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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12)
  • <22화>

    “관련 부서에 전달했다면 문제 해결을 시작했을 것 아닙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네드 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난 예쁘게 웃어 주었다. 이래서 순수한 뉴비는!

    “일단 관련 부서에 제대로 전했는지도 모르겠고 그 뒤로 몇 년 지나도 버그는 안 고쳐졌어요.”

    “그럼 그 유저분들은…….”

    “여전히 들어가면 병사한테 쫓기고 있거나 입장 불가거나 그런 거죠.”

    완전 망한 계정 됐다는 소리죠.

    이제 이 게임의 심각성을 아시겠습니까?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네드 님의 표정이 드디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이 게임이 얼마나 망겜인지 이제야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서 나갈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설마 그 방법을 안다고? 알려 주려고 온 건데?

    유네리아에 언제 이렇게 적응하신 거지?

    내가 감동한 지 1초 만에 네드 님이 주머니에서 은밀하게 라비스를 꺼냈다.

    “약을 먹이는 수밖에.”

    “집어 넣으십쇼.”

    알라반 왕성을 라비스 수영장으로 만들어도 안 될걸?

    난 손을 내저었다. 길 가다 만난 사람 다 라비스로 꼬실 생각이십니까?

    “대신 방법이 있는데요.”

    이게 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방법이긴 한데, 이거만큼 잘 먹히는 방법이 없었다.

    난 네드 님한테 은근하게 물었다.

    “혹시…… 게임에서 캐릭터의 사회적 평판에 신경 쓰시는 편이세요?”

    NPC한테 욕먹으면 상처받는 편? NPC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하는 극한인싸 스타일?

    내 질문에 잠깐 멈칫했던 네드 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답에 난 빵긋 웃었다.

    “그럼 방법이 있어요. 이렇게 하죠.”

    “?”

    눈을 깜빡이는 네드 님에게 내가 은근히 말했다.

    아주…… 미안한 얼굴로.

    “네리아교 신도라고 하세요.”

    아주 독실한 신도라고.

    “네리아교 신도……?”

    네드 님은 그게 뭐 어떻느냐는 반응이었다.

    아, 혹시 교황청 안 가 보신 건가? 그래서 네리아교가 어떤 종교인지 모르시는 거?

    하긴 가 보셨을 리가 없었다.

    레벨 7에 유네리아 극한 버전에 납치되어 온 뉴비에게 묵념.

    “아이템창에 보면 ‘네리아의 증표’라는 게 있을 거예요.”

    이건 설명보다 템을 보시는 것이 빠릅니다, 옙.

    내가 아이템 이름을 가르쳐주자 네드 님이 내 혼란의 도가니탕 인벤토리에서 네리아의 증표를 찾아냈다.

    [아이템 링크 : 네리아의 증표]

    그리고 눈앞에 네리아의 증표를 띄워 보였다.

    “이 아이템입니까?”

    네드 님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드 님이 링크를 눌러 설명을 읽는 게 보였다. 나도 새삼 그 링크를 눌러 보았다.

    [아이템 : 네리아의 증표

    - 극강의 솔로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증표. 이것을 가진 자는 앞으로 10년 동안 솔로로 지낼 것을 네리아 앞에 맹세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 3년 동안도 솔로였음을 네리아교에서 보증했다는 증거이다.]

    네드 님의 표정에 난색이 드러났다.

    “그거 보여주면 돼요.”

    그럼 왕비가 양다리로 오해할 일도 없을 터였다.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그렇군요.”

    네드 님은 증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결혼 안 하셨죠?”

    난 그런 그에게 물었다.

    대체 이 동네 NPC들은 눈에 뭘 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한 캐릭터와 아닌 캐릭터를 바로 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네리아의 증표를 들이댄 캐릭터가 결혼을 했다면 바로 이단 심문실 엔딩이었다.

    “게임에 결혼도 있습니까?”

    네드 님은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네.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게임이거든요.”

    난 볼을 긁적였다.

    아, 생각해 보니까 네드 님 캐릭터창 내가 갖고 있지?

    게다가 네리아 교황청 입장도 문제없었으니 결혼은 안 하셨을 것이다.

    “안 했습니다.”

    네드 님의 말은 예상대로였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전 숨어 있을 테니까 간수 불러서 말하시면 돼요.”

    네드 님 파이팅! 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감옥 구석으로 숨었다.

    “후우.”

    그리고 네드 님은 긴장했는지 심호흡까지 한 다음 간수를 불렀다.

    “간수님?”

    공손하게 부르는 그와는 달리 간수는 껄렁했다.

    “뭐냐?”

    네드 님 주먹에 한 방 날 놈이 껄렁거리기는!

    내가 인자하게 웃을 때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뭐?”

    간수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사실 전.”

    간수에게 네드 님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전……! 그래요, 그 뒷말만 잘 하시면 돼요! 아니 말도 필요 없고 그냥 네리아 증표만 보여주시면 돼요!

    파이팅!

    내가 응원하는 사이, 네드 님은 주머니에서 네리아의 증표를 꺼냈다.

    “전 사실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증표를 보여주었다.

    아니, 무슨 솔로 성명을 그렇게 뒷돈 주듯이 하십니까?

    “……!”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이, 이런!”

    간수는 놀라서 감옥을 뛰쳐나갔다.

    “기사님! 기사님!”

    그리고 어딘가에 급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 * *

    유네리아 세계관에서, 네리아의 증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일단 내가 솔로라는 뜻도 맞다.

    물론 네리아 증표 받고 결혼을 한 다음 그 배덕감(?)을 즐기면서 네리아 성전을 돌아다니다가 사제들에게 쫓기는 유저들도 많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솔로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의미는.

    알라반 왕실과 네리아교의 관계 때문에 생기는 의미였다.

    현 알라반 왕실이 네리아교를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국교로 선택하면서 네리아의 사제들이 이곳저곳에서 봉사를 많이 한 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교리가 좀 수상하긴 해도 신전은 신전이라, 솔로든 커플이든 신성력으로 치유를 해줄 수 있는 건 똑같았다.

    때문에 몬스터가 자주 나타나는 알라반 왕국 특성상 네리아교와 왕실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게 유네리아의 세계관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지는 존재하는지부터 의문인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아무튼 요점은 알라반 왕실과 네리아교는 거의 운명공동체나 다름없는 관계고, 네리아의 증표를 받는 사람은 네리아교에서도 고위 사제들뿐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은 알라반 왕비가 네리아교의 고위 사제를 감옥에 처박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오.”

    알라반 메인 스토리를 발가락으로 만든 것 같은 유네리아 개발팀을 욕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개판 설정 덕에 네드 님이 나올 수 있었으니 좋은 게 아닐까요?

    “정말 오해가 많았습니다. 네드 사제님.”

    어느새 왕비가 네드를 부르는 호칭은 ‘놈’에서 ‘사제님’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왕비가 아주 미안한 얼굴로 네드 님에게 거듭 사과하더니 불쑥 물었다.

    “그런데 후원에는 왜 오셨던 건지…….”

    지금까지는 괴상하게 잘만 행동해 놓고 지금 와서 정상적인 거 묻지 마!

    내가 얼굴이 파래진 사이 네드 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꽃이 아름다워서 와 봤습니다.”

    “어머.”

    왕비는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댁이 꽃이란 소리가 아니거든? 후원에 핀 꽃 말씀하시는 것 같거든?

    “네리아교에 계시기 아까운 분이네요.”

    왕비가 웃었다. 난 불륜의 씨앗이 다시 무럭무럭 자라기 전에 재빨리 숨어 있던 곳에서 뛰어나왔다.

    “하나가 둘이 되어 나오는 축복이 함께하기를!”

    네리아교의 쪽팔리는 인사말을 이렇게 쩌렁쩌렁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내 목소리에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인사말은 무시해요!

    제발! 무시해 줘!

    그러는 사이 왕비가 날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네드 사제님의 일행이십니까?”

    “네.”

    난 왕비에게 알라반 예법에 맞춰 인사를 해준 후 말했다.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왕성에 기이한 일이 있다는 소문에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습니다.”

    자연스럽게 퀘스트 이야기하기!

    왕비 만난 김에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터였다.

    왕비가 이쪽에 실례를 저지른 타이밍이기도 하고. 잘하면 신뢰도를 팍 올려서 퀘스트를 수행하기가 쉬워질지도 몰랐다.

    “……!”

    네드 님도 거기까지 뒤늦게 생각이 미쳤는지, 날 보고 소리 없이 감탄했다.

    고인물 좋다는 게 뭡니까!

    내가 그에게 찡긋 웃어 줄 때였다.

    “기이한 일이 있다는 소문이라……, 벌써 바깥까지 그런 소문이 새어나갔나요?”

    왕비는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왕성의 소문이 바깥으로 샌다는 말을 좋아하는 왕실 사람이 어딨어?

    그걸 생각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교단이 알라반과 긴밀한 사이가 아닙니까. 혹시나 왕실에서 불편을 겪으실까 저희 재가 사제 중 한 명이 무슨 일이 있는지 가볍게 알아봐 달라고 하셨거든요.”

    정보 샌 거 아닙니다아.

    “물론 충성과 신앙심으로 하신 일이고, 왕성에 대한 어떤 불편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답니다. 이건 제 네리아 님에 대한 신앙심에 대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난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리아에 대한 신앙심을 걸고 말한다!

    한마디로 구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에 대해 알 리 없는 왕비는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오, 좋아요.”

    [알라반 왕성 신뢰도 + 10%]

    알림창이 뜨는 걸 보는 사이 왕비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왕성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를 요청한 것은 아니니, 음…….”

    그녀는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론 제 손님으로 오신 것으로 하지요. 마침 네리아 님의 축복을 받을 시기가 되었었답니다.”

    대체 네리아 축복은 왜 받는지 모를 노릇이었지만 우리야 땡큐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우아하게 알라반 식으로 인사해 보이자 왕비도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럼 하나가 둘이 되어 나오는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쪽팔리는 인사말과 함께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

    “…….”

    그리고 넓은 후원엔 나와 네드 님만 남았다.

    네드 님의 감탄한 얼굴이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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