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연지곤지]
천리안 알바만 했어도 지금쯤 돈방석에 앉아 있었을 텐데?
내 말에 갑자기 음유시인이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겐…… 나를 지킬 능력이 없으니까.”
“아.”
“아.”
나와 네드 님은 동시에 탄식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를 갑자기 들이댄다고?
하긴, 멀리 볼 수 있으면 뭐 하나.
뭔가를 봐주길 바라는 사람보다, 자기가 뭘 하는지 보여주지 않길 원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실제로 천리안 스킬이 삭제된 이유도 유저의 프라이버시 문제 때문이었다.
앞으로 보고 뒤로 봐도 전투 능력이 없는 것 같은 이 음유시인 NPC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아마 자유도 높은 유네리아 특성상 목이 날아가도 천 번은 날아갔을 것이다.
“후우…… 하지만 자네들이 이 힘을 가진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던 음유시인이 딸꾹질을 몇 번 했다.
저런 대사 치는 걸 보니 잘하면 스킬 얻을 수도 있겠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정말 천리안 스킬을 손보고 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나도 보스룸 파밍에는 관심이 아-주 많은 유저였으므로 매우 흥미로웠다.
“딱 한 번. 높은 곳에 올라가서…… 이 힘을 얻었는데. 딸꾹!”
아까부터 네드 님이 사 준 술로 병나발을 불더니 거나하게 취한 게 분명한 음유시인이 흐린 눈을 뜨며 말했다.
“이 힘을…… 누가 줬지? 기억이 안 나는구만…….”
그걸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음유시인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기억나는 건…… 날개에서 흩날리던, 가루였네.”
“……가루?”
“가루……?”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네드 님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신 듯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우리 같은 놈 생각하는 거?
“혹시 키가 요만했어요?”
내가 손을 1m 좀 안 되게 벌려 보이는 사이, 네드 님이 몽타주보다 확실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 딱 그만한 크기셨던 것 같네. 아닌가? 딸꾹.”
음유시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네드 님의 사진 인화……가 아니라 그림이 뚝딱 완성되었다.
“이 사람…… 아니, 요정이 맞습니까?”
네드 님의 그림을 본 음유시인은,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이, 이, 이, 이분을 만났는가? 뵈었는가? 모셨는가?”
무슨 카이사르야?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술이 확 깬 그는 남다른 라임을 뽐내기 시작했다.
흥분한 광신도의 얼굴을 한 채로.
음유시인의 눈에서는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았다.
나는 희번덕한 눈을 한 그의 앞에서 차마 이놈 때문에 여기 갇혔노라 욕할 수는 없었다.
“뵈뵈뵈었죠. 우리도 그분의 은혜를 입어서 이렇게 강해졌답니다.”
정확히는 강했다가 약해졌지만^^!
내 말에 네드 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네드 님, 지금은 하얀 거짓말 타이밍입니다! 당신의 유려한 말빨을 뽐내주세요!
잘 구슬리면 천리안 스킬 얻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내가 잠깐 네드 님께 정신이 팔린 사이.
앞에서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건 음유시인의 목소리였다.
뭐뭐뭐뭐임?
돌아보니 그는 감동받은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네가 뭐?
“같은 분께 사사받은, 동, 동문을 만날 줄이야!”
사사? 동문? 그따위로 묶지 마! 내가 기겁할 때였다.
“그럼 이것만큼은 알려 주어야겠군.”
저 알아서 감동의 도가니탕에서 헤엄치던 음유시인 NPC가 목소리를 팍 줄이고 말했다.
“그분께선 가족 외엔 알려 주지 말라고 했지만, 동문이 바로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네리아GM이 가족 말곤 가르쳐주지 말라고 하디?
이 악마 같은 놈 보게? 내가 알기로 음유시인 NPC는 천애 고아였다. 한 마디로 아무한테도 가르쳐주지 말라는 뜻이었던 듯했다.
근데 그게 이렇게 된다고?
“그렇지 아니한가?”
음유시인이 눈을 빛냈다.
뜬금없는 밸런스 게임이 시작되었다.
신스킬 얻기 vs 네리아GM 제자 되기!
당신의 선택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렇죠.”
네리아는 싫었지만 신스킬이 너무 달콤했다……!
“오오……!”
내 말에 음유시인은 감동에 익사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륙의 가장 북쪽…… 안개로 가려져 있던 섬이 얼마 전 모습을 드러낸 건 알고 있나?”
나와 네드 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가 봤으니 알 수밖에.
“그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 끝에?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머리 위에 떴던 무지막지한 데미지도 떠올랐다.
내 캐릭터 스탯을 그대로 가진 네드 님을 한 방에 빈사 상태로 빠뜨렸던 거대한 몬스터.
그놈 뒤에 뭐가 있느냐고?
“뭐가 있는지…… 아세요?”
그야 궁금하지, 안 가본 맵이니까?
어? 근데 천리안 있으면 볼 수 있겠네?
난 눈을 반짝였다.
“뭐가 있는지 아세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NPC가 말하는 것 중에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천리안으로 뭘 봤다는 건 구라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곳엔 ‘얼음의 왕좌’가 있네. 한기가 어리다 못해 생명체는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지. 그런데.”
그런데? 음유시인은 기가 막힌 데서 말을 끊고 침을 꼴깍 삼켰다가 말했다.
“그곳에 얼마 전에 어떤 자가 나타나 앉았어. 내 천리안으로는 그것만 볼 수 있었지만……, 혹시 모르지. 자네들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도.”
“오…….”
그 말에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이거 최종보스 떡밥 같은데요?”
네드 님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드 님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렇게 티 나게 무시무시한 배경 깔아 주는데 모를 리가.
그래서 그 보스가 누군데??
내가 눈을 반짝일 때였다. 어느새 술이 다 깬 것 같은 음유시인 NPC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들 앞에는 더 많은 모험이 있어 보이는군. 나중에 한 번 가보게.”
저 대사는?
‘네 레벨로는 접근 불가능입니다’를 곱게 말하는 대사잖아?
난 눈살을 찌푸렸다. 나야 그럴 수 있다.
근데 레벨 500으로 잡힐 네드 님도 못 간다고?
내가 멈칫했을 때였다.
“그나저나 노래를 해 달라고 하였지. 무슨 노래를 해줄까, 흐음…….”
그렇게 중얼거리던 음유시인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아니, 천리안 얘기 좀 더 해주면 안 될까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잘 씹어주고는 불쑥 노래를 시작했다.
“북에는 얼음이 있다면, 남쪽에는 뜨거운 사막이 있지.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그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에, 태울 것도 없는 곳에 불꽃이 솟아올랐네.”
저기요? 아까는 동문이라며? 동문 말 이렇게 씹어도 돼?
“그리하여 엘프들의 마지막 터전도 무너져 사막이 되어가고…….”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난 천리안을 잠시 잊어버렸다.
“뭐가 무너져요?”
난 귀를 의심했다. 음유시인 NPC가 말했다.
“남쪽 숲이 무너져 가고 있네.”
“뭐요?”
실화냐?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중요한 곳입니까?”
난 그 말에 엄청나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매우 많이. 알라반 왕성보다 좀 더 많이.”
닉값하는 유저 ‘파개한다’가 알라반 왕성을 부순 후. 온갖 곳을 다 부수고 다녔던 유저들도 차마 못 건드렸던 곳이 있었다.
그게 바로 남쪽 숲, 엘프들의 마지막 터전이라고 부리는 곳이었다.
“무엇 때문에……?”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의 말에 내 겉옷인 제복을 가리켜 보였다.
“이거 말이에요. 겉옷 탭에 입는 거.”
“예.”
네드 님도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겉옷과 속옷의 개념을 알고 있었으므로, 보기 흉한 갑옷 대신 깔끔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난 그 옷을 보다가 말했다.
“그거 죄다 남부 숲 엘프들 작품이에요.”
“……!”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떴다.
“겉옷이 없으면 갑옷만…… 입어야 합니까?”
뉴비마저 당황하게 하는 남쪽 숲의 위기.
난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깡통 상태로 돌아다녀야 해요.”
“…….”
네드 님의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해졌다!
남쪽 숲이 우리의 사회적 시선을 책임진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게 분명했다.
유네리아의 갑옷 중엔 제대로 생겨 먹은 게 없었던 것이다.
남쪽 숲 없어지면 우리 그 찌그러진 깡통 같은 옷 입고 다녀야 돼!
“‘용사’가 나타나 그들을 구해 줬으면 좋겠는데…….”
음유시인은 그런 우리 앞에서 아련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련하게 말하지 않아도 간다고!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우리를 흘끔흘끔 간보는 것 같던 음유시인이 슬며시 말했다.
“그곳에 ‘의문의 불꽃’이 피어났단 말일세……. 불꽃. 뜨겁지, 뜨겁고…… 음……. 아무튼 불꽃이 있어.”
넌 남쪽에 크리스탈 있다는 얘기를 그렇게 성의 없이 해야겠니?
[메인 퀘스트 ‘사막의 불꽃’을 입수했습니다.]
[사막의 불꽃
- 남쪽에서 시작된 재앙에 대해 알아보기]
역시 퀘스트 안내는 끝내주게 구체적이었다. 뉴비 다 접을 만하죠? 그죠?
“일단 가 볼까요?”
난 네드 님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해야 할 게 많았다.
“동문이여! 또 들르게! 그때는 한 번 정도는 돈을 안 받고도 이야기해줄 수 있다네!”
동문이라며 한 번만 무료 서비스냐!
그걸 따질 시간은 없었다.
“천리안 스킬 먼저 따죠.”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보다도 천리안 스킬을 먼저 따는 게 나았다.
남쪽을 이 잡듯 뒤지는 것보단 천리안으로 보는 게 빠를 테니까.
“아까의 스킬 단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생각이십니까? 산이라든지…….”
네드 님이 침착하게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장 높은 곳 올라가라고 하면 뻔하죠.”
유네리아에서 가장 높은 곳. 그곳은 공교롭게도 테리반 성 근처에 있었다.
하필 거기에 ‘절경 수집 노트’에 기록해야 하는 장소가 있어서 별안간 유저들을 등산가로 만드는 장소.
하데스 산봉우리에 가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