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12)

<38화>

“오.”

난 짧게 감탄했다. 이건 네드 님의 10만 골드가 이뤄낸 쾌거였다.

그때 우리에게 시종 한 명이 다가왔다.

“유니 님과 네드 님이십니까?”

네드 님이 메디카 사람이라는 건 신뢰도가 80%를 넘어간 이상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만 켄에게 20%의 신뢰도를 받았으니, 네드 님의 신뢰도는 아직 60%일 텐데?

하지만 켄이 죽어가면서 네드 님의 볼을 찐하게 쓰다듬은 덕인지는 몰라도 네드 님 역시 그에게 20%의 신뢰도를 받은 것으로 처리된 듯했다.

“네, 맞습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네드 님이 답하자 시종의 얼굴이 폈다.

“전하께서 두 모험가님과 함께 식사를 들고 싶어 하십니다.”

듣자 하니 엉망이 될 뻔한 왕성을 구하고 네리스를 쫓아내 준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는 듯했다.

“이거 경험치 많이 줄 것 같은데, 가요.”

그리고 왕성 음식이면 무조건 최고급이다!

입에도 즐겁고 경험치에도 즐거운 이 히든 퀘스트를 놓칠 순 없었다.

하지만 네드 님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저만 좋은 일을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왜요?”

식사 혼자 하시게요? 내가 눈을 끔뻑이자 네드 님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유니 님의 캐릭터는 500레벨이 아닙니까.”

“아.”

만렙이라서 경험치가 안 쌓인다고? 난 손을 내저었다.

“그거 경험치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돼요.”

난 눈을 찡긋했다.

유네리아는 500레벨이 되어도 경험치를 저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으니까.

갓겜 같지?

[평범한 경험치 상자]

[중급 경험치 상자]

[고급 경험치 상자]

[최고급 경험치 상자]

물론 유료다!

네 단계로 나뉘는 상자는 당연히 가격이 달랐다.

각각 1만 원, 3만 원, 5만 원, 9.9만 원이다.

그리고 평범한 상자는 500레벨 이후에 얻는 경험치를 25%만 저장할 수 있게 해준다.

최고급 상자는 100% 모두 저장할 수 있게 해주고.

게다가 평범한 상자는 경험치 1억을 쌓으면 꽉 차서 다시 사야 하지만, 최고급 상자는 경험치 제한이 20억이었다.

요컨대 경험치 20억 차면 또 10만 원 가까이 써서 상자를 사야 하는 망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내 기억상 내가 그 상자를 970개쯤 들고 있었는데…….

아마 그중에 900갠가 차 있을걸?

“아이템창에 경험치 저장 상자 있잖아요. 그걸로 나중에 만렙 확장되면 레벨업 할 수 있어요.”

“오…….”

네드 님의 얼굴이 좀 폈다.

“그럼 더 열심히 경험치를 쌓아야겠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네드 님의 정보창만 경험치를 먹는 게 미안하셨던 모양이다.

일찍 알려드릴 걸 그랬나?

“좋은 시스템이 있었군요.”

네드 님은 흥미로운 얼굴로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좋은 시……스……템?

랭킹권을 유지하려면 개당 9.9만 원짜리 상자를 끊임없이 사야 하는 좋은 시스…템……?

“좋긴요, 이거 완전 돈 빨아먹는 시스템인데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물었다.

“많이 듭니까?”

그야 20억 채우는 데 제대로 사냥하면 사흘 걸리니까, 랭킹 유지하려면 사흘마다 10만 원을 써야 하는 시스템이니 적게 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무려 토르의 검의 주인이었다.

난 진지하게 말했다.

“별로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실걸요.”

“아, 다행입니다.”

네드 님의 표정이 폈다.

비싸다고 하면 사 주려고 하신 건 아니죠? 뉴비 뜯어먹는 사람 만들려고 하신 건 아니지??

내가 불길함을 감추는 가운데 시종이 다시 말했다.

“만찬을 준비했으니 부디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에 나와 네드 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갑시다! 상자 세 개만 채워 줘!

* * *

레벨 30대 시나리오 지역이라고 해도 왕성은 왕성이었다.

[Lv. 497 양고기 스테이크]

음식은 정말 최고급이란 뜻이었다.

“드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음식 레벨을 보고 네드 님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저 레벨 제한 풀어놨어요. 네리아GM 구워삶아서.”

“아.”

어쩐지. 그는 순식간에 뭔가를 이해한 표정이었다.

하긴, 내가 레벨도 낮은데 어떻게 네드 님 템창에 있는 물건들을 그렇게 자유롭게 썼는지 궁금하셨겠지.

근데 그걸 안 물어보신 건 설마……

파티원 레벨…… 보는 법…… 모르시는…… 거……?

물론 유네리아 파티창 UI가 좀 뭐 같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 자리해 줘서 고맙네.”

내가 경악하는 사이 왕과 왕비가 자리에 앉았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들게.”

차린 게 별로 없는 테이블(음식 평균 Lv. 498) 앞에서 왕비가 푸짐한 미소를 지었다.

“왕성에 기이한 일이 많았다지. 모험가들이 아니었다면 위기를 이겨낼 수도, 진정한 충신들을 가려낼 수도 없었을 게야.”

그다음으로 왕이 말했다.

“진정한 충신이요?”

나도 모르게 되물었던 난 뒤늦게 마법사들을 생각해냈다.

“아, 혹시 연구소의 마법사들은……!”

“그래, 그들 말일세. 몰려드는 병사들을 피해 어떻게든 진흙의 원인을 알아냈다지.”

왕은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그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하사했네. 그들이 아니었으면 왕성이 무너졌을지도 몰라.”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갑자기 급발진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왕성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그런 사특한 마법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왕비도 홀리고 나도 홀리고 기사단장은 죽은 자로 세우다니!

왕이 길길이 날뛰는 동안 선택지가 떴다.

[① 그러게 말입니다.

② 기사단장은 이미 죽은 채로 네크로맨서의 조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후자야 이미 왕도 알고 있는 내용일 듯했다.

이럴 때 선택지에 따라 보상은 달라지게 되어 있다.

이게 바로 유네리아의 선택적 자유 보장 시스템!

아, 아무튼 켄 죽는 건 못 막지만 경험치는 많이 줄 수도 적게 줄 수도 있다고!

여기서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하면 팩트를 전달할 순 있겠지만, 본의 아니게 왕과 왕비의 볼을 팩트로 후려갈기는 격이 된다.

기사단장이 맛이 간 것도 모르고 뽑았냐? 라는 뜻이 되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래서 난 첫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이게 바로 경험치를 위한 최고의 방법―

잠깐, 네드 님 딴 거 고른 거 아니죠???

내가 급히 네드 님을 돌아봤을 때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이 무거우셨겠습니다.”

유려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는 듯한 가락이 느껴지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오…….

내가 짧게 감탄했을 때였다.

별안간 왕의 얼굴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

너무 깊은 공감을 받은 나머지 울음이 터진 게 분명했다.

자자잠깐, 거기서 우시면 왕 울린 죄로 우린 감옥행이거든요?

왕은 다행히도 용케 울음을 참아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아성찰을 시작했다.

“다 이 몸이 부덕한 탓 아니겠는가. 내 눈만 제대로 되었어도! 내가 사람 보는 눈만 있었어도!”

그러더니 와인을 병째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엔 왕 과음시켜서 감옥 갈 위기였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라 할 수 있겠소!”

왕은 병나발을 불더니 비틀거리면서 말했다.

“다! 내 죄요!”

네 죄인데 우리가 왜 감옥행이야!

[알라반 왕이 알코올에 취합니다! (34%)]

[알라반 왕이 만취 시 ‘술버릇’ 히든 게임이 시작됩니다!]

뭔진 모르지만 절대 보고 싶지 않은 히든 게임이었다.

기절시킬 수도 없는 왕 술버릇 받아주는 게임? 게다가 히든 미션도 아니고 히든 게임이면 보상도 없잖아!

내가 얼굴이 파래졌을 때였다.

“그게 아닙니다.”

네드 님이 입을 열었다.

“알라반의 번영은 왕께서 계시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래! 번영! 지금껏 알라반의 역사에 지금처럼 왕국민들이 굶은 적이 없다고 하네!”

왕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

난 네드 님에게 작게 속삭였다.

“메디카가 알라반보다 잘 살거든요.”

“아.”

네드 님은 곧바로 이해한 것 같았다. 우리가 망했다는 사실을.

왕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하려는 때였다.

난 어떻게든 이 불을 끄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였다.

“전하, 저는 메디카에서 왔습니다.”

네드 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오.

내가 짧게 감탄하는 사이 네드 님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지금 알라반의 상황이 안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왕께서 이렇게 왕국민들을 생각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드 님이 부드럽게 웃자, 왕의 표정이 좀 폈다.

가히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빨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왕국민들에게 와닿고 있을까?”

갑자기 ‘왕국민에게 닿기를’을 찍으며 아련해지는 왕에게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입니다. 알라반 왕국민도 아닌 제가 느낄 정도라면, 알라반 왕국민들도 충분히 느끼고 있겠지요.”

네드 님이 손을 펴 보였다.

“왕성에 변고가 생긴 것 같은데, 능력이 되지 않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을 저희에게 살펴봐 달라 부탁한 것은 알라반의 평민들이었습니다.”

하얀 거짓말을 지어내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그 간절함이 저희를 이 성으로 불러들인 겁니다. 왕께서 베푸신 자비가 돌아온 셈이죠.”

네드 님, 유네리아 호감도 연애 시뮬레이션 만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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