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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12)
  • <54화>

    아니, 맨날 데이터쪼가리라고 스킬 대신 맞게 하고, 에이리 님 용이랑 싸움 붙이고 그랬……는……데…….

    ―뀨우우…….

    비상식량이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이거라도 조금 먹어 보거라.

    얼마나 슬프게 우는지 엘데가 스테이크를 좀 썰어줄 정도였다.

    “기다려 봐.”

    아니, 나 참!

    황당했지만 눈이 마주치니 저걸…… 저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오동나무가 좋겠지요……?’

    문득 아련한 표정으로 비상식량의 관을 짜려던 네드 님이 떠올랐다.

    웃긴데 안 웃겼다.

    이게 PC버전으로 용을 봐온 자와 실제로(?) 용을 봐온 자의 교감도(?) 차이인가?

    “너 딱 기다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용 얼굴에 설득당해서…… 아니, 내가 이렇게 유네리아에 감정이입을 한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혹시 요리도구 어제 썼던 거 주실 수 있어요?”

    시간이랑 스킬 숙련도 때문에 10점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맛있는 스테이크는 만들어줄 수 있을 터였다.

    네드 님이 하는 게 더 맛있겠지만, 비상식량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집밥이…… 그립냐……?

    “여기 있습니다.”

    네드 님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내게 요리도구를 건넸다.

    ―지글지글.

    결국 난 간이 화덕에 불을 붙였다.

    * * *

    ―뀨~우~~

    유네리아에 용이 패치되고 나서 처음으로 비상식량이 저렇게 신난 걸 본 것 같다.

    PC버전에서 봤으면 ‘또 이놈 말 안 듣고 설치네, 이거!’ 하면서 AI나 욕했을 테지만 실제로 보니 좀 달랐다.

    가끔 날뛸 때 그냥 기분 좋아서 그랬던 건가?

    ‘아 얘 또 AI 꼬였네 이거.’

    ‘그냥 죽였다가 일으켜요.’

    에이리 님과의 숱한 대화가 떠올랐다.

    컴퓨터도 휴대폰도 어딘가 맛이 가면 껐다 켜라는 말이 있듯이, 유네리아의 용이 버그에 걸리면 해결하는 방법도 비슷했다.

    죽였다 살리기.

    근데 PC버전에서도 사실 얘가 이렇게 신나서 날뛰고 있었던…… 거면…….

    “…….”

    난 좀처럼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나 진짜 개 쓰레기 아니냐?

    ―최대한 높이까지 날아올라 보지.

    그러는 사이, 우리를 등에 태우고 날아오른 엘데는 빠르게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낮은 하늘 고도에 진입합니다.]

    [중간 하늘 고도에 진입합니다.]

    신난 비상식량은 우리 뒤를 따라 날았지만, 중간 하늘까지가 한계였는지 다시 액세서리 상태가 되어 네드 님의 품에 안겼다.

    ―뀨웅~!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시스템창이 떴다.

    [고도가 지나치게 높습니다.]

    원래는 이 시스템창이 뜨고 나서 용이 멈춰야 했다.

    하지만 엘데는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고도를 높였다.

    근데 이렇게 빠르게 올라가도 되나?

    게임에서야 문제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엘리베이터로 수십 층만 왔다 갔다 거려도 귀가 먹먹해지는 게 보통이 아닌가?

    하지만 나도 네드 님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걸 느낀 순간.

    [보유한 ‘하늘 크리스탈’의 효과로 ‘기압 변화’ 디버프 효과를 받지 않습니다.]

    “오…….”

    네드 님이 짧게 감탄했다. 그리고 이내.

    [천상계 고도에 진입합니다.]

    갑자기 주변이 확 트이면서, 발아래로 구름이 펼쳐졌다.

    “……!”

    우리가 원래 올랐어야 할 하데스 산봉우리는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멀리 고고하게 태양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신기할 정도로 가까이 있는 구름에 햇빛이 내려와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용을 잡으러 가는 천상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PC버전에서 기를 쓰고 하데스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와도 당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와…….”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네드 님 역시 감탄하는 얼굴로 아래를 보다가 말했다.

    “……정말 게임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군요.”

    “그러게요.”

    비행기 창문에서 아래쪽 보려고 얼굴 안 문대도 되네.

    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하지만 낯선 유네리아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 구름.

    언젠가 엘데가 말했던 ‘구름 위의 종족’이 이런 곳에 사나 싶었다.

    땅에서 본 지평선과 수평선과는 또 다른, 구름이 펼친 한없이 넓고 긴 선이 하늘 멀리까지 뻗어져 있었다.

    그 위에 빛나는 해는 내가 알던 노란빛이 아니라 흰빛에 가까웠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드 님이 그런 나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퀘스트 ‘멀리서 내려다보는 세상’ 클리어!]

    시스템창이 발랄하게 퀘스트 완료를 알렸다.

    [천리안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 맞다. 천리안!”

    풍경에 취해서 깜빡하고 있었다.

    애초에 천리안 얻으려고 올라온 건데, 신스킬을 까먹다니 유네리아도 오래 하고 볼 일이었다.

    “유니 님도 클리어되셨습니까?”

    네드 님이 물어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원인 덕에 그의 앞에 나와 똑같은 시스템창이 우르르 뜬 게 보였다.

    [‘천리안’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천리안 사용설명서’ 획득!]

    사용설명서는 뭐야? 이게 무슨 전자제품이야?

    핸드폰을 사도 사용설명서를 읽는 역사가 없는 나는 그걸 패스하려고 했다.

    하지만.

    [‘천리안’ 스킬을 사용하기 전에 사용설명서를 꼭 읽어주세요!]

    스킬창에서 천리안 스킬을 보려고 하니 아예 시스템창이 막아 버렸다.

    “얼씨구.”

    결국 난 사용설명서를 열었다.

    그러는 사이 네드 님은 사용설명서를 이미 정독 중이었다.

    이 사람 정말 1페이지부터 정독하고 있잖아!

    [천리안 사용설명서]

    [천리안 스킬은 먼 곳의 현재 모습을 큰 제약 없이 지켜볼 수 있는 스킬로 최대 1분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재사용 대기시간 : 10분).]

    “바뀌었네?”

    내가 알던 기존의 천리안은 일단 사용 시간에 제한이 없었다.

    그 밑으로도 설명이 이어졌다.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에게 천리안이 발각되면 데미지를 입습니다(최대 즉사 가능).]

    이건 진짜 처음 보는 설명이었다. 아니 이런 살벌한 페널티가 추가됐다고?

    이제 보스한테 천리안 쓰기도 힘들겠는데?

    물론 현재는 네드 님이 가지고 있는 내 스펙으로 못 보는 곳은 없을 터였다.

    ……아니. 한 군데 있을지도 모른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왕좌가 있었어.’

    음유시인이 말했던 그 북쪽 군도 너머의 공간.

    [‘천리안 수락/거절’ 기능이 추가됩니다.]

    사용설명서를 다 읽자 뜬금없는 시스템창이 떴다. 이건 또 뭐야?

    보니까 기본적으로 ‘거절’로 설정되어 있는 게 보였다.

    [‘천리안 거절’ 상태의 유저에게 닿으면 천리안은 곧바로 종료됩니다.

    또한 ‘천리안 거절’ 상태의 유저에게는 천리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하…….”

    천리안에 제대로 데이긴 데인 모양이었다.

    당시에 천리안이 가장 문제가 됐던 게 다른 유저를 스토킹하는 이상한 놈들 때문이었으니까.

    “웬일로 이런 갓패치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이게 좀 필요했다.

    [천리안 설정을 ‘수락’으로 변경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데 미아 되더라도 서로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어야지.

    [천리안 설정을 ‘수락’으로 변경합니다.]

    그렇게 변경하고 옆을 돌아보니 네드 님도 같은 선택을 하고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현명하시다니까?

    “이제 천리안으로 뭘 찾으면 될까요? 불 속성 크리스탈?”

    난 네드 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불 속성 크리스탈은 퀘스트 아이템이라 딱 지정해서 천리안 사용이 불가능할 거예요.”

    그건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럼 불 속성 크리스탈이 아니라 다른 걸 찾아야 하는데.

    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남부 숲 근처에서 불 난 곳을 찾는다든지, 일단 남쪽에 있는 숲부터 훑어보죠.”

    천리안은 지도상의 한 지점을 짚어서 1분간 그 동네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 걸리면 데미지 먹겠지만, 남부 사막은 기껏해야 레벨 100대의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이니 나나 네드 님이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숲 중에서도 불이 난 곳을 먼저 찾아보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네드 님은 스킬창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지도를 켰다.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저렇게 되는 건지, 내가 처음에 천리안을 얻고 헤맸던 것과는 달리 곧바로 천리안 스킬을 발동시켰다.

    네드 님의 눈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 천리안 스킬의 효과였다.

    그 참, 비상식량한테 오동나무 관 짜준다고 했던 거 보면 뉴비는 맞는데 가끔 너무 능숙해 보이신단 말이지.

    이게 진짜 재능?

    난 고개를 기울이면서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천리안’ 스킬을 사용합니다.]

    [탐사지역을 선택해 주십시오.]

    난 지도에서 남쪽 숲을 쿡 눌렀다.

    [‘남쪽 숲’ 일대를 탐사합니다.]

    그러자마자 눈앞에 흐릿한 홀로그램 같은 영상이 나타났다.

    내 천리안이 남부 숲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건.

    “?”

    새까만 연기?

    난 천리안을 위로 쭉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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