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12)
  • <64화>

    뭔가 하고 보니 네드 님의 손에 물 속성 스킬 ‘수형검’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이름이야 검이지만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채찍 모습으로 바뀌어 엘프들 사이를 이어주고 있었다.

    “오.”

    그 물을 타고 엘프들에게 토르의 검 전기 효과가 확 퍼진 게 분명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런 기가 막힌 서포트를 하시다니.

    난 진심으로 감탄했다.

    [엘프들의 수장 ‘라이미트’를 지켜냈습니다!]

    [미션 기여도 :

    네드 : 55%

    유니 : 45%]

    [라이미트와 대화하세요.]

    난 알림창을 확인하고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쓸 만한 스킬이 없으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네드 님이 짧게 묵례해 보였다.

    스킬보다 더 사기인 템이 쌓여 있는데 그게 문제가 될까요?

    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네드 님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

    의아한 얼굴의 네드 님에게 난 주저 없이 말했다.

    “최고의 서포트상 드립니다.”

    내 말에 네드 님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귀가 빨개진 게 보였다.

    설마 부끄러워하시는 거?

    이런 순발력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데?

    그렇게 네드 님과의 공대에 대한 욕망은 커져만 갔다.

    * * *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난 짐작도 가지 않아!”

    엘프 수장 라이미트는 고기도 던져놓고 극대노하고 있었다.

    “내 주변에 있던 엘프들이 죄다 좀비였다니!”

    그걸 못 알아챈 네가 더 수상한데?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결계 때문이었나?”

    그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만 해도 멀쩡해 보였던 하늘은, 결계가 부서져 먹구름으로 차 있었다.

    결계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레벨 500의 통찰을 튕겨낼 정도의 강력한 결계라면, 남부 숲 최고의 마법사라는 설정의 라이미트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누가 깔았는지는…… 레벨 ???의 항아리가 생각나지만 일단 심증뿐이다.

    “어쩐지 엘프들도 점점 찾아오지 않는다 싶었네. 그게 엘프들이 본능적으로 고기를 싫어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현을 거부하신 게 아니고요?”

    고기 어쩌고 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그렇다 치고 이건 펠릭스에게 들은 것과 다른 소리였다.

    내 말에 라이미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알현을 거부했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야…….

    [① 장로 펠릭스가요.

    ② 그냥 그랬을 것 같아서요]

    1번 선택하면 펠릭스 팔아넘기기다!

    사실 우리가 숲속에 들어왔다가 걸리면 모른 척하겠다는 놈을 감싸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이 라이미트는 어딘가 수상했다.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네드 님도 펠릭스가 마음에 안 드시는지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그냥 그러셨을 것 같아서요.”

    난 결국 2를 선택했다.

    그래, 펠릭스는 라이미트 퀘스트 끝나고 혼내주면 되지!

    일단 눈앞의 수상한 놈이 먼저다!

    “밖에서 보기엔 라이미트 님의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요.”

    난 재빨리 말을 이었다.

    “밖에서 보기에?”

    라이미트가 내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미트 님은 이 숲과 연결되어 있는 이 숲의 ‘수장’이신데, 불이 나면 당연히 화가 나셨을 거라고 생각했죠.”

    세계관 갖다 붙이기!

    내 말에 나를 수상쩍게 보던 라이미트가 그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일 만도 하군. 하지만 난 정말 몰랐지. 숲에 불이 나고 있었다니…….”

    그가 다시 숲의 정령들을 움직이기 시작한 건지, 연기가 나는 곳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고기 때문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하지 말아 줄래?

    “엘프들은 이 맛을 지금껏 모르고 살았네. 그리고 장로들의 그 폐쇄적인 사고를 생각하면……!”

    얼씨구?

    이 동네 꼰대왕은 댁 아니었어?

    설정이 바뀌다 못해 아예 다른 NPC가 됐는데?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영원히 젊은 엘프들이 고기를 먹을 일은 없겠지.”

    크흑! 라이미트는 얼굴을 가리고 울기까지 했다.

    그건 아닐걸? 지금도 밖에서 고기를 탐하고 있거든? 이미 장로부터 탐하고 있거든?

    “최근에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이대로면 엘프와 고기의 역사에 대해서 강의라도 들을 기세라, 난 재빨리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라이미트가 멈칫했다.

    “이상한 일?”

    “네. 이곳에 결계가 쳐지기 전에…….”

    왠지 범인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물어봐야 했다.

    [대륙 남부 : 마법의 숲

    - 엘프들의 사정 들어보기(완료)

    - 엘프 도울 방법 찾기(완료)

    - 숲의 불 정령에 대해 물어보기(완료)

    - 엘프들의 방식대로 수장 만나기(완료)

    - 엘프들의 수장에게 근황 묻기(NEW!)]

    퀘스트가 하라면 해야지.

    “이상한 일이라기보다는…… 신기한 자를 만났지. 정확히는 내 은인 같은 자라네.”

    리리스지! 앞으로 구르고 보고 뒤로 굴러서 봐도 리리스잖아!

    내가 얼굴을 구겼을 때였다.

    라이미트가 감동받은 얼굴로 말했다.

    “그자는…… 엘프인 내게.”

    엘프인 너에게?

    그는 촉촉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고기를 건네준 자였다네.”

    “…….”

    그딴 헛소리를 이렇게 아련한 얼굴로 할 일이야?

    “엘프인 내게 지금껏 고기를 먹으라 하는 자는 없었네. 물론 나도 먹으면 안 될 것이라 생각했어.”

    이놈은 어떻게 사고회로가 기승전 고기야?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뒤늦게 고기에 맛을 들인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근데 그자는 내게 말했네. 고기를 먹는 건 자연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일세.”

    그러더니 라이미트가 눈을 빛냈다.

    “자연 역시 약육강식의 세계 아니겠는가? 보다 강한 생물인, 우리 엘프가! 짐승들을 잡지 못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 밖의 짐승들도 저들끼리 잡아먹는 것을!”

    “예?”

    “?”

    그 말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네드 님마저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엘프가 생명을 아끼는 설정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드 님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설정인데…….”

    이놈 좀 이상한데?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상한데?

    “……해서 아무튼 고기를 먹어보았지. 그리고 난 새로운 맛에 눈을 뜨고 말았다네!”

    우리가 앞에서 수상하다고 떠들든 말든 라이미트는 감동에 벅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네. 이 숲에는 불 정령이 잘 드나들지 않아서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거든.”

    그것도 잠깐, 이번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숲에서 나가기에는 이목이 집중되고, 그렇다고 여기서 불을 피우자니 불 정령을 불러들여야 하고……. 근데 불 정령들은 우리 엘프들과 사이가 안 좋아진 지 수백여 년. 그들을 불러들일 방법은 없었네.”

    “엘프들이 불을 아예 안 쓰는 건 아니잖아요?”

    친한 불 정령들 있을 텐데? 내 질문에 라이미트는 고개를 저었다.

    “친한 불 정령들이야 몇 있지. 하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내가 금기를 어겼다는 것을 알리겠나? 그랬다간 난 엘프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걸세!”

    아니, 그 손가락질 할 엘프들도 다 고기를 먹고 있다니까?

    “그래서 고민하는 내게 그자는 해답을 주었지.”

    라이미트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반짝였다.

    “불 정령들과 친해질 수 있게 체질을 바꾸는 음료라고 하면서, 뭔가를 줬던 것 같은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너무 취했어서 그런지 자세히 기억이 안 나는군.”

    체질을…… 바꿔?

    다른 건 모르겠고 불 정령이랑 친해질 수 있게?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불 속성을 띤 음료였다는 말인데.

    난 유독 성격이 달라진 것 같은 라이미트를 살폈다.

    이게 혹시 설정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불 속성 용의 피를 마셔서 그렇다면?

    용의 피를 인간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세계관 공식 설정이다. 힘을 버틸 수 없다나 뭐라나.

    인간과 사정이 비슷한 엘프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켄도 그렇고 어떻게든 그 힘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있는 듯했다.

    ……아니, 켄은 이미 죽은 상태라 가능했나?

    그럼 혹시 이쪽도?

    난 라이미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면 켄도 강해진 것은 물론 성격까지 묘하게 싸해졌다.

    만일 라이미트도 불 속성 용의 피를 마셨다면?

    이렇게 사람이 바뀌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혹시 그 사람이 붉은 머리에 구두 신은 여자분이신가요?”

    난 그에게 물었다. 라이미트는 내 말에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아는 사이인가?”

    그 순간 알림창이 떴다.

    [용의 피를 취한 인간들

    - 용의 피를 마신 인간 4명 찾기

    - 켄, 리리스, 라이미트, ?]

    역시 댁도 마셨던 거지! 내가 얼굴을 구기는 사이 라이미트의 눈이 반짝였다.

    라이미트는 분명 리리스를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갑자기 우리가 리리스를 때려잡아 항아리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해 봐야 좋은 일은 안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잘 아는 사이죠.”

    난 재빨리 눈을 찡긋했다.

    “그 언니랑 얼마 전에 만나기도 했어요.”

    항아리로 만들어줬다는 팩트는 쏙 뺐다.

    “호오. 다른 인간은 아는 자가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라이미트가 뇌까리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TMI도 뿌리고 다녔냐!

    난 재빨리 말했다.

    “맞아요. 저희 전엔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쵸?”

    내가 네드 님을 돌아보자, 네드 님이 목석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워낙 친화력 좋으신 분이니.”

    라이미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중앙에서 나가서 숲을 좀 살펴봐야겠군.”

    그의 말에 나와 네드 님은 괴상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리리스가 친화력이 좋아?

    그러는 사이 라이미트는 별안간 제 옷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

    이놈이 또 뭘 하나 싶어 쳐다보니, 라이미트가 불쑥 물었다.

    “나한테 고기 냄새 나나?”

    그야 댁도 따지자면 고기니까 고기 냄새가 나지 않을……까가 아니라 고깃집 다녀오셨습니까?

    얼마나 고기를 구워 먹었으면 야외에서 먹은 주제에 냄새 걱정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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