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12)

<62화>

“머뭇거리는 게 수상하군!”

―쌔앵!

날아드는 화살을 난 본능적으로 피했다.

팔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화살이 나무에 꽂혔다.

[재빠른 화살에 맞았습니다!]

[-89937]

아니 레벨이 몇이길래 스쳐도 데미지가 9만이야?

[엘프 / Lv. 233]

난 엘프의 레벨을 보면서 결론내렸다.

이번 팀장도 미쳤다!

시나리오 지역마다 NPC들 레벨이 이게 뭐야! 이럴 거면 지역 레벨 대 설정은 왜 했어!

“쏴라!”

선두에 서 있던 엘프가 손을 번쩍 들었다가 내렸다.

“잠깐!”

난 본능적으로 외쳤다.

“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화살을 더 쏘기 전에 뭐라도 던져야 했다.

“……!”

내 말에 엘프들이 멈칫했다.

정답인가?

……아닌가?

내가 엘프들을 살필 때였다. 네드 님이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여차하면 방어막을 치려고 하시는 듯했다.

그때 선두에 서 있던 엘프가 표정을 폈다.

“진작 말할 것이지!”

아니, 주기도 전에 쏴 놓고! 내가 인자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어서 들어가지! 수장님께서 기다리신다네.”

엘프들이 활을 거두고 물러났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누군지 모를 모험가가 수장에게 가져다 주기로 한 물건이 고기라는 것이.

……요컨대 수장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남쪽 숲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내가 머리를 짚을 때였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네드 님이 손을 펼쳤다.

[네드의 ‘단단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단단한 보호막. 준비 시간이 필요하지만 데미지는 확실히 막는 스킬.

“아, 고마워요.”

이제 저놈들이 불시에 돌아보더라도 방어막에 화살이 다 튕겨 나갈 것이다.

200대한테 죽는 인생의 오점을 남길 순 없었다.

[네드의 ‘힐링’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89937]

힐링 스킬을 사용해주시는 걸 보니 HP가 닳은 걸 보신 듯했다.

“눈도 좋으시지.”

난 행복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네드 님은 좋은 공대 파트너가 될 듯했다.

하필 영 좋지 못한 타이밍에 화살이 날아오는 바람에 각서 쓰자는 말을 못 끝냈다.

다시 각서 쓰자고 하면 까일까?

하지만 이 사람을 내 옆에 묶어두고 싶다! 법적으로 묶어두고 싶다!

반드시 딴 놈들이 아니라 나하고만 공대를 뛰게 하고 싶다!

더러운 고인물들에게 물들지 않은 순수한 천재 뉴비와 함께 공대를 뛰고 싶다!

“……꼭 게임 클리어하고 공대 같이 뛰는 거예요. 하루에 다섯 시간만 나한테 투자해.”

그 말에 네드 님이 멈칫했다.

“다섯 시간이요?”

곤란한가? 공대에 다섯 시간이면 매우 평범한…….

“……아.”

몬스터를 너무 잘 패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 사람 바쁜 사람이랬지, 참.

“시간은 조율해 보죠.”

네드 님 같은 파트너라면 삼십 분도 좋아^^!

“?”

네드 님은 내가 왜 웃는지 이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각서를 받아내야겠다.

난 순수한 그 얼굴을 보면서 새까만 생각을 했다.

* * *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프들은 우리를 숲의 가운데로 데려갔다.

“여어, 어서 와.”

그리고 지나치게 프리하게 인사하는 엘프들의 수장과 인사시켜 주었다.

아니, 이렇게 프리한 이미지였나?

내가 알던 엘프들의 수장 라이미트 NPC는 수백 살 먹은 엘프로 나이다운 엄청난 꼰대였다.

그런데 갑자기 여어?

근데 그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라이미트는 심지어 손에 고기를 들고 있었다.

“?”

10년 동안 유네리아를 하면서 온갖 버그와 기괴한 모습을 다 봐왔지만 이건 또 새로웠다.

엘프들의 수장이 고기를 뜯는 모습?

“음, 역시 고기는 미디움 레어가 최고라니까. 자네도 들어.”

심지어 그는 자리를 내주면서 우리한테 고기를 권하고 있었다.

“아, 예.”

여기서 갑자기 수상하다고 칼 들었다가는 화살 꼬치 엔딩이니 일단 옆에 앉았다.

그런데.

“음……?”

수장 라이미트는 엘프들에게서 우리가 건넨 고기를 받았다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돌로 된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보았다.

“흐음……?”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내가 모험가에게 부탁한 ‘천상의 육질’ 고기가 아닌데?”

그런 양아치 같은 거 부탁했냐!

천상이 붙은 아이템은 이전에 네드 님과 내가 엘데한테 주려고 기를 쓰면서 만들었듯이,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었다. 모조리.

“넌 누구지?”

고기 육질 보고 사람 판단하는 엘프 수장이라니 지능 끝내준다…….

“전원 경계! 수상한 외부인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엘프들도 순식간에 다시 경계 태세로 돌아갔다.

난 결국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일단 대화로 해결해보고 안 되면 때려 부수는 수밖에.

“저희는 엘프 수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그 말에 의심스러운 눈길의 엘프 수장이 우리를 훑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장로가 보냈나?”

바로 들켰네?

펠릭스는 들키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엘프 장로가 한 명도 아니고 펠릭스라고 불지만 않으면 되는 게 아닐까요?

“장로들이 보냈으면 돌아가라. 대화할 생각 없다.”

라이미트는 고개를 돌리며 고기를 뜯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고기 맛도 모르는 그런 놈들하고 대화할 생각은 없다. 그 하수인인 너희도 마찬가지일 테지. 썩 꺼져라.”

“?”

아니 펠릭스는 고기 맛 알던데? 알아서 문제던데?

“아니, 저도 고기 좋아하거든요?”

하마터면 펠릭스가 좋아한다고 할 뻔했다.

내 말에 라이미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난 그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저희는 엘프가 고기를 먹든 말든 신경 안 써요.”

남들이야 이상하게 봤겠지만 난 그런 편견 없다!

내 말에 라이미트가 흘끔 날 쳐다보았다. 아까보단 경계가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진짜예요. 고기 맛 알면 좋죠.”

내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엘프가 고기를 썰어 먹든 뜯어먹든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이지?

우리의 겉옷만 잘 수리해주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러자 라이미트가 팔짱을 꼈다.

“흐음. 좋아.”

그가 먹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찾아왔지?”

아직도 그는 별로 우리에게 우호적인 자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할 얘기는 해야 했다.

“최근에 불 정령이 주변에 많아졌습니다. 숲에 불도 나고 있고요.”

네드 님이 바로 용건을 말했다.

“그래서 숲이 걱정돼서 찾아왔습니다.”

난 재빨리 네드 님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응?”

그러자 라이미트가 눈을 깜빡였다.

“불 정령?”

불 정령 소리 처음 듣는 사람 같은 저 청순한 표정은 뭐지?

심지어 그의 고기를 구워준 것도 불 정령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주변에 떠다니는 정령 대부분이 불 정령이었다.

“불 정령은 다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수장은 뭔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 주변에 불 정령이 많긴 하지만…….

“불의 기운은 이 근처에서만 느껴지는데?”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엘프 설정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엘프들이 고기 먹는 건 둘째치고 엘프들의 수장은 원래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숲과 교감할 수 있는 특별한 엘프만이 수장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숲에 불이 나면 모를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 상황에 저렇게 띨빵한 표정으로 되물을 리가 없단 소리다.

“지금 숲 여기저기에 불나고 있는데 모르셨어요?”

여기서만 봐도 연기 나는 거 보이지 않냐?

아무리 고기에 눈이 돌아갔기로서니 연기도 못 보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내가 무심코 하늘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어?”

난 멈칫했다.

바깥을 가리키려고 보니 우리가 올 때까지만 해도 칙칙하게 먹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은 환하게 개어 있었다.

그리고 숲 이곳저곳을 어지럽히던 검은 연기는 쥐뿔도 보이지 않았다.

“타긴 뭘 타? 내가 아무리 고기 맛을 알았기로서니 불 정령 관리도 안 할 엘프로 보였나?”

라이미트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더니 고기를 뜯으면서 말했다.

“게다가 이걸 장로들이 봤다간 난리들을 칠 텐데, 내가 관리를 소홀하게 하게 생겼어?”

아니 그 장로도 고기 먹고 있다니까?

하지만 그걸 따지기에는 뭔가 이 공간이 이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팟!

네드 님의 눈에서 파란빛이 반짝였다. 통찰 스킬이었다.

네드 님이 통찰 스킬을 쓴 건 하늘이었다.

나이스! 뭔가 이상하면 통찰 스킬 쓰는 습관 아주 좋아요!

……라고 생각한 순간.

―파팟!

네드 님의 눈 주변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

[-1,002,319]

네드 님의 머리 위로 데미지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통찰이 거부당했다고 뜨는군요.”

그의 말에 난 입을 떠억 벌렸다.

500레벨 통찰 스킬도 튕겨내는 결계가 있다고?

내가 통찰 스킬과 상성이 안 좋은 몇 가지 방어계열 스킬을 떠올릴 때였다.

“하늘이…….”

문득 라이미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돌아보니 라이미트는 심각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하늘이 갈라져 있어.”

엘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뭐가 갈라져?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난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었다.

네드 님이 통찰을 쓴 하늘 쪽이 갈라져 있었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