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하아!]
기합이 더 출중해진 켄은 알라반 기사단에 있었다.
리리스가 준 힘이 대단하긴 했는지 그는 기사단장의 망토를 휘날리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진 몰라도, 확실한 건 NPC와 우리가 느끼는 시간 흐름은 다른 듯했다.
[더, 더 강해져야 해……! 모험가님을 지키려면……!]
켄이 그런 참한 생각을 하면서 수련에 매진하는 사이, 알라반 왕성에는 수상쩍은 진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건 켄이 푸른 크리스탈을 알라반 지하수로에 숨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왕과 왕비가 그를 불러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당장 조사해 보도록!]
그리고 그렇게 외치는 왕 앞으로, 켄에게서 흘러나온 붉은 마력이 리리스의 모습을 갖추었다.
[잘 인도해 주었다, 켄.]
그러면서 리리스가 왕과 왕비에게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아니, 살아있는 사람한테도 마법 걸리는 거였어?
유네리아에서 개연성 따지면 지는 거야……! 뇌 빼고 봐야 돼……!
내가 노력하는 사이 왕과 왕비는 리리스에게 홀려 나라를 잘 말아먹기 시작했다.
[알라반의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신나게 연회장에서 건배를 하는 동안 알라반 왕성의 수상한 진흙은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그걸 연구하려는 마법사들은 리리스에게 조종받는 왕의 명에 의해 갇히다시피 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유니 님?]
성에 나와 네드 님이 왔을 때, 기사단장실에서 켄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만난 후, 얼마 안 있어 지하수로에서 다시 만났다.
[가지 마십시오.]
‘크리스탈을 지켜야 해.’
‘유니 님을 지켜야 해.’
켄의 머릿속에선 상충된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내 앞을 가로막은 듯했다.
[그래도 난 가 봐야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켄은 결국 물러났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유니 님을, 지켜야 해!’
그러면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지? 리리스 암살이라도 하게?
하지만 건실한 초보 마을 출신 청년 켄은 암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없군.]
이 방, 크리스탈이 있는 방에 와서.
―우우웅!
고고한 빛을 발하는 크리스탈을 덥석 집어서…….
―꿀꺽.
먹었잖아??
이건 나도 놀랄 전개였다.
[크윽!]
크리스탈의 푸른빛이 그의 몸을 터질 듯이 빛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더니, 그는 어디서 준비했는지 모를 가짜 크리스탈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방에서 사라졌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가 들어오는 것까지.
진회색 바탕의 회상 장면은 그게 끝이었다.
* * *
다시 내 시야가 돌아왔다.
켄은 여전히 아련한 표정으로 네드 님을 붙잡고 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켄이 네드 님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이, 당신이 무사하길…… 바랍니다.”
켄은 누가 봐도 죽어가고 있었다.
“쯧쯧.”
그러자 지금까지 상영회를 기다려준 상냥한 리리스가 말했다.
“그러게 힘을 원한다면 한 가지만 따랐어야지.”
물론 여전히 항아리인 채였다. 진짜 개판이다!
내가 감탄하는 사이 항아리는 악당의 전용 대사를 날렸다.
“흥이 식었다.”
흥이 식어 버렸으니 책임져야 할까요? 저 악기 하나도 안 갖고 왔는데?
하지만 리리스는 내가 악기를 갖고 있든 말든, 둥실 떠서 방 한가운데의 푸른 크리스탈로 향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항아리가 크리스탈 근처에 닿자, 뚜껑이 열리고 크리스탈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거 가짠데…….
그렇게 사라져 가는 리리스는 여전히 항아리 모습이었다.
캬, 망겜 잘 굴러간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네드 님이 켄의 목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때 켄이 또 아련한 표정으로 네드 님을 잡았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조금 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더니 쓰게 웃었다.
“저는 모험가님과 다르게, 이미 죽었습니다.”
그니까 그 모험가 거기 말고 여기 있다니까?
“그러나 한순간…… 네드 님을 구할 수 있었으니 만족합니다.”
여기 좀 봐 줄래?
네드 님이 떫은 표정을 짓는 가운데, 켄의 몸이 발끝부터 서서히 재로 변해 흩날리기 시작했다.
“……!”
네드 님이 미간을 좁혔다.
이런 연출을 처음 보는 게 분명한 네드 님은 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원래 메인 퀘스트대로 진행되는 거면 앞으로 이렇게 죽을 캐릭터가 셋은 더 있을 텐데.
하긴, 원래 유네리아 스토리는 초반만 우는 거지. 음음.
―사아아…….
그렇게 켄이 사라진 순간.
―데구르르.
그가 있던 자리에 푸른 크리스탈이 굴러 떨어졌다.
아까 켄이 삼킨 것이었다.
네드 님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이 맛에 유네리아 유저들이 스토리 스포를 안 한다니까?
스토리 보는 뉴비들의 절규를 보는 게 고인물들의 또 다른 컨텐츠였다.
물론 처음엔 절규하던 뉴비들도 저렇게 죽는 캐릭터를 세 번쯤 보다 보면 시나리오 라이터를 욕하게 되어 있었다.
[아니 뭐 스토리가 다 똑같네]
그리고 이런 염세적인 반응을 하며 커뮤니티에 나타나 욕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직 네드 님은 처음이라 충격이 큰 모양…….
“근데 저 NPC가 정확히 누굽니까?”
“아.”
충격받기엔 너무 모르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네드 님의 충격이 가신 얼굴엔 떨떠름함만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네드 님에겐 보스가 항아리로 변하고 생판 초면인 NPC가 갑자기 직진 플러팅을 해대는 게 더 충격이었던 듯했다.
아무래도 아련한 건 켄 뿐이었던 듯했다.
“알라반 시작 마을에 있는 NPC인데, 오류 걸려서 저한테 그래야 하는 걸 네드 님한테 그런 것 같아요.”
망겜 하려면 이 정도 버그에는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내가 가볍게 말하자 네드 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럼 유니 님과 켄의 사이는……?”
그러더니 별안간 이상한 걸 묻기 시작했다.
난 떫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NPC랑 뭔 사이가 있어요?”
호감도 몇 %인지 묻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
내 답에 잠시 멈칫하던 네드 님이 표정을 폈다. 그러더니 푸른 크리스탈을 집어 들었다.
“……일단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귀가 빨개진 게, 황당한 질문을 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신 듯했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일단 나가요. 그 전에 저건 줍고.”
난 리리스를 잡았을 때 떨어졌던 보석 두 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분명 이거 내가 알고 있는 아이템인데…… 설마…….
[저항의 정령석]
“어?”
진짜잖아! 난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유니 님?”
나란히 리리스가 떨어뜨린 아이템을 줍던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난 황당해서 보석의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항의 정령석
- 다섯 크리스탈의 힘을 모두 흡수한 정령석. 이것을 소유하면 크리스탈의 영향권에서도 크리스탈의 효과를 받지 않는다.]
진짜 시나리오 마지막 보스가 떨구는 거잖아!
리리스가 그 마지막 보스룸에 있는 항아리로 변할 때부터 설마 하긴 했는데, 정말 이걸 드랍한 거야?
“이거 있으면 이제 저희는 크리스탈 영향 안 받아요.”
“오.”
네드 님이 짧게 감탄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네드 님은 잘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알았다.
개이득이다!
분명 우리가 모은 크리스탈 속성을 생각해 보면 남은 크리스탈은 불 속성과 바람 속성이다.
그중에 불 속성 크리스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무더위’ 디버프 때문에 열기 지속 데미지를 받게 된다.
PC버전에서야 그냥 HP 깎이는 거에 짜증 내면서 힐 하면 그만이었지만?
만약 지금처럼 현실화된 상황에 불 속성 크리스탈 영향에 노출된다면?
더워서 쪄 죽을지도 몰랐다.
근데 이것만 있으면 그럴 걱정 끝이었다.
“쓸모 있을 것 같군요.”
네드 님은 대충 내가 말하는 걸로 쓸모 있다는 걸 눈치채신 듯했다.
“확실히 잡기 어려운 보스 몬스터는 좋은 보상을 주는군요.”
하지만 뒤이은 네드 님의 말에 난 발을 삐끗할 뻔했다.
“그으거는…….”
이게 분명 100% 드랍이 아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