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때 왕비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나도 느꼈거든요. 아까 후원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러더니 눈을 감았다가 뭔가를 음미하는 표정을 지었다.
뭘 음미하는 거지? 네드 님 얼굴?
물론 음미할 만한 얼굴이기는 했다.
“―이 사람은, 나쁜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구나. 그렇죠?”
왕비가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나도 반할 것 같은 환한 미소였지만 지금 여기서 이런 전개는 곤란했다.
그때 네드 님 앞에 다시 선택지가 떴다.
[① 당연하죠, 왕비 전하.
② 나쁜 목적이라기보다는 공익적인 목적으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
난 선택지를 보고 탄식했다.
네드 님이 메디카 사람이 아니었으면 2번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드 님은 공교롭게도 적대 국가 사람이었다. 당연히 공익적인 목적 어쩌고 해봐야 수상한 사람이 된다.
“당연하죠, 왕비 전하.”
같은 생각이신지 네드 님도 그걸 선택했다.
별 고민 없이 선택지를 고르시는 걸 보니, 그래도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있으신 편이라 다행이었다.
……물론 그래도 네드 님이 다른 방향으로 수상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호오오.
그리고 내 어깨 위에서 엘데는 팝콘이라도 쥐어주면 먹을 기세였다.
내가 엘데를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을 때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왕비가 네드 님의 턱에서 손끝을 떼더니 폭탄 발언을 했다.
“난 비밀스러운 관계를 더 선호해요.”
예? 여기서요? 지금요? 정말요?
“네드 경이라고 했나요? 당신만 괜찮다면 이 알라반에서 내가 당신을 비호해 주고자 하는데…….”
왕비가 은근하게 웃었다.
나 같으면 저기서 엎었다! 아니, 엎으면 안 돼! 그 능력치로 엎으면 알라반 왕성 퀘스트 날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네드 님은 썩은 표정을 짓는 대신 온화한 미소를 지으셨다.
전부터 매너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도 매너가 나와요?
[①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곳의 일은 제가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② 왕비 전하의 후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뢰도+20%)]
누가 선택지에 함정 심어 놨어!
누가 봐도 뉴비 낚기용 이벤트잖아! 하지만 네드 님은 이미 신뢰도 20%를 본 후였다.
네드 님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잠깐, Noooooo! STAY!
“왕비 전하의 후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악! 선택했어! 악! 내가 머리를 싸맬 때였다.
어느새 다시 주머니에서 기어 나온 엘데가 말했다.
―인간들의 삶에는 역시 번뇌가 많구나.
번뇌를 즐기는 표정으로 할 말은 아닌 것 같거든?
난 그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좋아요. 그럼.”
그러는 사이 파국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왕비는 흡족한 얼굴로 네드 님에게 웃어 주었다.
“매일 오후 여섯 시에, 후원에서 봐요.”
왕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네드 님 앞에 선택지가 떴다.
[① 네.
② 좋습니다, 마이 레이디.]
거부는??
거절은 거절한다야?? 대체 뉴비를 어떤 나락으로 끌어들이는 거야?
네드 님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결국 1번을 선택했다.
그래요, 고를 게 없으셨겠죠!
“네.”
왕비랑 비밀 친구라니 벌써부터 망한 퀘스트의 향기가 났다.
그래, 일단 왕비 신뢰도는 얻었으니까 어떻게든 크리스탈만 빼내서 알라반에서 튀면…….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왕비 전하.”
네드 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건 선택지가 아니라 네드 님이 자의로 말하는 것이었다.
설마 여기서 불륜은 안 됩니다, 하는 건 아니죠?
차라리 불륜하고 크리스탈 먹고 빠지자! 게임이 좀 썩은 것 같지만 괜찮아요!
난 간절하게 응원했지만 네드 님의 도덕심을 꺾을 순 없었다.
“주기적으로 만나면 저희가 부적절한 관계로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왕비 전하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해할까 걱정됩니다.”
유려한 말이었다. 왕비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그때 네드 님이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왕비님은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훈계를 하실 생각은 아니죠?
물론 맞는 말씀이긴 한데 설마 이 상황에서?
하지만 네드 님의 이어진 말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발언이었다.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
그 말에는 왕비도,
“?”
나도,
―?
다시 주머니에서 기어 나온 엘데마저도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선약? 무슨 선약?
“오후 여섯 시마다 만나기로 한 분이 있습니다.”
네드 님이 옅게 웃었다. 잠깐, 저거.
‘밤 여섯 시에는 다시 여기로 오세요. 따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내 얘기잖아!! 나잖아!!
그의 말에 멈칫한 왕비가 불쑥 물었다.
“누구?”
그 말에 뜬 선택지는 가관이었다.
[① 남자
② 여자]
저런 선택지여야 했을까요?
네드 님도 선택지를 보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어떤 파국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짐작하신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네드 님의 손은 여자로 향했다.
난 그걸 보면서 난 간절하게 외쳤다.
차라리 남자 해! 남자라고 해!!
“여자입니다.”
네드 님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왕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 순간, 네드 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만나는 분의 성별을 떠나, 왕비 전하께서 저와 따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요청하겠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선을 딱 긋는 모습이 신기했다.
와, 저걸 저렇게 매너 있게 처리한다고?
나 같으면 이 인간이 뭐라는 거냐면서 싸대기 갈기고 튀었을 텐데?
“호오.”
왕비의 눈이 반짝였다.
네드 님은 선을 그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저 뒤틀린 사랑(?) 좀 어떻게 해 봐!
내가 이마를 짚고 엘데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날개를 활짝 펼치는 사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네드 님을 보고 웃은 왕비가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감히 거짓을 고했겠다?”
짐짓 화난 척하는 투였다. 네드 님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네드 님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왕비가 외쳤다.
“당장 이자를 하옥하라!”
신뢰도가 바닥 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오.
―우르르르!
“왕비 전하를 농락한 놈이다!”
“가둬라!”
불륜 새싹 왕비와 유네리아의 자유도를 무시한 네드 님, 그 사이에서 골 때리는 표정의 나를 보면서 엘데가 말했다.
―인간들이란 심오하군.
인간이 아니라 유네리아 시나리오 라이터가 심오한 게 아닐까?
내가 허망하게 웃는 사이 네드 님이 감옥으로 이동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왕비가 뇌까렸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수겠어.”
―호오.
난 다시 흥미로워하는 엘데(용, 993세)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 *
이미 네드 님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처박혔을 것이다.
몰래 감옥 들어가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네드 님을 밖으로 꺼내는 게 문제였다.
“드르렁…….”
알라반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는 간수 옆을 지난 나는 감옥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하긴, 이 꼴 나도 안 망했지.”
내가 알기로 대륙을 구한다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가 끝나고 나서도 알라반은 망하지 않았다.
물론 유네리아가 서비스 종료를 하기 전에는 다음 스토리가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또 다른 위기가 닥치겠지?
하지만 그 위기가 알라반하고 관련이 있을지는 나도 모르고 에이리 님도 모르고 네드 님은 당연히 모르고, 아마 지금 유네리아 팀장도 모르고 시나리오팀도 모를 것이다.
왜?
얘네는 쪽대본으로 시나리오 퀘스트를 내니까!
앞뒤가 맞은 적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한결같은 망겜이다!
시나리오 퀘스트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설정이 충돌하는 꼴을 보면서 언젠가 에이리 님이 그랬다.
‘사실 유네리아 팀에 시나리오 전담이 없는 거 아니에요?’
10년 지난 게임에 무슨 그런 유령 같은 소리를……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난 소름 돋는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감옥 안쪽 가장 깊은 곳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당연히 네드 님이 있었다.
―우우웅!
보랏빛 이펙트와 푸른 이펙트를 온몸에 감은 채.
“자자잠깐만, 네드 님!”
저거 공격력 증폭 버프잖아! 바바박살내면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