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12)
  • <55화>

    그러자 숲 이곳저곳이 불타고 있는 게 보였다.

    “다 타고 있잖아?”

    내가 황당해서 입을 벌리자 네드 님도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넓은 숲 이곳저곳에 불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넓은 숲에 한 번에 불이 붙었다고요?”

    “불이 탄 흔적이나, 불을 끄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면 동시다발적으로 불이 붙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네드 님이 뭘 봤는지 짧게 탄식했다.

    “지금도 불이 붙는 지역이 있고요.”

    같은 곳을 본 걸까? 나도 불이 붙어서 타오르기 시작하는 곳을 분명히 보았다.

    “어어, 숲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옆에 말씀하시는 거죠?”

    내 말에 네드 님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아뇨, 외곽 부분입니다.”

    “네?”

    그럼 숲 외곽하고 숲 중심하고 가까운 곳에 동시에 불이 솟았다는 소리?

    이건…….

    [‘천리안’ 스킬이 해제됩니다.]

    그새 1분이 다 됐는지 스킬이 꺼졌다. 난 눈을 몇 번 깜빡여보다가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숲 중심 쪽에 불붙은 거 아니었어요?”

    “제가 본 건 외곽 쪽이었습니다.”

    “음.”

    난 턱을 매만졌다.

    남부 숲은 엄청나게 넓은 데다가 물 정령과 바람 정령이 엄청나게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그리고 바람 정령은 몰라도 물 정령 때문에 불이 나도 좀처럼 번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물 정령도 못 잡을 정도로 불이 퍼지고 있다고?

    “이번엔 누가 불을 붙인 게 아닌가?”

    전에 내가 남부 퀘스트를 깼을 땐 방화범을 잡는 게 목표였다.

    놈은 멍청하게도 제가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생각하는지 가는 길마다 불을 붙여 놓았고, 그 길을 따라 추적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환경파괴범을 쫓아가서 흠씬 두들겨 패 주면 보상을 주는 게 남부 퀘스트였는데…….

    이건 완전 불붙은 모습이 다르잖아?

    “누군가 고의로 방화를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드 님이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퀘스트는 그랬거든요.”

    “근데 이건…….”

    네드 님은 지도를 보다가 말했다.

    “방화범이 한 명이면 숲 외곽과 숲 중심에 동시에 불을 붙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다고 여러 명이라기에는…….”

    네드 님이 고개를 저었다. 난 그의 말을 받았다.

    “말도 안 되죠.”

    남부 숲의 불 끄는 퀘스트는 숲이 몇 퍼센트 이상 타기 전에 방화범을 잡는 게 목표였다.

    아무리 메인 스토리가 바뀌었다기로서니 숲이 타는 걸 내버려 두는 스토리로 바뀌진 않았을 거고, 그럼 당연히 방화범을 잡는 쪽으로 퀘스트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 방화범이 여러 명이다?

    “숲 배경에서 방화범 NPC 여러 명 깔았다간 렉 걸려서 퀘스트고 뭐고 못 할걸요.”

    내가 말할 때 네드 님도 거의 동시에 말했다.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방도도 없을뿐더러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숲을 태우는 게 어느 집단에 이익이 될지―”

    네드 님은 말하다 말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같은 걸 보고 하는 생각이 영 다르네.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어쨌든 방화범은 한 명일 거라는 거죠. 여럿이라는 게 말이 안 되고.”

    여러 명이면 난 남부 숲 가자마자 목만 둥둥 떠다닐 각오 해야 한다.

    “…….”

    갑자기 심각해졌다. 진짜 그딴 패치 한 거 아니지?

    “그럼 동시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할 수가…….”

    네드 님이 뇌까렸다.

    “그러게요. 누가 또 속옷혁명 하나?”

    “……속옷혁명이요?”

    네드 님이 멈칫했다.

    이건 게임 안 하는 사람한테도 유명한 사건인데…… 아, 게임 처음이라고 하셨지.

    “아, 겉옷이 다 남부 숲에서 만들거나 수선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내가 내 옷을 가리켜 보였다.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근데 겉옷 중에 예쁜 건 시세가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현금으로 천몇백만 원 할 때도 있거든요.”

    그게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싸고 예쁜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부당하다고 주장하던 유저들은 이른바 ‘속옷혁명’을 일으켰다.

    [남부 숲 싹 불태워버리자]

    [다 겉옷 치우고 깡통시절로 돌아가는거임]

    [언제까지 유네리아 상술에 속을거냐ㅋㅋ 호갱새X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제작과정이나 입수 과정에 거의 필수적으로 캐시가 들어가는 겉옷은 유네리아의 현질 유도 방식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속옷탭 옷 X같이 만들어놓은거 보라고]

    겉옷탭에 입을 만한 옷에 유네리아 게임머니만 들어가는 옷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아무튼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불 정령과 계약해 남부 숲에 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저 미XX들은 뭐임??]

    [숲 지켜 절대지켜]

    당시 채팅창과 게시판은 난리가 났고 결국 숲 지킴이들이 속옷혁명을 제압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아직도 불 정령 하면 가끔 회자되는 얘기였다.

    “……별일이 다 있었군요.”

    네드 님은 난감한 듯 웃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이 오래되니까 별놈들이 다 있어서…….”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런데 어차피 지금 여기엔 저희 둘밖에 없잖아요. 속옷혁명이고 뭐고 할 사람도 없고, 불 정령이랑 계약할 수 있는 모험가도 당연히 없고.”

    그럼 불 정령이 신나서 저 알아서 불이라도 붙인단 말인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지.”

    멈칫한 내가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네드 님, 아까 천리안으로 볼 때 물 정령 본 적 있어요?”

    그 말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반투명한 가오리처럼 생긴 것이 정령이라면 보았습니다.”

    가……오리? 그걸 가오리로 보나? 난 흐물거리는 천 조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넓은 무언가가 흐물거리는 걸 보셨다면 분명했다.

    “물 정령은 불 끄러 저 알아서 돌아다니는 게 일이거든요.”

    그 말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불 정령도 불을 붙이러 돌아다닐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긴 한데…….”

    물 정령한테 속성상 불리하다 보니 덤빌 수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난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아무튼 불이 붙었단 말이야. 불이 세져서, 불이…….’

    음유시인의 말도 그렇고. 만일 남부에 정말 불 속성 크리스탈이 있다면?

    당연히 불 정령들의 힘이…… 세졌겠네?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이거 불 정령들이 불장난친 거 같은데요?”

    “예?”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떴다.

    * * *

    불 정령들은 불 속성답게 화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화끈하고 나쁘게 말하면 다혈질이란 소리였다.

    게다가 장난기도 짙은 그들은 조금만 한눈팔아도 온갖 곳에서 불장난을 쳐댔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몇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남쪽 숲이었다.

    거긴 물 정령이 워낙 득세해서 불 정령이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리기 때문에.

    ……라는 게 유네리아의 세계관 설정인데.

    거기에 불 속성 크리스탈이 박혀 있다면?

    당연히 불 정령들이 크리스탈 힘을 받아서 세졌겠지?

    ―쓔웅!

    우리는 확인을 위해 남쪽 숲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불이 나는 곳에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엘데의 등에서 천리안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천리안으로 남부 숲을 살폈다.

    네드 님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도 보였다.

    「……!」

    천리안이 소리까지 지원해 주진 않아서 소리를 들을 순 없었지만, 불이 커지자 점점 깊은 숲으로 후퇴해 가는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옆에서 가오리……가 아니라 물 정령들이 힘을 내서 물을 쏴댔지만 불을 끄기엔 역부족이었다.

    근데 아무리 불 정령의 힘이 강해졌다지만 굳이 숲에 불을 지르는 이유가 뭐지?

    물 정령한테 평소에 쌓인 게 많아서?

    그런 것치고는 불 정령들의 행동이 뭔가 일관적이었다. 특히.

    “불 정령들이 불을 내는 방향이 좀…… 가운데로 점점 모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내 말에 천리안을 보던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네드 님도 그렇죠?

    그렇다면 불 정령들이 원하는 무언가가 숲 가운데에 있다는 소린데?

    [‘천리안’ 스킬을 사용합니다.]

    난 천리안으로 숲 한가운데를 쿡 찔러 보았다. 아직 불이 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자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연하늘색 머리칼의 엘프는 익숙했다. 내가 옷 고치러 갈 때마다 보는 장인 NPC…… 인데 손에 뭘 들고 있는 거야, 지금?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건 엘프들의 손에 들려 있어서는 안 될……

    고기?

    그리고 그 순간.

    [지나치게 큰 힘을 받아 천리안이 해제됩니다.]

    [-160,988]

    체력이 확 깎이면서 천리안이 꺼졌다.

    “어우.”

    “유니 님?”

    놀란 듯 네드 님의 손에서 회복 스킬이 쏟아졌다.

    아니 무슨 죽기 직전에 쓰는 기사회생 스킬을 여기다가 쓰시고 그러세요?

    난 눈을 비볐다.

    “숲 가운데 한 번 봐 보시겠어요?”

    제가 이상한 걸 봤거든요?

    게다가 원래 남부는 100레벨 대 퀘스트 지역이다. 그런데 350대인 내가 숲 가운데가 안 보인다는 건?

    적어도 레벨 450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레벨 500인 네드 님은 볼 수 있어야 했다.

    “음…….”

    딱 한 가지 경우를 빼고.

    난 네드 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삭!

    네드 님의 눈 근처에서 반짝이던 푸른빛이 얇은 유리 벽처럼 깨져 내리는 걸 보았다.

    네드 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리안 사용이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오.”

    난 눈을 반짝였다. 저 문장은 익숙했다.

    “가운데 있다는 거네요, 그럼.”

    내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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