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2)
  • <31화>

    “가만히 계세요.”

    심각한 얼굴의 네드 님은 내 목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밑을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몸이 천국의 계단 아래에 있는지 내 머리만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의 천국의 계단을 확 그냥!

    “저 몸은 금방 붙을 거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었다.

    얼굴이 하얘진 네드 님이 무려 쿨타임 600초의 스킬을 사용하려고 하는 탓이었다.

    ―탁.

    그리고 때마침 타이밍 좋게 로딩이 끝났다.

    몸이 붙자(?) 시야가 재조정되면서 살짝 눈높이가 달라졌다.

    이놈의 인터넷을 그냥!

    아니 왜 현실화됐는데도 인터넷 회선은 우리 집 상태 그대로냐고!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게임이었다.

    “……살아나셨군요.”

    네드 님은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얼굴을 구겼다.

    “목만 뜨면 렉이라니까요.”

    역시 렉 걸려서 목만 날아다니면 소생 스킬 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그런 렉이…….”

    “로딩 문제예요. 저번에 숲에서 보셨잖아요.”

    그때도 모가지만 날아다녔지만 멀쩡했잖아요?

    내가 찡긋 웃어주자 네드 님은 그제야 안심한 기색이었다.

    어어 괜찮아요, 망겜이라 그래.

    “여튼 대충 맵은 알아본 것 같으니까 크리스탈이나 만져 봅시다.”

    네드 님은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난 그런 그에게 말했다.

    “이게 딱 보니까.”

    유네리아 10년 차의 눈으로 봐서는.

    원래 내가 했던 퀘스트에서 알라반 지하의 크리스탈은 갖고 나오는 길에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라진 듯했다.

    크리스탈 주변이 번쩍번쩍하게 바뀌었다?

    굳이 이렇게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요?

    바꿀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크리스탈 건드리면 보스 나오거든요?”

    “예?”

    네드 님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아이템창에서 조용히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혹시, 크리스탈의 주인…… 말입니까?”

    “원래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바뀐 시나리오 퀘스트에는 크리스탈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에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내 강력한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일단 무기 꺼내고 버프 다 쓰고 만집시다.”

    난 아이템창에서 토르의 검을 꺼내려다가 파개한다의 검을 다시 꺼냈다.

    토르의 검은 그래도 알라반 메인 퀘스트 보스 잡는 데에 쓰긴 좀…….

    소 잡는 칼도 아니고 용 잡는 칼로 닭 잡는 셈이었다.

    ―우우웅!

    네드 님에게서 익숙한 버프의 물결이 쏟아졌다.

    내가 스킬창에서 ‘버프’라고 써놓은 스킬을 다 쓰시는 게 분명했다.

    [네드가 ‘열린 마음’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어? 아니네?

    난 눈을 크게 뜨고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열린 마음은 지속시간 이내에 받는 버프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스킬이다.

    당연히 먼저 써야 하는 스킬.

    설명 보셨다더니 다 외우기라도 하신 거야? 난 다시 한번 감탄했다.

    “끝났습니다.”

    그러는 사이 네드 님의 말이 울렸다.

    아, 버프 끝날라!

    난 크리스탈을 만졌다.

    ―파앗!

    그러자 시야가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잉?

    뭐야, 이거?

    당황했지만 곧 난 익숙한 모습이란 걸 알아챘다.

    이건 PC버전 유네리아에서 영상이 뜰 때의 연출이었다.

    ‘오.’

    4D 영화관에 온 것 같았다.

    소리도 들리고 지하의 케케묵은 냄새도 그대로인데 화면만 내 시야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마음대로 바뀌었다.

    카메라를 따라서.

    그리고 그 카메라는 방구석을 먼저 비추고 있었다.

    이 익숙한 연출은?

    누가 등장할 때의 연출이었다.

    설마 보스 몬스터 등장이라고 임팩트 주려고 영상 넣은 거니?

    근데 PC도 아니고 실제로 들어와서 영상을 보게 되니 어이가 없었다.

    이러면 없던 몰입도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하지만 보스 나올 때 영상이 뜨는 건 유네리아의 특징이었다.

    ―또각, 또각.

    그때 영상에서 하이힐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면서 기깔나는 BGM이 깔리기 시작했다.

    음, 이 전주는 부드럽지만 박자가 심상치 않은 BGM은?

    이거 487레벨에 입장하는 공포의 숲 테마 BGM 아니냐?

    고인물의 뇌가 공포의 숲 몬스터의 특징을 생각하는 사이 화면이 바뀌었다.

    조용한 선율과 함께.

    ―또각.

    하이힐의 끝이 보였다. 누군가 걷는 발끝이었다.

    와! 정말 익숙한 연출이다!

    이쯤 되면 구린 대사 하나 날려 줄 때가 됐는데?

    [누가 지하를 어지럽히나 했더니.]

    그다음엔 슬슬 화면 위로 올라오고.

    그렇지, 그렇지.

    그다음 무릎쯤 보여주다가 바로 얼굴 위 정면으로 얼굴 바꿔 주고.

    예상대로 카메라가 궁금하지도 않은 보스의 정수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음~ 정수리는 빨간색~

    이제 사운드 비니까 대사 한 번 쳐 주고.

    [별 볼 일 없는 아이들이었구나.]

    어떻게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질 않냐?

    감탄하는 사이 보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클로즈업되었다.

    [BOSS: 네크로맨서 ‘리리스’]

    역시 크리스탈을 만지면 보스가 나오는 시스템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화면이 꺼지고 다시 원래의 시야가 돌아왔다.

    눈을 몇 번 깜빡여본 난 보스를 보다가,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예상외인 건 하나밖에 없었다.

    “보스 레벨이 물음표로 뜨는군요.”

    네드 님이 지적한 바로 저것.

    [리리스 / Lv. ???]

    “네드 님도 그렇게 보이세요?”

    난 네드 님의 말에 심각해졌다.

    “아니, 보스 레벨이 물음표면…….”

    보통 유네리아에서 이건 ‘눈치껏 죽어라’나 다름없는 뜻이었다.

    시나리오상 잡을 수 없으니 일단 털리고, 나중에 모험가가 힘을 얻어서 복수를 하는 뭐 그런 전개 있잖아.

    그게 PC게임이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요.”

    내가 입을 열었다.

    리리스는 우릴 똑바로 보면서 걸어온 주제에, 우릴 아직 보지 못했는지 보스룸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보스룸이 활성화되면서 보스룸 밖으론 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려운 보스입니까?”

    네드 님이 긴장한 채 물었다. 난 볼을 긁적였다.

    “그걸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놈인데.”

    흔치 않게 모르는 놈이 나타나서 기쁘긴 했다.

    원래 새로운 컨텐츠 나오면 점검 시간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해 보는 게 나였으니까.

    문제는 이게 PC가 아니라 현실화된 게임 세상이라는 거였다.

    게다가 저놈 레벨이 ‘??’라고?

    “근데 그거보다 큰 문제가 있거든요.”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원래 보스 레벨이 물음표로 뜨면 잡지 말고 죽으란 뜻이거든요. 못 잡는 몬스터라는 뜻인데.”

    내 말에 네드 님이 멈칫했다.

    “이곳에서 저희 둘 다 죽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네드 님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기서 저희 둘 다 죽는다면 살려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게 문제예요.”

    원래 게임에서는 알아서 캐릭터가 부활됐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그걸 실험해 보려고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파개한다냐? 닥치고 돌격하게?

    “그럼 어떻게 합니까?”

    네드 님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난 그에게 쌈박하게 답했다.

    “잡죠.”

    난 손을 툭툭 털면서 말했다.

    난 어차피 공략 없이 보스 못 잡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보스 레벨이 ‘??’로 뜨지 않아도 죽어야 되는 퀘스트는 분명히 존재했다.

    아니면 죽이지 말고 버티거나.

    하지만 난 시나리오가 패치될 때마다 내용을 대충 읽어서 일단 눈앞에 뜨는 몬스터를 죽이고 보는 유저였다.

    덕분에 버그도 여러 번 걸렸다.

    마지막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죽으면 안 되는 아군을 심심해서 죽여 봤다가, 버그 걸려서 문의 넣었더니 받은 답장이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환상대륙 유네리아의 GM! 네리아입니다.

    퀘스트 진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불편하셨군요ㅠ_ㅠ

    저희 유네리아에서는 모험가님들을 위해 아래와 같은 기능을 설정할 수 있게 하였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설정-폰트 크기-폰트 크기 확대(폰트:10~16)>

    감사합니다^^]

    요컨대 글씨 크기 키워서 잘 좀 잘 읽으란 뜻이었다.

    내가 그거에 불 뿜는 사이 생각보다 나 같은 놈들이 많았는지, 결국 그 시나리오 퀘스트는 패치되었다.

    [적 케리아를 죽이지 말고 버티세요.]

    글자를 좀 더 크게 써 놓는 것으로.

    아니, 미시오 당기시오도 헷갈리는 한국인이 그런다고 보겠냐?

    [아니 케리아가 안 뒈지게 하면 되잖아]

    [유네리아 옆데이트가 또]

    게시판에는 당연히 욕으로 도배되었다.

    하지만 꿋꿋한 유네리아는 그걸 아직도 패치하지 않았다.

    “잡을 수 있는 몬스터입니까?”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턱을 매만졌다.

    “잡으면 버그 걸릴 가능성이 높긴 한데 어쩔 수 없어요.”

    그렇다고 여기서 엎어져 죽을 순 없잖아?

    게다가.

    난 자신 있게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네리아에서 유저들이 못 잡은 건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건 다름 아닌 하늘다리의 엘데였다.

    근데 그 엘데는 지금 내 주머니에 있네?

    난 내 주머니를 가리켜 보이곤 말했다.

    “일단 용 소환하시고, 최대한 버티기 전략으로 가는 거예요. 수호랑 회복 계열 스킬 다 꺼내서.”

    “……몬스터가 생각보다 강해 보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본 몬스터들처럼요.”

    네드 님은 내 말에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저 리리스인지 뭔지 하는 게 500레벨 이상의 보스 몬스터라는 거였다.

    확실히 높긴 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예쁘게 웃어 주었다.

    “우리가 안 맞을 거니까.”

    “?”

    “용미사일이라고 들어는 보셨습니까?”

    유네리아의 전통적인 보스 연구법! 용미사일!

    엘데는 몰라도 비상식량은 알 텐데?

    난 네드 님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 비상식량을 쿡 찔렀다.

    네 차례다!

    ―파르르르!

    비상식량이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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