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실수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마라. 저들이 뭘 원하는지를 먼저 살펴.’
‘뭘 원하는지를 살피고, 기민하게 행동하는 거다.’
‘그러면서도 네가 원하는 걸 직접 말하면 안 돼. 이 세계는 작은 부탁에도 철저하게 대가가 오가는 세계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밑져서는 안 된다.’
일찍 상류사회에 발을 들인 결과.
그는 수많은 인맥을 가졌다.
전화 한 통만으로 회사의 번거로운 일을 처리할 수도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가 당연히 성의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점점 없어졌다.
대가와 대가만이 오가는 세계.
‘강이현, 그 사람은 약점이 없어.’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털어보면 먼지는 나오는 법이지.’
그러자 그의 약점을 쥐고자 하는 자들은 점점 많아졌고,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적이란 전제를 깔고 비즈니스적으로 대하는 게 낫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차렸다.
진정으로 사람과 사귀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때문에 그는 점점 사람들과 멀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완벽한 그가 실수하기만을 끊임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망신이 그런 망신이 없어!’
그렇게 외칠 아버지도.
‘천재는 다른 사람들하고 다를 수밖에 없지. 실수는 용납되지 않아. 널 지켜보는 사람이 국내외에 몇인 줄 알아?’
그렇게 말할 어머니의 모습도 불 보듯 뻔히 떠올라서.
끊임없이 그는 시험을 받았다.
일생의 어느 순간도 시험이 아닌 때가 없었다.
‘실수하면 안 돼.’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최악의 선택만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불행한 결과들만큼은 피하기 위해 애쓰고 또 애썼다.
‘크게 될 거야, 저놈은.’
그럴수록 집안에서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이현아, 연락 한번 없고 엄마가 슬퍼.’
그때쯤 온 어머니의 연락도 무시해 버렸다.
회사로 찾아오시기까지 했지만 만날 시간도 없었고 만나기도 싫었다.
그 기대치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그를 휴가로 이끈 건, 긴 업무로 어지러움을 느껴 병원에 들렀을 때 만난 간호사였다.
H대 병원.
새벽 2시에 들를 수 있는 곳은 대형병원의 응급실뿐이었다.
비서는 퇴근했으니 어지러운 상태여도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고 간신히 도착한 응급실의 간호사들은 비틀거리는 그를 보고 놀랐다.
‘경증 환자 구역으로 부축해드려!’
그러면서 수많은 처치가 이루어졌다. 정신없는 사이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에도 그는 기사가 뜨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새벽의 응급실인데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일이면 ‘KS그룹 강 대표, 새벽 H대학병원 응급실행’ 같은 기사가 실릴 수도 있었다.
머리만 짚어도 뇌혈관 질환이 있을 거라느니 하는 헛소문을 퍼트리는 자들이 많았으니, 빠르게 대응해야 할 터였다.
‘누워 계시니까 좀 어떠세요?’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피곤한 얼굴을 감추려고 했던 걸 들킨 걸까.
‘이 시간까지 회식을 하신 것 같진 않고, 일하다가 오셨나 봐요.’
눈치가 빠른 간호사였다. 그의 시선이 간호사의 명찰로 향했다.
간호사 유은채.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시면 안 힘드세요?’
‘안 힘듭니다.’
그 말은 습관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간호사는 그 말이 거짓말인 걸 알아챈 듯했다.
‘안 힘들기는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는데.’
‘괜찮습니다. 다들 이렇게 살아요.’
억지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도 문득 생각했다.
정말 다들 이렇게 살까?
매 순간 이렇게 시험당하고 숨이 차도 멈출 수 없는 삶을 살까?
정말 모두가 이렇게 사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살면서 미쳐버리지 않고 사는 거지?
사실 내가 제일, 의지박약이 아닐까?
천재란 건 다 허상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간호사는 그의 말에 대번에 답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힘들면 힘든 거지.’
그 말은 그에게 일종의 충격이었다.
‘누구든 본인이 힘들면 힘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시련을 버틸 수 있는 그릇의 크기도 다르고요. 그리고 그 그릇이 작다고 의지가 약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냥 누군 많이 먹을 수 있고, 누군 조금만 먹을 수 있는 것 같은 성향 차이 같은 거죠. 그렇게 말한 간호사가 말했다.
‘다들 그렇게 사는지는 관심 없고 내가 힘들면 힘든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내가 힘들면 힘든 거야.
그 말은 그의 마음에 파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긴 휴가를 결심했다.
‘너…… 이거 괜찮겠어?’
주변 사람들부터 부모님까지 당연히 난리가 났다.
특히 장기 프로젝트가 앞으로 몇 개나 기획되어 있었기에 같이 회사를 이끌어가던 사람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결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쉬지 못할 것 같아서요.’
‘기자들 또 시끄러울 텐데.’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제가 힘들어서요.’
천재고 뭐고 모르겠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하나였다.
휴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회사를 나온 그는 집으로 가면서도 생각했다.
뭘 하고 쉬지?
그의 인생에 휴식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띈 게 유네리아였다.
[새로운 일상이 필요한 당신에게!]
그 소개 문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간 그는 휴식이란 말에 기쁨과 아쉬움을 함께 담고 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게임을 하려고요.’
‘뭐?’
강이현의 인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시작했다.
‘애가 사람 꼴이 아니잖아!’
‘나도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니까요!’
1층에서 싸우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무시하면서.
[닉네임을 설정하세요^^]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쓸데없는 고민을 해 보면서.
닉네임?
[강이현]
[이미 등록된 닉네임입니다.]
[이현]
[이미 등록된 닉네임입니다.]
결국 그는 생각나는 단어를 아무거나 집어넣었다.
[NED]
그러자 안내창이 떴다.
[영어 닉네임은 불리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ex. 닉네임이 ‘akrkagkrltlfgek’인 경우) 에이님, 에이케이님]
닉네임은 안 겹쳤는데 이번엔 다른 게 문제였다.
긴 설명에 눈살을 찌푸린 그는 그냥 닉네임을 바꾸었다.
[엔이디]
[이미 등록된 닉네임입니다.]
이미 있는 것이 뭐 이리 많은지.
[네드]
NED를 그대로 읽어 버리자 그제야 통과가 되었다.
[‘네드’ 닉네임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그의 유네리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