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12)

<59화>

다른 데는 다 괜찮지만 오직 여기, 남부 숲의 엘프들에게만큼은 라비스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도가 내려가게 된다. 고기가 들어있는 음료니까!

내가 괜히 아이템창에 ‘풀떼기’ 칸을 따로 놓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한 잔 드셔보시죠.”

네드 님은 내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라비스를 내밀었다.

난 인벤토리에서 조용히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냥 토르의 검으로 마비시키는 것 정도는 호감도가 많이 안 까이지 않을까?

죽여버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내가 심각한 진로 고민을 할 때였다.

“설마…… 이런…… 이런 주스로 나를 설득하려고 한 것이냐!”

예상대로 펠릭스는 노발대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라비스에 고기 들어가잖아요.”

“아.”

네드 님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그가 긴장했을 때였다.

―꿀꺽.

우리가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사이, 별안간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

“?”

나와 네드 님이 앞을 쳐다보았을 때였다.

혼란한 틈을 타 라비스를 몰래 먹고 있던 펠릭스와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

―주르르륵.

이렇게 대놓고 걸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펠릭스의 입가에서 주르륵 라비스가 흘러내렸다.

저놈 지금 마신 거지?

“……먹는군요?”

네드 님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도 이번엔 네드 님하고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게요?”

먹는데??? 엘프가 라비스 먹는데??? 고기 들어간 음료 먹는데???

우리가 뜨악한 순간이었다.

“에에에잇!”

별안간 펠릭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야?

“잠깐만!”

라비스가 통하긴 통한단 거잖아!

이건 호재였다. 난 펠릭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대화 좀 합시다!”

“난 모르는 일이오!”

모르긴 뭘 몰라!

“아니 마셨잖아!”

“내가 뭘 마셨다는 건가!?”

시치미 떼면서 도망가는 건 왜 이렇게 빠른데!

내가 발을 빠르게 놀릴 때였다.

네드 님이 문득 물었다.

“저 엘프는 지금 자신이 라비스를 먹은 걸 숨기고 싶어하는 거겠죠?”

“네.”

그니까 라비스가 먹히긴 먹힌단 소리지!

내가 쫓아가는 속도를 높일 때였다.

“왜 도망가시는 겁니까!”

네드 님이 외쳤다.

“그야 우리가 라비스 먹은 거 봤으니까요!”

그건 왜 물어봐요!?

내가 돌아봤을 때였다.

네드 님이 외쳤다.

“저희는 이야기하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난 그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그건 앞서 뛰어가던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그러게?

“우리 아무것도 못 봤어! 지금 잡혀주면 모른 척해준다!”

난 재빨리 외쳤다.

어차피 목격자 너 나 우리 세 명뿐인데 우리끼리 평화롭게 해결하자!

나 고기 먹는 엘프 차별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고기 맛있는데 좀 먹을 수도 있지! 대신 겉옷만 잘 고쳐줘!

“……!”

우리의 말에 결국 펠릭스는 멈춰 섰다.

[펠릭스와 대화해보세요.]

알림창이 떴다.

뛰다 말고 멈춰선 자리에서 우리를 조신하게 기다리는 펠릭스를 보면서, 난 감탄했다.

“네드 님.”

네드 님을 돌아보니 네드 님은 안도한 얼굴이었다.

“제 실수를 만회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대체 네드 님이 뭘 실수한 거지? 라비스 먹인 거?

아까 샐러드 먹을 때부터 표정이 영 아니꼽다 싶더라니, 고기 먹는 엘프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건 뉴비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실수는 무슨, 완전 나이스. 최고. 브레인.”

난 네드 님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이런 임기응변…… 천재성…… 이건……!

“예?”

난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는 네드 님에게 불쑥 제안했다.

“나중에 저랑 공대 가실래요?”

저번엔 지나가듯 물은 거지만 이번엔 진심이었다.

진짜……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예?”

네드 님이 되묻는 톤이 높아졌다. 놀라신 듯했다.

많이 놀라셨겠죠. 공격대 길거리캐스팅은 처음이실 테니까.

아니 따지자면 길거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사이에 캐스팅한 건데 그렇게 갑작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주실래요?

부디 긍정적으로 고려해주실래요?

난 염원을 담아 네드 님을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수능을 다시 보기에는 시간이…….”

그 공대 말고요, 이 양반아.

“공과대학 말고 공격대요.”

“?”

네드 님이 눈을 깜빡였다.

이 때 묻지 않은 뉴비를 보라!

지금껏 내가 공대를 뛰면서 봤던 고인물들과는 비교도 안 될 순수함이었다.

난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만렙 찍는 건 쉬워요. 나중에 저랑 신규 보스 공대로 같이 가요.”

내 말에 네드 님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게임을 많이 해서 능숙하신 분들이 낫지 않겠습니까?”

“Noooooo.”

난 고개를 저었다.

“많이 하신 놈들이 문제라 그래요. 저랑 가요.”

우리 둘이. 단둘이. 난 네드 님의 손을 꽉 잡았다.

“?”

네드 님이 우뚝 굳었다.

“걔들 맨날 다 아는 얼굴들이라고 빌런 짓 해요.”

유네리아. 최상위 랭커 유저들은 다 건너 아는 사이.

그 말인즉슨 고인물이란 의미고, 그놈이 그놈인데다 특히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아는 놈들은 공대에서 대놓고 강짜를 놓기도 했다.

‘저 잠시만 라면 먹으면서 딜할게요 ㅋㅋㅋㅋ 배고픔’

무려 그런 말을 자랑스럽게 해대는 것이 바로 그놈들이었다.

왜냐고?

‘어차피 저 대신 올 딜러도 없잖아요’

그렇다, 대체재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게임이었다면 ‘어딜 딜가놈이 라면을 먹냐’며 머리를 후려갈겼겠지만 유네리아는 달랐다.

컨트롤을 심하게 타는 게임.

게다가 아이템 스펙은 더 심하게 타는 게임.

아무리 저놈이 30분 동안 라면을 처먹는 놈이라도 임기응변에 능하고 딜도 잘 넣는 딜가놈이 갑인 세상인 것이다.

근데? 내 앞에?

이렇게 퓨어하고 딜도 잘 넣고 임기응변도 좋은데다 템까지 좋은 사회성 있는 뉴비가 떨어졌네?

뉴비는 키우면 된다.

“그래도 제가 어떤 실수를 할지 모릅니다.”

“오, 괜찮아요. 실수는 다 하는 거죠. 저도 하는데.”

공대 트라이에서 실수하는 게 잘못일 리가 없다.

실수하고 고개 빳빳이 들고 지 탓 아니라고 하는 놈들이 문제인 거지!

난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고인물들의 만행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아 저 파개한다님이랑 공대 못가요’

‘왜요?’

‘그분이랑 술자리에서 싸워서 불편함’

‘너는 뭐 그런 얘기를 공대출발 17분 전에 하세요?’

저딴 개 어이없는 대화가 오가는 것이 바로 공대인 것이다.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열 몇 명까지 함께 손발을 맞추어 가는 것이다 보니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 사이까지 중재해야 한다니 재앙도 그런 재앙이 없었다.

[10일 20시까지 모여주세요]

언제는 10명 약속 잡고 기다렸더니 두 명이 빠져서 연락해본 적도 있었다.

[아 저 병원에 실려왔어요]

[저도요 ㅠㅠ]

두 사람은 친한 사이였다. 설마 같이 있다가 사고라도 난 건가?

아무리 공대가 중요하다지만 사고 난 사람을 끌고 가야 할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헐 쉬세요]

그래서 쉬라고 했었는데 그놈들은 몇 분 안 있어 인★GRAM에서 발견되었다.

[#속초바닷가 #너와함께 #단둘이 #컾스타그램 #사랑해]

해시와 함께 바닷가를 배경으로 아련하게 찍은 셀카를 올림으로써.

“…….”

난 수많은 빌런들을 생각하다가 아련하게 웃었다.

“그런 놈들하고 할 바에야 둘이서 하는 게 나아요.”

어차피 사람이 많은 것도 어떤 놈은 원거리 공격이 세고, 어떤 놈은 근거리 공격이 세서 그런 놈들 모아서 가느라 많은 거였다.

네드 님이나 나처럼 올라운더로 템이 다 갖춰져 있는 사람들이면 여러 명 구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 기어 들어오기 전까지 혼자 공략 다녔던 거다.

물론 혼자 다니면 죽으면 다시 트라이 자리까지 뛰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까다롭긴 했다.

하지만 둘이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새X들하고 하는 것보다 백오십만 배는 낫거든요. 꼭 나중에 만렙 찍고 저랑 같이 하는 거예요.”

난 네드 님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네드 님은 내 말에 멈칫했다.

너무 들이댔나?

설마 거절 아니죠? 내가 뭘 하면 이 혜성같이 나타난 뉴비를 잡을 수 있지?

내가 머리를 굴릴 때였다.

네드 님이 불쑥 물었다.

“그럼 이곳에서 나가고 나서도, 뵙는 겁니까?”

응?

난 눈을 깜빡였다.

“그야―”

당연하지! 동고동락한 우정이 있는데!

만나서 술 한잔은 하셔야죠!

라고 하기엔 이 사람이 게임을 처음 하는 사람이란 게 뒤늦게 떠올랐다.

“네드 님만 괜찮으면 전 좋아요.”

뒤늦게 자제하려고 하니까 국어책 읽는 투로 말이 나와 버렸다.

에이리 님도 실제로 봤고, 게임에서 만나서 실제로 본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고인물이면 다 그놈이 그놈이라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네드 님은 게임이 처음이니까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었다.

“네드 님이 불편하시면―”

내가 뒤늦게 말을 붙이려는 때였다. 네드 님이 말했다.

“저도 좋습니다.”

어?

눈을 깜빡일 때 네드 님이 웃었다.

“봐요, 여기서 나가게 되면. 꼭.”

적극적이신 건 좋은데 왜 그렇게 사망 플래그처럼 말씀하세요?

“흐흠.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 눈치도 없이 펠릭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