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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