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12)

<23화>

난 자랑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제가 유네리아만 10년인데, 이런 상황도 해결 못 하면 그게 10년 차겠습니까?

내가 자신 있게 웃을 때였다. 네드 님은 여전히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솔로로 지낸다는 맹세도 하셨습니까? 게임에서 그런 맹세도 하신다니…….”

그는 좀 다른 걸로 감탄한 듯했다.

“그, 오해입니다.”

난 네드 님처럼 딱딱한 얼굴로 바로 부인했다.

“네리아 증표는 그냥 시나리오 퀘스트 끝까지 깨면 주는 거예요. 망겜이라 원래 커플이면 퀘스트 못 깼거든요.”

그래서 결혼 보너스도 포기하고 커플을 일부러 깨고 나서 퀘스트를 받아야 했던 과거가 있었답니다…….

물론 난 그 후로 결혼할 일도 없었지만.

다른 건 둘째치고 결혼하면 템창이 공유되는데 누구랑 내 귀한 템창을 공유해?

난 머릿속을 지나가는 유네리아의 랭커들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말에 네드 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생각보다 이 게임은 막 굴러가고 있어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네드 님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게임 매출 1위 아니었습니까?”

그거에 대해서는 유네리아 유저로서 할 말이 많았다.

일단 유네리아 게시판에 저 말을 던졌다간 하루는 불탈 장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늘 나오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그 골자는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었다.

난 아련한 얼굴로 답했다.

“매출 1위가 모든 것을 말하진 않아요.”

그리고 애써 웃었다. 입꼬리가 이렇게 무거운 물건인 줄 처음 알았다.

“매몰 비용에 미쳐 버린 고인물들이 돈을 부어서 매출 1위가 되기도 하거든요.”

내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해 보였는지 네드 님이 슬그머니 내게서 거리를 두었다.

내가 NPC한테 라비스 먹였을 때보다 더 나를 경계하는 반응이었다.

“저 일상생활 잘하고 있거든요? 막 미쳐서 하루 24시간 게임만 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내 말이 나오고 나서야 네드 님은 뒷걸음질을 멈추었다.

난 차마 게임과 거리를 두고 산 게 분명한 이 남자에게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휴가 내면 40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유네리아만 했다는 사실을.

이대로면 게임에 일상생활 팔고 맹세도 게임에서 하는 망한 게이머 인생으로 보이게 생겼다!

아니 근데, 붉은 구슬 받을 만큼 현질하신 분 앞에서 이 소리 듣고 싶진 않거든요?

하지만 변명이 튀어 나가는 입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네리아교 좋아하진 않는데 그냥 갖고 있는 거예요. 버릴 수도 없는 아이템이라.”

내 말에 네드 님이 아이템창에서 네리아의 증표를 꺼내 보았다.

―툭.

그리고 증표는 안 버려진다는 내 말이 무색하게 바닥을 굴렀다.

“……떨어지는군요.”

“아니, 저게 왜 떨어져??”

정말 떨어질 줄은 몰랐는지 멈칫한 네드 님과 네리아의 증표가 버려진 것에 당황한 내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증표 버릴 수 있게 패치해 달라고 할 땐 씹더니 왜 이딴 패치만 해주는 건데!

물론 이놈의 유네리아는 당장 필요한 패치 내용을 유저들이 한목소리로 말해도 이상한 데만 건드리는, 속히 ‘옆데이트’를 하는 게임이긴 했다.

그래 놓고 10년 된 게임이라서 게임의 이상한 곳까지 건드리는 바람에 정기점검 날이면 연장점검에 임시점검에 긴급점검까지 4대 명검을 다 뽑아 휘두르는 망겜이었지.

음음.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아무튼 그게 정말 전엔 안 버려졌거든요?”

버려진 김에 버리고 싶다!

하지만 우린 하필이면 네리아교의 사제로 신분을 위장한 상태였다.

네드 님이 다시 인벤토리에 네리아의 증표를 잘 닦아서 넣는 사이, 난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이딴 망겜에서 10년짜리 맹세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거든요? 물론 실제로도 커플 될 생각도 별로 없긴 했는데―”

당황해서 입이 뚫리자 쓸데없는 정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딱 틀어막을 때였다.

“이유가 있습니까?”

네드 님이 불쑥 물었다. 그도 긴장이 풀렸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성 안 사귀는 이유? 많지만 가장 큰 건 하나였다.

“귀찮아요.”

내 말에 네드 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속박받고 싶지도 않고…… 내 인생에 군더더기 붙는 게 싫어서?”

내 말에 네드 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군더더기요?”

앗, 너무 편하게 말해 버렸다. 난 볼을 긁적였다.

“친구들 보니까 남자친구 생겼다고 주변이랑 놀기 어려워하더라고요. 어디 가면 보고해야 하고, 뭐.”

내 말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리액션을 하지 않으면서도 경청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그 덕인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으면서도 왠지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듯했다.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 건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랑 사귀게 되면 피곤하겠더라고요. 뭐 삐지거나 화나서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말에 네드 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을 펴 보였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전 그런 남자 찾겠다고 돌아다닐 만큼 그렇게 적극적이진 않아 가지고.”

어쩌다가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됐지? 난 기지개를 쫙 켰다.

“여튼 원할 때 휴가 내고, 원할 때 호캉스도 하고, 원할 때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데 연애하면 보통 그게 힘들어지더라고요. 게다가.”

이다음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난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남자친구 있다고 하면 명절마다 또 결혼은 언제 하냐고 그렇게 물어보는데…….”

“……아.”

네드 님의 얼굴이 순식간에 피곤으로 물들었다.

“피곤하죠, 그런 거.”

님도? 야나두. 네드 님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나이대가 비슷한가 봐요?”

내가 불쑥 물었다. 게임에서 만났으니 나이를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네드 님이 미성년자거나 너무 나이가 많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네드 님이 턱을 매만졌다. 어색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물었다.

“제 나이가 궁금하십니까?”

안 궁금하면 구라겠죠? 하지만 난 그에게 부담 줄 생각은 없었다.

난 손을 내저었다.

“안 말씀하셔도 돼요. 네드 님이 40살이든 14살이든 네드 님은 네드 님이니까.”

몇 살이든 무슨 상관이겠냐는 뜻이었는데 네드 님이 불쑥 말했다.

“스물아홉입니다만.”

그 말에 우리 사이로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다.

이 사람 발끈한 거야?

“……혹시 나이 들어 보입니까?”

네드 님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난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냥 막 말해 본 거예요.”

“세상에 그냥이란 없습니다.”

이대로면 내가 하필 하고많은 숫자 중에 14와 40을 꼽은 이유를 연구라도 할 기세였다.

그의 눈이 언젠가 봤던 대학원생 친구의 연구의 빛을 품는 사이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동갑이네요.”

반갑다! 그죠! 내가 손을 들어 보이자 네드 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난 씩 웃어 주었다.

“여튼 뭐든 속박 없는 삶이 좋아요.”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네드 님이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왠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내가 친근감을 느낄 때였다. 아까부터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던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근데.”

“네?”

“휴가를…… 원할 때 낼 수 있습니까?”

하긴, 보통 직장인이 그러기 힘들긴 하지.

하지만?

“당연히 할 일 끝내 놓고 휴가 신청하죠.”

“아.”

내 쌈박한 대답에 네드 님의 얼굴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네드 님은 그런 게 안 되나?

“……무슨 일을 하시길래 그러세요?”

내가 묻자 네드 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할 일을 아무리 빨리 끝내도 할 일이 생기는 직업입니다.”

“?”

저번에 커피 때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게임에 오랫동안 있어도 괜찮아요?

내 마음속의 질문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네드 님이 아련하게 말했다.

“이렇게 유네리아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직 망겜 맛을 덜 보셨구만?

내가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포옥.

“?”

이상하게 푹신한, 아니 진득한 무언가를 밟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퀘스트 ‘수상한 진흙(MAIN)’을 입수했습니다.]

“아, 퀘스트 떴다.”

메인 퀘스트였다. 이 알라반 왕성에서 크리스탈을 얻기 위한 퀘스트.

교황청 크리스탈 위치는 바꿔 놓더니 여긴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수상한 진흙

- 수상한 진흙에 대해 알아보세요.]

퀘스트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난 혀를 찼다.

“하여간 유네리아 퀘스트 애매모호하게 주는 거 때문에 뉴비 다 접는다니까.”

그래 봐야 한 번 클리어한 사람이 있으면 삽질할 필요는 없다.

“일단 이건―”

이미 연구하고 있는 NPC가 있으니 그쪽을 찾아가면 돼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난 말문이 막혀서 네드 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 흙은…….”

네드 님은 장갑을 끼고 진흙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진흙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

퀘스트를 너무 충실하게 이행하는 네드 님을 보며 난 웃음을 참기 위해 힘써야 했다.

그래, 이렇게 헤맬 때도 있어야지, 음음.

난 네드 님이 충분히 흙을 만지작거리는 걸 지켜보았다가 슬며시 말했다.

“성분을 알아보라는 게 아니에요, 네드 님.”

“?”

내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네드 님의 표정과 내 웃기 직전의 표정이 마주쳤다.

“혹시 전자제품 사면 설명서부터 정독하세요?”

혹시 그런 스타일? 난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네드 님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헐.

“전 읽기 귀찮아서 그냥 쓰는데.”

내 말 이후로 네드 님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기,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실래요?

저도 네드 님 무지막지하게 신기하거든요?

그 긴 설명서를 어떻게 다 읽고 전자제품을 사용해요?

“……아무튼 이쪽으로 가면 돼요.”

난 슬슬 그를 잡아끌면서도 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 하던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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