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12)
  • <53화>

    실패해도 된다고 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네드 님은 그 말에 더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았다.

    불 조절 레버가 이렇게 숨 막히는 게임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난 그냥 네드 님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고, 레버를 잡아당기는 건 네드 님이었다.

    이 사람…… 학창 시절에 청기백기 좀 했나 본데……?

    그리고 그 결과.

    [아이템 링크 : 천상계의 지평을 바꿔 놓을 예누스 스테이크]

    네드 님이 요리에 성공한 아이템을 링크해 보여주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이게 맞습니까?”

    아까 딱딱한 철판과 구름같이 폭신한 철판의 차이가 충격이셨는지 ‘천상계의 지평을 바꿔 놓을’이라는 말이 맞는지 그는 몇 번이고 확인하고 있었다.

    그건 이름보다 아래를 보는 게 확실하다.

    [★10.0]

    틀림없는 10점짜리 예누스 스테이크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나이쓰으으으! 성공! 성공이에요!”

    “다행입니다.”

    네드 님이 그제야 밝은 얼굴로 요리도구를 조심스럽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난 그걸 보면서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두 명이라고 두 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냐. 그럼 각각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먹을 입은 엘데 하나잖아?

    “네드 님 완전 요리 고인물 같았어요.”

    난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네드 님을 칭찬했다.

    “전 그냥 손만 잡고 있었다니까요?”

    “유니 님이 도와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이 사람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가 손 떼고 있었어도 알아서 잘하셨을걸요? 제 템창에 걸고 말하는데 진짜 저 손만 대고 있었어요.”

    내 템창은 이 사람 앞에서 걸기엔 너무 소박한가?

    하지만 네드 님은 다행히 내 진심을 믿어주는 듯했다.

    “…….”

    잠시 턱을 매만지던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다행이라는 건지.

    “자, 그럼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일찍 엘데 깨워서 바로 천리안 얻으러 가요!”

    신난다! 천리안이다!

    스킬을 어떻게 칼질했을지 궁금했다.

    신스킬을 배우는 재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유네리아 운영팀에서 말하는 유네리아 스킬의 개수는 974개.

    그중에서 천리안과 멱살잡이는 사라진 스킬이었으니 사실상 972개였다.

    그중 입수경로가 분명히 밝혀졌거나 유저의 사용이 확인된 스킬은 969개.

    세 개는 아무리 고인물들이 유네리아를 싹싹 긁고 뒤지고 다녀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 스킬도 아직 969개였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추가되어 버렸네?

    970개네?

    감동도 이런 감동이 없었다. 신스킬 배우는 감동! 희귀스킬 배우는 감동!

    “오늘 진짜 고생하셨어요!”

    테리반 성으로 돌아온 우리는 최고급 여관에 들어갔다.

    게임인데 잠까지 자야 한다는 건 참 기묘하긴 했다. 특히 일어나도 현실이 아니란 것이 더더욱.

    “푹 주무세요, 유니 님.”

    네드 님은 뭔가 홀가분한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그렇게까지 레버가 긴장되는 일이었단 말인가?

    내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의 방문이 닫혔다.

    ―달칵.

    그 바로 옆이 내 방이었으므로 난 그 옆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AM 4:33]

    “어우, 시간 봐.”

    너무 늦었다. 이러다 엘프 숲 다 불타겠네!

    그래도 잠들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이게 PC버전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플레이하다 보니 졸음이나 정신적 피로를 피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하아아암.”

    엘데처럼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은 지 얼마 안 되어.

    ―쿵.

    옆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

    네드 님 방 쪽에서 나는 소리 아냐, 이거?

    * * *

    처음엔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무슨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돌발 퀘스트가 뜬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안전지역인 테리반 성 한가운데에서 싸울 만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네드 님 파워로 여기서 스킬 썼다간 여관이 통째로 날아간다.

    그럼 네드 님 걱정할 때가 아니라 내 목숨 부지할 방법부터 모색해야 한다.

    “…….”

    난 숨을 죽인 채 옆방의 소리를 들어 보았다.

    레벨이 350이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청력이 좋아져서, 별소리가 다 들렸다.

    ―터벅, 터벅.

    일단 이건 실내화 신고 걸어 다니는 소리였다. 그러더니 벌컥 소리가 들렸다.

    이건 마법 냉장고 여는 소리다. 물 드시는 것 같은데?

    “……변태 같네, 이거.”

    갑자기 이런 거에 귀 기울이니까 매우 평소 행실이 불건전한 사람 같지만 아닙니다아.

    들리는 걸 어쩌라고!

    난 슬그머니 벽을 등지고 누웠다.

    ‘후우.’

    하지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시는 건지 네드 님의 한숨 소리는 잘만 들렸다.

    그리고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서서 왔다 갔다 하는 걸음 소리도 들렸다.

    잠이 잘 안 오시나?

    불 조절 레버의 긴장감이 그리도 좋았……을 리는 없고.

    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네드 님이 좀 더 조용하긴 했지.

    아니, 원래 조용한 분이었던 것 같지만.

    하긴, 사람이 키트 2,000개쯤 까게 되면 잠 안 올 정도로 현타가 올 법도…… 아니, 근데 2,000개로 네드 님 잔고엔 흠집도 안 날 텐데?

    온갖 생각을 하는 사이 서서히 눈이 감겼다.

    * * *

    다음 날 아침.

    ―흐음. 스테이크는 가져왔느냐?

    엘데는 적당한 크기로 커진 채 꼬리로 탕탕 바닥을 치고 있었다.

    ―콰직! 콰지직!

    그럴 때마다 공터의 땅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테리반 근처의 공터라서 다행이지 여관 앞마당 뭐 이딴 데서 소환했으면 돈 물어줄 뻔했다.

    “가져왔어.”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네드 님은 진지한 얼굴로 아이템창에서 ‘천상계의 지평을 바꿔 놓을’ 스테이크를 꺼냈다.

    몰입감이며 자유도며 쓸데없는 고증을 잘 갖춰 놓은 이 게임은 편리하고 어이없게도 아이템창에 들어간 음식의 유통기한은 그대로였다.

    요컨대 아이템창에선 시간이 안 흐른다는 설정인 건지, 아이템창 안에 넣었다 꺼낸 스테이크는 뜨끈뜨끈하게 김이 오르고 있었다.

    ―호오오오.

    엘데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스테이크의 향 먼저 음미하기 시작했다.

    ―펑!

    그때 네드 님의 어깨 위에서 비상식량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엘데 옆에 내려앉아 적당한 모습으로 크기를 키웠다.

    저건? 설마?

    ―이 몸의 음식을 탐내는 것이냐?

    엘데가 비상식량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뀨우우…….

    그러자 비상식량은 불쌍한 척을 하면서 날개로 날 가리키기 시작했다.

    나? 왜? 뭐?

    ―뀨, 뀨우! 뀨우우…… 뀨!

    뀨 뭔데? 지금처럼 용의 언어를 배우고 싶은 순간이 없었다.

    비상식량이 뭐라고 했는지 엘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평소에 음식을 안 준다는구나. 대체 너는 용을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이냐?

    “음식을 안 주기는!”

    난 발끈했다.

    난 에이리 님이 놀랄 정도로 비상식량에게 예누스 고기를 자주 주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비상식량의 포만도는 80%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포만도 80에서 95 사이 유지해 준다고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는데!”

    포만도가 95%를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펫이고 유저고 컨디션이 안 좋아지게 된다.

    요컨대 ‘배 터지게 먹은’ 상황이 되기 때문.

    그래서 나는 비상식량의 포만도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그래야…… 최대한의 능력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아무튼!

    하지만 비상식량은 그런 내 과거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는 또 뭐라고 뀨우거리기 시작했다.

    ―뀨, 뀨우…… 뀨! 뀨뀨!

    “뀨 뭔데!”

    내가 발끈했을 때였다. 옆에서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평소에 주시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에.

    ―오.

    엘데도.

    ―뀽!

    비상식량도.

    “오.”

    나도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혹시 용말 할 줄 아세요?”

    아무리 봐도 두 용의 반응은 그의 말이 맞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건…… 아니고, 정제육을 줄 때 유독 행복해 보였거든요.”

    네드 님이 옅게 웃었다. 그러자 비상식량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기 시작했다.

    ―용과 마음이 통하는 인간이라. 이런 인간들만 있다면 좋을 텐데. 쯧…….

    그러는 사이 엘데가 날 쳐다보면서 혀를 차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네!

    황당해하는 내 시선과 비상식량의 시선이 마주쳤다.

    ―…….

    근데 그 시선이 제법 촉촉했다.

    “…….”

    설마 진짜 그거 때문에 울려는 거 아니지? 너 우는 척하는 거지?

    ―뀨우…….

    하지만 비상식량은 정말 날개를 축 늘어뜨려 버렸다.

    저건 ‘절망’이나 ‘슬픔’ 상태의 용이 자주 하는 동작이었다.

    진짜였냐!

    난 이마를 짚었다.

    “아니…….”

    하긴 PC버전에서는 이 정도로 용하고 교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비상식량이 무슨 생각인지 알 턱이 없었다.

    진짜 그거 때문에 섭섭했던 거야?

    가끔 말 안 들었던 것도 설마 그거 때문?

    [꼭 때려야 말을 들어요]

    분명 비상식량한테 그렇게 메모해둔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밥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긴 용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지고, 강한 힘을 쓸수록 먹이를 든든하게 먹여야 한다는 설정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건 유네리아 디렉터마저도 ‘사실 저도 밥은 그냥 가성비로 줍니다. 용한테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라고 공인했던 쓸모없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용하고 눈이 마주치니까…….

    “아니…….”

    난 황당했지만 그 시선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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