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12)

<52화>

처음 게임을 하는 그가 잡을 수 없는 것이거나, 다른 방법으로 잡아야 하는 몬스터인 듯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려고 했지만.

[비상식량(용) : 사망]

그를 이곳까지 태워준 용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위로 커다란 검이 떨어져 내렸다.

[‘전면 방어’ 스킬을 사용합니다.]

[‘방어막’ 스킬을 사용합니다.]

[‘신성한 보호’ 스킬을 사용합니다.]

―쾅!

[-1,994,712!]

방어 스킬을 몇 겹이나 겹쳤는데도 사망 직전의 데미지가 들어왔다.

[네드 / Lv. 500

체력 : 637,678 / 2,632,390]

그는 그 순간 암담함을 느꼈다.

해결방안을 생각하기엔 이 게임에 대한 제 지식이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죽을 순 없었다.

그래서 그저 버티는 게 고작이라고 생각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을 때.

“네드 님-!”

그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푸른 용에 탄 붉은 머리의 여자가 그에게로 손을 뻗고 있었다.

“……아.”

분명 게임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하지만 생생한 표정과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 손을 잡은 순간.

그는 생각했다. 첫 만남이라고.

* * *

편지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 유니라는 사람은 굉장히 쾌활하고 발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일단 해 보죠.”

그 말이 습관인 것 같은 그녀는 한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경험이 많아 보였다. 이 낯선 세계에 대해서.

그래서 그 경험에 기반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요컨대 충분히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그냥 생각하는 속도가 빠른 건가?

“아니, 실화냐?”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녀의 모든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머리를 붙잡고.

“이 망겜이 진짜!”

그렇게 괴성을 지를 때마다 그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녀는 금세 회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처음이라 그래!”

그렇게 알 수 없는 말로 그를 위로하는 그녀는 늘 정답을 찾아냈다.

그렇게 한참을 끌려다니다가 알았다.

그녀는 생각이 없는 것도, 생각이 지나치게 빠른 것도 아니었다.

매몰되어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경험에 기반한 결론을 내리고 움직인다.

하지만 모든 것이 최선의 결과를 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했을 때, 그와는 달리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가 지켜본 결과,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고도, 너무나도 빛나는 이유였다.

일이 잘못되어도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손가락질과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

그 두 가지가 있기에 그녀는 거침없는 것이었다.

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현의 세계에 파문이 일었다.

* * *

실수와 실패, 시선이 두려운 삶을 살았던 그에게는, 회사를 나서는 순간부터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유네리아에서는 달랐다.

‘아, 이쪽이 아니구나.’

길을 헤매고 실수해도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실수한다고 해도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제야 제가 해방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실수해도 나만 잘못되는 거니까.

그런데.

‘네드 님!’

함께하는 사람이 생겨 버렸다. 게다가 이 세계에는 이 사람과 나, 단 둘뿐이란다.

그러니 다시 두려워졌다.

이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는 거듭 긴장하려고 했다.

이 세계에 익숙해 보이는 그녀와는 달리 저는 아는 것조차 없고 사전 조사할 환경조차 안 되는 상태였으므로.

하지만 유니는 거듭 말했다.

‘긴장 풀어요.’

다 처음엔 못하는 거지, 뭘!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하는 그녀는 뭐든지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아니, 실제로 이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었다.

당황한 그의 앞에 빛처럼 나타나 그를 구해 주는 이 사람은, 처음에는 불안을 주었다가, 이내는 안도감을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 이쪽에서 뭘 하든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단 해 보죠.’

그녀의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말만을 좋아하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도 커플 될 생각도 별로 없고…….’

그녀의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유가 있습니까?’

왜? 왜 이성을 사귀기가 싫어요?

그 사실을 궁금해한 순간 그는 제게 충격을 받았다.

제가 왜 그 사실을 궁금해하는지 모를 만큼 그는 어리숙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저를 끊임없이 파고들고 연구하는 그에게, 제 감정의 변화는 더 잘 보였다.

‘귀찮아요.’

‘내 인생에 군더더기 붙는 게 싫어서.’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에 박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당신 옆에 남으려면……,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안 되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 욕망을 깨달았다.

그녀의 옆에 남아 있고 싶다는 적나라한 욕망.

하지만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그녀와 그는 만난 적도 없는 남남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래서일까, 그날부터 유독 그녀가 자꾸 눈에 밟혔다.

헤어질 때까지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군더더기가 붙는 건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차마 제 마음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묻어야 할 마음이었지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계에는 단 둘뿐이었고, 그가 그녀를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사람과 이 모든 것이 끝나고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그에게는 해일처럼 현실의 기억들이 닥쳐 왔다.

이곳에 적응하느라 미뤄뒀던 실패와 실수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시선…….

그 시선들 사이에 이 쾌활한 사람을 던져넣는 건 잔인하고 이기적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만큼 이렇게 반짝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나는 군더더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아쉬워도 그러려고 했다. 접는 게 옳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힘들 땐 힘들다고 해요.’

그 첫 위로를 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안 순간.

그리고.

“실패해도 돼요.”

그도 모르게 그를 옭아매던 것을 풀어주는 말을 들은 순간.

그 두 순간은 그에게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괜찮죠?”

그렇게 속삭여오는 목소리. 목과 귓가에 닿아오는 숨결.

그리고 레버를 꽉 잡은 손. 가볍게 미소 짓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그녀의 어깨에 닿아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유니는 생각에 잠긴 그를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이 그를 향했다.

새벽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는 언제 어디서 보든 아름다울 것 같았다.

……그녀 자체가 반짝이는 사람이었으므로.

“?”

괜찮냐는 말에 그는 답할 수가 없었다.

괜찮으면서도 괜찮지 않아요.

레버야 얼마든지 당길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보는 지금이 괜찮지 않게 되어 버렸어.

그녀에게 ‘군더더기’가 되지 않기 위해 접으려던 마음이 활짝 펼쳐져 날아올랐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유니는 그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은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실패를 해도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실패하더라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걸 알려 준 사람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사람.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는 사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바꾸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군더더기’로 인식되기는 싫었다.

그녀의 옆에 서고 싶었다. 그녀가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타인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가 원해서.

“네드 님?”

그녀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힘껏 레버를 잡아당겨 버렸다.

그녀에게 향하는 제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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