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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60/112)
  • <60화>

    그는 이제 먹다 만 라비스를 대놓고 들이켜고 있었다.

    못 본 척해주겠다고 했더니 대놓고 마시는 거야, 지금?

    우린 뻔뻔한 엘프를 황당한 얼굴로 돌아보았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더 없나?”

    당당하게 손을 벌리는 펠릭스의 손에 라비스를 다발로 쥐어 주었다.

    펠릭스의 얼굴이 매우 흡족해졌다.

    아무튼 호감도를 올린다는 계획은 성공이었다.

    * * *

    “흐으으, 잘 먹었다.”

    아무래도 고기 맛에 취한 듯한 저 얼굴.

    “천상의 맛이 따로 없군! 이 자연에서 우러나온 깊은 향과 맛! 대체 어디에서 이런 음료를 얻었는가?”

    다 갈아 넣어 만든 음료에서 고기의 기운을 느끼는 신통한 능력이 있는 이 엘프는 안타깝게도 원산지까지 추적하는 능력은 없는 듯했다.

    “그야…… 자연에서?”

    들어간 고기가 산짐승고기였으니 틀린 건 아니었다.

    “엘프인 내게도 이런 귀한 것을 나눠줄 줄이야.”

    펠릭스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다른 이들은 내게 이 음료를 주려는 생각도 하지 않더군.”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난 그런 그를 보면서 볼을 긁적였다.

    그야 당연하다. 누가 엘프한테 고기 음료를 줘? 뺨 맞을 일 있어?

    아니 근데 정말 마셔도 괜찮은 건가?

    난 결국 펠릭스 옆에 쌓인 라비스 병 열세 개를 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으세요?”

    그러면서 라비스 병을 슬쩍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먹어도 돼? 원래 안 되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튄 거잖아?

    내 질문에 펠릭스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돌연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원래는…… 안 된다네.”

    그럼 그렇지.

    고기 먹은 죄책감(?)이 뒤늦게 그를 짓누르는 듯했다.

    “근데 어쩌다가 고기를 먹게 된 거예요?”

    물론 자고로 고기란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극호 음식이 아닌가?

    하지만 엘프는 ‘안 먹어본 사람’ 쪽에 속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대체 그런 엘프가 어쩌다가 고기 맛을 알게 된 건데?

    내 말에 펠릭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건…… 말하기가 좀…….”

    그리고 그런 그에게 네드 님은 라비스를 한 병 더 내밀었다.

    “…….”

    “…….”

    “…….”

    우리 사이로 짧은 침묵이 지나고.

    펠릭스는 슬그머니 라비스를 받아들었다.

    “어쩌다가 먹게 됐냐면 말일세.”

    그러면서 썰을 풀기 시작했다.

    난 네드 님을 감탄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야…… 진짜 기가 막히게 적응 잘하셨다.

    * * *

    네드 님이 준 라비스의 효과는 굉장했다!

    괴로워하던(?) 펠릭스는 결국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난 타락한 엘프라네.”

    “?”

    타락? 설마 고기 먹었다고 타락?

    펠릭스는 이마를 짚은 채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이었지. 내 부하가…… 내 부하가 샐러드에 기이한 것을 넣은 것을 보았지. 새까만 열매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건 고기였네. 겉만 조금 태워 놓은 고기.”

    하긴 노릇노릇하게 구워 놨으면 고기인 티가 확 났겠지.

    그건 알겠는데.

    “기술 좋게도 겉만 태워 놓은 고기였네. 그 안의 육즙과 육질은 그대로 살아 있었지. 씹는 순간 알싸한 탄 맛을 녹이며 흘러나오는 고기의 맛은 정말…….”

    왜 찬양하고 있어?

    나와 네드 님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지는 걸 알아챘는지 펠릭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흠흠. 올리브인 척 올려놓으려고 했지만 들킨 것 같았네.”

    올리브인 척하려면 고기를 대체 얼마나 태워놔야 하는 거냐?

    “하지만 탄 부분을 걷어내니 그 안에서 드러나는 고기의 맛…….”

    잠깐 정신을 차린 듯하던 펠릭스는 다시 나사를 빼고 고기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나는 그 순간! 빠지고 말았다네!”

    그러면서 고뇌 어린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난 차마 그를 벌할 수 없었네! 장로로서 고기를…… 고기를 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단 말이네!”

    펠릭스가 떨리는 눈으로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결국 난 그 부하와 금단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네!”

    “예?”

    “네?”

    갑자기? 여기서?

    우리가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가운데 펠릭스는 이미 자신의 이야기에 취한 듯 말했다.

    “오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어찌 일족의 장로가 일족의 전사와 함께 고기를 먹는단 말인가? 그것도 불에 야들야들할 때까지만 살짝 구운 고기를 말이네!”

    오해할 만한 표현만 기가 막히게 골라서 하는 엘프였다.

    “난 그 후로 수장님을 뵈러 갈 수가 없었다네. 이런 타락한 몸으로 어찌 신성한 숲의 군주님을 뵐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수장님께서도 느끼신 모양이야.”

    뭘 느껴? 고기 냄새를?

    “점점 숲에 불이 번지고, 그게 처음에는…… 나와 다른 일부 타락한 엘프들 때문인 줄 알았네.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지.”

    그는 눈을 꽉 감고 말했다.

    “그래서 이 타락한 몸으로라도 정령들의 이상행동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수장님을 뵈러 갔네. 그런데……!”

    ―팍!

    그가 제 무릎을 내리치며 통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알현을 거절당했네.”

    “오.”

    정말 고기 먹은 것 때문에 거절한 건가?

    하긴 눈으로 음료에 고기가 함유됐는지 아닌지도 알아보는 기가 막힌 엘프들의 수장씩이나 되는데 고기 먹은 사람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펠릭스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다른 엘프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심지어 절대 고기는 안 먹을 것이 분명한 이 숲의 ‘수호자’ 세레나조차도 알현을 거절당했다지 뭔가?”

    천리안으로 보니까 걔도 고기 먹고 있더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네 얼굴 보니까 팩트란 걸 알겠어요…….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수장님께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네! 세레나조차 알현을 거절당하다니!”

    아니, 그 정도면 고기가 문제일 수도 있어…….

    나와 네드 님의 심각한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요즘 수장님께서 뭘 하시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네. 남부를 다스리는 마탑주의 업무도 그대로 내려두셨는지, 숲 외부 마탑에 파견된 엘프들도 성화라네.”

    펠릭스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숲에서 수소문해보니, 숲 한가운데에서 일부 엘프들을 제외하면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시네.”

    “오…….”

    숲 한가운데라는 말이 왠지 걸린다고 생각할 때였다.

    “수장님은 정령들의 힘과 마력으로 결계를 만드실 수 있지. 그걸로 숲의 중앙을 막아 버리고 무언가를 하시는 모양인데……, 뭘 하시는지 모르겠어.”

    펠릭스는 정말 곤란한 얼굴이었다.

    “이 ‘참모’ 펠릭스조차도 입장이 불가능하다니. 물론 이 몸이 타락한 더러운 몸이라는 것이 문제겠지…….”

    그는 다시 고기를 먹는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선택지가 떴다.

    [① 그거 참 안타깝네요.

    ② 저희가 알아볼까요?]

    안타깝다고 하면 너희가 사정 좀 알아봐 줄래? 할 것이 뻔했으므로, 난 그냥 2번을 선택했다.

    “저희가 알아볼까요?”

    내 말에 펠릭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알아봐 주겠나? 내가 숲 통행증은 줄 수 있지만…….”

    아깐 안 된다며?

    내가 눈썹을 치켜올릴 때,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말을 덧붙였다.

    “웬만하면 폭력적인 방법은 쓰지 말고 들어가게. 안 그럼 통행증을 내준 내 입장이 곤란……”

    그렇게 말하던 펠릭스는 내 표정을 봤는지 말을 슬며시 바꿨다.

    “……하기도 하고 엘프들도 걱정되니 말일세.”

    이미 본심 다 보였거든요? 지금 와서 말 바꿔도 소용없거든요?

    내가 인자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다시 선택지가 떴다.

    [① 몰래 들어가 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② 저 숨는 거라면 자신 있어요.]

    결론은 둘 다 숨어서 들어간다는 선택지 아니냐?

    이럴 거면 선택지 왜 줌?

    “저 숨는 거라면 자신 있어요.”

    결국 난 아무거나 선택했다. 그러자 펠릭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키면 무사히 나올 수 없을 걸세.”

    그러면서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였다.

    이보쇼.

    “그래도 부탁하겠네!”

    거절은 거절한다는 듯이 선택지도 뜨지 않았다.

    “그럼 난 이―”

    이만은 무슨! 난 펠릭스의 어깨를 잡았다.

    NPC의 인성이 터진 것도 어쩔 수 없고, 이런 놈 도와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면?

    “위험수당은 주는 거죠?”

    더 뜯어낸다! 뭐든 내놔!

    이게 바로 유네리아를 10년 탐험한 숙련된 약탈범……이 아니라 모험가의 자세!

    내 말에 네드 님도 펠릭스도 움찔했다.

    하지만 난 단호했다.

    호갱 짓은 못 한다!

    라비스 십수 개나 먹고 추격전까지 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잠입까지 시키려는 주제에 공짜로 먹고 튈 생각 하지 마라!

    내가 눈을 부라리자 펠릭스가 어깨의 힘을 늘어뜨렸다.

    “좋네.”

    그러더니 별안간 나와 네드 님에게 손을 뻗었다.

    “?”

    우리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그는 우리의 시야 오른쪽에 있는 경험치바를 쭉 위로 올렸다.

    “???”

    아니 그게 손으로 만져지는 거였어?

    “하압!”

    무려 그는 힘있게 위로 쭉 올려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힘을 받은(?) 경험치바가 위로 쭉 올라갔다.

    난 입을 떠억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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