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12)
  • <33화>

    ―파지직!

    토르의 검으로 쳐 봐도 스킬이 끊기지 않았다.

    “네드 님, 이건 피해야 돼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멈칫했다.

    ―우우웅!

    그의 머리 위에는 기를 모아야 하는 스킬 게이지가 거의 다 차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리리스 ‘분노의 열화’ 88%]

    [네드 ‘번개 스킬 중첩’ 94%]

    두 마리의 경주마처럼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기가 모이는 속도는 둘 다 비슷하니까 네드 님이 먼저 스킬을 쓰긴 할 터였다.

    문제는.

    저걸 날려 보내고 스킬을 피할 수 있을까?

    “으음.”

    네드 님이 ‘천국의 계단’ 버그가 되는 곳까지 뛰어오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스킬을 끊고 오라고 하자니, 네드 님이 겹친 스킬들이 너무 쿨타임이 긴 스킬들이었다.

    저거 끊으면 적어도 30분은 대기 타야 할 텐데?

    그럼 30분 버티기 하다가 실수라도 했다간 저승길 황천행이다.

    에라, 모르겠다!

    “네드 님!”

    난 결국 네드 님 옆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우우우웅!

    그리고 네드 님 주변으로 노란 번개에 휩싸인 거대한 검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이 휘황찬란한 빛으로 번쩍이는 걸 보니 겹친 스킬이 적어도 다섯 개는 넘었다.

    내가 네드 님 옆에 닿은 순간.

    [리리스 ‘분노의 열화’ 94%]

    “죽어라, 미천한 것들……!”

    스킬 준비가 거의 끝난 리리스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네드 ‘번개 스킬 중첩’ 100%]

    ―쓔우웅!

    네드 님 머리 위에서 거대한 검이 리리스 쪽으로 쏘아져 보내졌다.

    난 그걸 보자마자 네드 님을 번쩍 들었다.

    “실례!”

    “!”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뜨든 말든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네드 님의 키가 크긴 했지만, 다행히 나도 314레벨이라 사람 하나 드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공주님이 좀 큰 것 같지만, 아무튼 그 상태로 난 빠르게 달려 천국의 계단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후욱!

    그리고 우리 둘의 몸이 바닥으로 꺼지자마자, 위로 열기가 확 퍼져 나가는 게 보였다.

    [-124,839]

    [유니 / Lv. 314

    HP : 124,839 / 249,678]

    스친 것만으로도 HP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그냥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네드 님 머리 위에도 반밖에 안 남은 HP 게이지바가 보이는 걸 보면 방어력에 상관없이 HP 비례로 데미지를 받는 스킬이었던 듯했다.

    ―쿠쿠콰쾅! 쿠르릉!

    그렇게 ‘천국의 계단’ 아래로 숨은 우리 위로 온갖 난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클럽 지하라도 온 것 같았다.

    난 네드 님을 내려 주면서 말했다.

    “여기 있다가 보스 진정하면 올라가면 돼요.”

    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유네리아 내에서 보스몹이 난사하는 궁극기가 20초를 넘은 적은 없다.

    넉넉잡아 30초 세고 올라가면 맞아 죽을 일은 없을 거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네드 님은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었다.

    “네드 님?”

    설마 내가 리리스 안고 들어온 건 아니지?

    앞을 보니 번쩍이는 리리스의 클럽 조명 아래로 당황한 검은 머리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네드 님은 맞았다.

    “…….”

    그 상태로 네드 님은 두 손을 든 채 새까만 벽 한구석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네드 님의 왼쪽 손과 얼굴 사이의 공간에는 내 손이 짚어져 있었다.

    “아.”

    지금 내가 벽치기 하고 있었던 거야? 난 손을 재빨리 뗐다.

    네드 님이 천국의 계단 버그고 뭐고 알 리가 없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난 재빨리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철벽 같은 표정으로.

    “여긴 보스 공격 피하러 온 거예요.”

    혹시나 모를 오해 금지! 내가 철벽을 치자 네드 님이 난감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 사이 리리스의 발악이 끝나 갔다.

    [하하하하! 모두 죽어 버렸구나! 버러지들 같으니!]

    리리스의 희망 사항과는 다르게 우린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얼른 잡죠!”

    민망한 상황을 탈출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때 네드 님이 멈칫하며 나를 잡았다.

    아까처럼 소심하게 내 후드를 잡은 그가 나를 직시했다.

    “……나가는 방법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그냥 허공으로 걸으면 되는데…… 라는 고인물 같은 말을 해 봐야 네드 님이 알 리가 없었다.

    “그으럼 한 번만 더 실례할게요.”

    결국 난 그를 슬그머니 다시 공주님처럼 안아 올렸다.

    ―슈욱!

    그리고 네드 님이 난감해하기 전에 재빨리 그를 놓아주었다.

    당연히 지상(?)으로 나온 후였다.

    난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니, 천국의 계단 체험시켜 주는 게 이렇게 민망할 일이야?

    게임할 땐 뉴비들 자주 실어날랐는데, 이게 게임이 PC가 아니니까 참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이었다.

    “얼른 잡죠!”

    난 앞으로 뛰어나갔다. 분위기 이상할 땐 일단 몬스터부터 패고 보자!

    ‘…….’

    하지만 리리스에게 토르의 검을 들이대면서도 순간 이상한 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가령.

    ……안아 올릴 때 봤던 네드 님의 남성적인 턱선 같은 것……?

    아니, 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사람 취향대로 해서!

    그래픽에 홀리지 말자!

    “읏챠!”

    난 검을 세차게 휘두르며 네드 님의 얼굴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래픽에 홀리지 말자! 한낱 데이터 조각일 뿐이다!

    난 애써 나를 마인드컨트롤했다.

    네드 님이 유네리아의 외형 선택 폭이 너무 넓어서, 고민하다가 거울 보고 캐릭터 외형을 골랐다는 소리를 일찍 들었다면 불가능했을 마인드컨트롤이었다.

    ―콰콰쾅!

    그렇게 다시 한참을 돌려깎기 한 결과.

    네드 님의 공격이 내리꽂히면서 리리스의 HP바가 완전히 새까매졌다.

    “잡았다!”

    외치는 순간, 리리스의 품에서 작은 보석 두 개가 굴러떨어졌다.

    저 드랍템 익숙한데?

    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순간.

    시야가 새까매졌다.

    영상 시작이었다.

    * * *

    [그…… 끈질기구나……!]

    리리스는 왠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이 교황청에서 나한테 펜던트 던져대던 사제 NPC랑 표정이 똑같았다.

    [어떻게 이 몸을 막을 수가 있지……!]

    리리스는 정말 궁금한 표정이었다.

    하긴, 아까 그 클럽 개장한 스킬 보면 천국의 계단 못 찾았으면 그대로 죽을 뻔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곤란해 보였다.

    그야 원래 우리가 죽어야 했는데 본인이 죽었으니 아주 곤란할 터였다.

    요컨대 NG 났다는 소리다.

    PC버전에서야 보스 몬스터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보일 턱이 없으니 저런 반응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NPC들 대화 반응도 그렇고, PC버전과는 다르게 NPC나 몬스터한테 성격도 좀 더 디테일하게 추가한 것 같던데.

    과연 죽으면 안 되는 데서 죽으면 반응이 어떨까?

    난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순 없어……!]

    하지만 아주 곤란한 표정의 리리스는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HP바가 다 떨어진 걸 어쩌란 말인가?

    딱 봐도 주요 메인 보스몹인 리리스가 죽었으니 무슨 버그가 터질지는 몰랐다.

    여기선 당연히 정기점검, 연장점검, 긴급점검, 임시점검으로 빛나는 4대 명검도 못 꺼낼 테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죽어서 엎어져 영생을 보내는 것보단 버그 걸려서 네리아GM한테 우편이나마 보낼 수 있는 상황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영상이 끝나면서 원래의 시야가 돌아왔다.

    그리고.

    ―털썩!

    리리스가 바닥에 쓰러지는 듯하더니 재로 흩날려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줄 알았다.

    ―달그락.

    별안간 리리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웬 항아리가 생겼다.

    “?”

    아니, 아무리 메인 보스 몬스터라지만 자가 화장 시스템에 뼛가루까지 담아 주는 기가 막힌 셀프서비스가 있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고 자세히 보니 500레벨에 마지막으로 클리어하는 던전에서 나오는 항아리였다.

    메인 스토리 퀘스트상 모험가는 저 항아리 속에 숨게 되어 있었다.

    “오.”

    버그가 걸려도 아주 웃긴 버그에 걸린 게 분명했다.

    설마 우리가 리리스를 잡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게 분명했다.

    이야, 대체 게임을 어디서부터 엉터리로 만든 거야?

    이거 영상으로 찍어서 유네리아 게시판에 [알라반 지하 리리스의 진정한 정체.jpgif] 같은 걸로 올리면 게시판 좀 불타겠는데?

    아쉽게도 영상 저장 기능은 없었다.

    “……!”

    와중에 네드 님은 항아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항아리에서 항아리의 정령이라도 나올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건 그냥…… 항아리였다.

    버그예요, 네드 님……☆★

    내가 아련해 할 때였다.

    ―팟!

    다시 시야가 검은색으로 물들면서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보스를 잡고 가장 먼저 나오는 화면은, 보통 쓰러진 보스의 모습일 터였다.

    하지만 화면이 번쩍이면서 가장 먼저 클로즈업된 건…….

    ―두웅.

    항아리의 뚠뚠한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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