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12)

<19화>

하지만 난 일말의 희망을 안고 연인의 반지를 두 번 두드려 보았다.

분명 여긴 왕비의 후원, 왕비의 궁 바로 앞이고 저 북서쪽에는 마법사 연구소가 있다.

원래 시나리오 퀘스트상 마법사 연구소로 가야 하니까 그리로 가시지 않았을까요?

―삐빅.

하지만 연인의 반지가 가리킨 네드 님의 위치는 왕비의 궁 쪽이었다.

“…….”

―…….

나와 엘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다가 동시에 왕비궁으로 향했다.

“설마 저기에 계실까? 저 너머에 왕비궁 마구간에 계실 가능성은?”

네드 님이 갑자기 탈것에 대한 호기심이 뻐렁쳤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내가 엘데를 쳐다보자 엘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곳에서 네드의 냄새가 난다.

그러면서 날개로 가리키는 건 당연히 왕비궁이었다.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진 순간이었다.

“아니, 후원엔 왜 들어오신 거야?”

이대로 잡히면 네드 님의 알라반 왕성 신뢰도가 바닥으로 치닫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럼 왕성에서 크리스탈을 얻는 메인 퀘스트 클리어는 당연히 어려워진다.

그냥 다 때려 부수고 크리스탈만 얻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아냐, 때려 부수는 건 최후의 방법이야.”

생각보다 너무 자유도가 높은 유네리아에서 그딴 짓을 해 본 고인물은 당연히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가’를 받았다.

무슨 대가? 망겜을 믿은 대가…….

[제목 : 알라반 왕성 때려부쉈는데 버그걸림]

난 한동안 게임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던 전설의 짤을 기억했다.

[10주년 게임 전설의 문의 답변.jpg]

그 짤의 제목은 이거였다. 그리고 유네리아라고 고글에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저 문의 답변이었다.

“안 돼, 안 돼.”

그 답변 내용을 떠올린 난 손을 내저었다.

이놈들이 그 버그를 고쳤을 리가 없다!

유네리아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위치렉도 그대로 있는데! 숲 들어가면 렉걸려서 모가지 날아가는 렉도 그대로인데!

용가리 타고 급강하하면 용 등짝이랑 나랑 따로 노는 버그도 그대로 있는데!

그대로 용 몸은 낙하하고 난 안장하고 같이 날아다니는 양탄자 버그가 실존하는 이 게임에서!

왕성을 다 때려 부수는 일반적이지 않은 플레이까지 보호해 줄 리가 없었다.

결국 ‘정석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좋아.”

어차피 모로 가도 크리스탈만 얻으면 된다.

알라반 왕성 다 때려 부수면 알라반에 진입도 못 하게 되겠지만, 그럼 맨 마지막에 알라반 크리스탈 얻으면 되는 거 아니냐?

내가 최후의 방법까지 생각하고 비장한 걸음을 뗐을 때였다.

“모두 돌아가라!”

별안간 왕비궁에서 기사 한 명이 튀어나와서 말했다.

“쟨 뭐야?”

옆을 돌아보니 엘데도 흥미로운 얼굴이었다. 이 얼굴은…….

“왕비 전하께서 오해가 있으셨다고 한다! 더 이상 후원을 어지럽히지 말고 속히 돌아가라는 명령이시다!”

오해?

오해??

―툭툭.

난 연인의 반지를 다시 두드려 보았다.

오해의 중심이 분명한 네드 님은 아직도 왕비궁에 있었다.

“…….”

―…….

다시 엘데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주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저건 마치 아침 8시에 막장 드라마를 보는 엄마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알, 알겠습니다!”

“돌아가자!”

몰려온 병사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사라지는 사이.

난 왕비궁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네드 님, 왕비하고 같이 있는 것 같지?”

―인간들의 관계는 아주 흥미롭군.

엘데는 벌써부터 막장 드라마를 볼 생각에 신나 있었다.

물론 난 아니었다.

이거 막장 드라마 전개로 가면 신뢰도 망한다고!

유네리아는 심할 정도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었다.

분명히 왕비는 네드 님 앞에서 온갖 선택지를 늘어놓을 거고, 거기서 잘못 선택하면?

정말 왕비랑 스캔들 날 수도 있다!

그럼 흔히 말하는 ‘망캐’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알라반 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알라반엔 들어오지도 못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선택지를 어떻게 잘 대기만 한다면…….

한다면…….

네드 님을 생각한 난 꿈을 접었다. 그리고 엘데에게 말했다.

“엘데, 들어봐. 저기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흐아아아암.

이놈은 막장 드라마 전개 말곤 관심이 없는 거지?

“하나는 몰래 들어가는 거고, 다른 하나는 주변의 신뢰도를 얻어서 천천히 진입하는 거야.”

아마 왕비궁 출입하려면 신뢰도가 90%는 넘어야 할걸?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왕비궁을 꼬나볼 때였다.

엘데가 말했다.

―신뢰를 얻다가 왕비와 네드가 즐거운 관계가 된 걸 들키면 볼만하겠군.

“벌써 그런 관계 된 거 아니거든?”

네드 님이 할 일 없는 삐뚤어진 고인물처럼 왕비와 결혼해 보겠다고 작심하고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그냥 휘말린 거다! 왕비가 왜 그 사람을 데려갔는지는 몰―

“……홀릴 얼굴이긴 했지.”

아무튼! 나는 엘데를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러고는 결정했다.

몰래 들어간다!

* * *

300레벨이 30대 퀘스트 영역에서 잠입하는 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철저히 경비해라!”

왕비궁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면서 주변을 경계하는 게 보였지만, 그걸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대의 경계 범위는 새빨간 이펙트로 보였으니까.

유저들이 쉽게 말해서 ‘장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펙트.

특히 잠입하면서 경비병의 경계를 피해야 할 때는 저 이펙트만 밟지 않으면 들킬 일이 없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나 경비병들이라면 경계 범위가 무지막지하게 넓어서 피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이 경비병들은 레벨이 낮아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경비하겠냐?”

그리고 예상대로 경비병들의 경비 범위는 자기 눈앞 2m 정도의 부채꼴 범위 정도였다.

그 근처를 빠르게 지나간 나는 외진 복도에 접어들었다.

―툭툭.

연인의 반지를 두드리면서 네드 님의 방향을 짐작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필 왕성 내부라서 지도에 네드 님 위치가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침실도 아니고, 집무실도 아니고.”

왕비의 개인 공간은 다 뒤져 봤지만 네드 님은 없었다.

그리고 반지의 인도를 따라 간 곳은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복도였다.

“응?”

그리고 내 눈엔 익숙한 복도이기도 했다.

이 익숙한 온도…… 습도…… 기분…….

“여기 왕비 밀실인데?”

원래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왕비는 이곳에서 반란을 꾸민다.

물론 그건 유저가 크리스탈 서너 개를 얻은 뒤에나 일어나는 일이라서 아직은 아닐 터였다.

그럼 그 전에 밀실은 무슨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지?

그건 아마 지금 밀실에 있는 네드 님이 알고 있을 터였다.

설마 이상한 일 일어난 거 아니죠?

난 밀실에 가까이 온 김에 슬쩍 설정을 바꾸었다.

[‘귓속말’ 상태로 변경합니다.]

그리고 네드 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귓속말할 상대가 근처에 없습니다.]

하지만 알림창은 내 귓속말을 칼같이 차단했다.

아니, 자고로 게임에서 귓속말이란 서버만 같으면 통하는 물건 아니었어?

정말 귓속말로 바꿔 놓으면 어떡해!

쌍욕을 주워 삼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체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귓속말하게 해줄 건데?

그렇다고 파티 채팅이 활성화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현실같이 잘 만들었네…….”

우리 유네리아 개발팀 칭찬해요! 나가기만 해 봐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난 밀실 앞에 섰다.

그리고 아주 살짝 문을 밀었다.

―…….

다행히 문이 열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대화 소리가 들려 왔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죠?”

왕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드 님이 앉아 있었다.

* * *

네드 님은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으신 것 같았다.

파티 상태여서 네드 님 앞에 있는 선택지가 흐릿하게 보였다.

[① 알라반 왕성에 수상한 일이 있다고 해서요.

② 인연 따라 흘러왔습니다.]

두 번째 선택지 꼬라지가 왜 저래?

난 입을 떠억 벌렸다.

보통 사람이면 1번을 선택했겠지만 하필 네드 님은 메디카 사람이었다.

그리고 알라반과 메디카는 30년간 휴전 관계인 적대 국가다.

그런데 메디카 사람이 다짜고짜 왕성에 와서 수상한 일을 조사하러 왔다?

파……국……이……다…….

결국 네드 님이 선택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인연 따라 흘러왔습니다.”

왜 바람피우는 사람 18번 같은 대사가 선택지에 있는 건데?

“그래요? 인연 따라 왔다고요…….”

그렇게 말하던 왕비가 후후 웃었다.

그렇게 쪼개던 왕비가 불쑥 손끝을 뻗어 네드 님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나름 유혹적으로 웃는 왕비와 감자 보는 듯한 표정의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코끝도 닿을 것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

993살이나 먹었다더니 막장 드라마엔 환장하는 것 같은 엘데가 감탄했다.

이게 무슨 전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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