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12)
  • <18화>

    켄은 자기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무슨 일로 왔냐고 묻기에 그냥 메인 퀘스트에 맞춰서 대답했다.

    왕성에 이상한 일이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그러자 켄은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왜 그랬나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가 왕성을 수호하는 기사단장이니 왕성 내의 소문을 입단속 하는 일도 겸했을 것이다.

    근데 불쑥 내가 나타나 소문 들었어요, 이러고 있었으니 이상하게 느낄 만도 했다.

    어쩌면 엉뚱하게 그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난 고개를 기울였다.

    “막 그렇게 자세한 정보까지 듣진 못했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누굴 벌을 줘야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NPC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디테일한 반응이다.

    난 유네리아의 연애 시뮬레이션 시스템(?)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라 유네리아 NPC가 디테일이 그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시답잖은 얘기를 좀 더 한 후 켄은 나를 방에서 내보냈다.

    그의 비서라는 사람이 와서 어쩔 수 없이 내린 축객령에 가까웠다.

    다음에 또 시간이 되면 들러 달라는 말과 함께 그의 방문이 닫혔다.

    “허어.”

    기사단장실이 내성에 있는 탓에, 아직 0%인 신뢰도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건 아닌가 잠시 걱정했지만 다시 보니 신뢰도는 벌써 20%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의 경비를 책임지는 왕성 기사단장인 켄을 만났기 때문인 것 같다.

    “편해서 좋기는 한데…….”

    왕성 퀘스트는 유저의 비상한 눈치가 요구되는 퀘스트다.

    NPC들 대사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여기 정도는 들어가도 되겠군, 하는 통밥을 굴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적어도 기사단장인 켄이 호의를 보인 이상 그가 낮에 근무하는 기사단 훈련소 근처는 오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특별히 이상한 짓만 하지 않으면 엔간한 곳에는 다 들를 수 있을 것 같고.

    퀘스트로 꾸역꾸역 올라야 하는 신뢰도가 올라간 건 좋았다.

    “근데 이상하단 말이지.”

    켄이 기사단장이 된 거야 NPC들의 시간만 빨리 간다고 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다.

    네드 님이 섬을 쓸어버린 지 40분 만에 전설처럼 노래를 읊어대던 음유시인 NPC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근데 그냥 켄이 나를 대하는 게 이상했다.

    테이블을 긁던 그의 검 소리보다 그가 나를 대하는 게 더 거슬렸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던 그의 모습은 내가 초보 마을에서 봤던 켄의 모습과는 새삼 달라져 있었다.

    헤어진 사이에 흑화라도 하셨습니까?

    “네드 님은 잘하고 있겠지?”

    난 팔을 뻗은 채 한 바퀴를 빙 돌아보았다.

    빛나는 방향을 보니 네드 님은 대략 북동쪽에 있었다.

    기사단장실 위치에서 북동쪽이면 알라반 왕실 마법사 연구소 방향이다.

    원래 메인 스토리 진행대로라면 저기에 들르는 게 맞았다. 잘하고 계신 모양이다.

    난 지도를 켜 대충 기억나는 위치로 향했다.

    켄을 따라오는 길에 왕성 분위기를 대충 보니 메인 스토리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할 일만 끝내고 나가야지.”

    지금 이 왕성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왕성의 땅이 군데군데 뜬금없이 진흙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금쯤 네드 님이 계실 마법사 연구소에서 열심히 연구해 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는 상황이고.

    마법사들이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흙 사태는 이 왕성 지하 어딘가의 비밀 공간에 숨겨진 크리스탈이 물 속성을 띠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그건 원래 메인 스토리를 진행해야 알 수 있는 정보이니 크리스탈의 존재도 모르고 있는 마법사들이 헤매는 건 당연했다.

    “그럼 일단 가서 진흙부터 밟고.”

    원래 메인 스토리 진행대로라면 진흙을 밟는 유저를 마법사가 발견해야 했다.

    유저는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마법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오고, 은혜를 갚는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호구 같은 이유로 왕성의 일을 돕다가 크리스탈을 얻게 된다.

    기지개를 쭉 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진흙이 있을 법한 위치로 향했다.

    빨리 가면 마법사 연구소에 있는 네드 님이랑 같이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소란스러워서 잘 수가 없군.

    그때 네드와 있는 내내 내 옷 안에서 자고 있던 엘데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만 자라, 좀. 어떻게 된 용이 자거나 날거나 둘 중 하나야?”

    잠은 잘수록 더 는다던데.

    그게 유네리아의 용에게도 적용되는진 모르겠지만 엘데 설정도 사람이 만든 거니까 비슷하지 않을까?

    내 말에 엘데가 앞발로 내 얼굴을 꼬집었다.

    “아! 야!”

    이게 주인을 꼬집네? 돌아보니 엘데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피곤할 정도로 날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러는지 모르겠군.

    “…….”

    음…… 그러고 보면 사실 이 대륙이 섬처럼 조그만 게 아닌가 의심스럽게 빠른 속도로 대륙을 질주한 것 같다.

    난 볼을 긁적였다.

    “이제 한동안 날 일 없어. 잘 자.”

    그렇지만 엘데는 잘 생각이 이미 다 날아간 듯했다.

    콧김을 몇 번 뿜던 그는 내 어깨에 몸을 길게 늘어뜨려 엎드렸다.

    ―잠은 한참 전에 다 깼다.

    피곤하다고 할 땐 언제고 아까랑 말이 달랐다.

    ―아까 만난 인간은 아는 인간인가?

    “켄?”

    엘데는 동의의 의미인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이제 용의 몸짓언어까지 알아야 한다니, 유네리아 정말 하드한 게임이다.

    “너 만나기 전에 잠깐 만난 적 있어. 왜?”

    ―어느 정도로 아는 사이지?

    요컨대 지금 걔랑 나랑 친한지 묻고 있는 거?

    난 눈썹을 치켜세웠다.

    왠지 아는 사람 뒷담 까기 직전에 밑밥 까는 거랑 비슷하게 들렸다.

    “그냥 이번이 두 번째로 만나는 건데.”

    엘데는 내 말에 날개를 크게 폈다 접었다.

    콧김을 뿜는 걸 보니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진 않은 모양이었다.

    ―별로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게 없는 인간이다.

    난 가만히 엘데를 쳐다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했니?

    그러고 보니 메인 스토리 용과 인간의 전쟁 챕터에서 원래 NPC로 나오는 엘데는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설정상 인간과 용의 언어가 표현방식이나 언어가 차이가 있어서 대략 기분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다.

    “뭐 느껴진 거 있어?”

    엘데가 유저인 네드 님이나 내 마음을 읽었다고 하면 좀 의심스럽겠지만 상대는 같은 NPC인 켄이었다.

    이 평가는 좀 믿을 만했다.

    근데 엘데는 내가 생각했던 애매한 기분의 문제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를 했다.

    ―용의 피 냄새가 나.

    그건 나한테도 날 텐데……라고 하려다 말았다.

    엘데의 반응이 좀 심각해 보인 탓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군홧발 소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뭐야, 뭐 나 잘못 들어간 데 있어?”

    화들짝 놀란 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내가 무슨 길가에 있는 돌멩이인 것마냥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쌩 지나쳤다.

    그들이 향하는 쪽은 북동쪽이었다.

    잠깐, 북동……쪽……?

    “저쪽에 뭐 있나?”

    경비병들이 간 쪽을 가리키자 내 손에 있는 ‘연인의 반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설마…….”

    지도를 켠 난 북동쪽에 여전히 마법사들의 연구소가 있는 걸 보고 안심했다.

    그때 엘데가 불쑥 날아오르더니 내 앞에 놓인 지도를 건드렸다.

    ―툭.

    확 축소된 지도는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내 기억보다 훨씬 넓어진 왕성, 마법사 연구소 너머의 공터에는 대문짝만하게 <왕비의 후원>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

    난 전에 만난 음유시인 NPC가 ‘왕비와 전설의 전사 네드의 스캔들’ 따위의 노래를 읊을지도 모른다는 설득력 있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 *

    네드 님은 길치다.

    하지만 돌아다니다가 하고많은 왕성 시설물 중에 왕비의 후원에 들어갔을 확률은?

    “…….”

    우리가 그렇게 운 대가리가 없을까요?

    라고 생각하기엔 연인의 반지를 아무리 두드려 봐도 가리키는 곳은 왕비의 후원 방향이었다.

    “일단 따라가 보는 게 좋겠어.”

    난 엘데를 어깨에 얹은 채 병사들을 몰래 따라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침입자를 잡으러 가는 자들답게 우르르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라반 병사 / Lv. 30]

    그리고 레벨은 매우 낮았다.

    그야 당연했다. 여긴 초반 퀘스트를 진행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레벨은?

    [유니 / Lv. 300]

    레벨 차이가 열 배나 나는데 이놈들의 눈을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거였다.

    이놈들이 너무 약하다는 것.

    “이놈들은 유리 조각상이다, 살얼음이다, 건드리면 죽는다……!”

    나 말고 쟤네가 죽는다……! 그럼 망한다!

    내가 끊임없이 생명(이라고 읽고 내 신뢰도)을 살려 두기 위해 애쓰는 동안 엘데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잡아라!”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병사들이 우르르 후원 쪽으로 몰려갔다.

    “!”

    뭐뭐뭐뭐야! 망했다!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치면 아무리 저놈들이 레벨 30이라도 내가 보일 수밖에 없―

    “잡아라!”

    “와아아!”

    우르르르.

    나를 중심으로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다.

    한마디로 병사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

    난 지금까지 뭘 위해 숨은 거지?

    삽질한 십 분간의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데 엘데가 못을 박았다.

    ―너한텐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

    “그러게.”

    말 안 해도 알 것 같거든? 굳이 쐐기 박지 말아 줄래?

    그래도 대놓고 왕비의 후원에 가는 건 좀 그랬다.

    슥, 스슥.

    그래서 난 대충 나무 뒤에 숨는 척만 하면서 병사들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이내.

    [‘알라반 왕성 : 왕비의 후원’에 진입합니다.]

    알림창이 뜬 순간이었다. 병사들이 외쳤다.

    “왕비 전하의 후원에 신원미상의 남성이 숨어들었다고 한다! 찾아라!”

    좀 높아 보이는 기사가 검을 든 채 우렁차게 외쳤다.

    난 머리를 싸맸다.

    누가 봐도 네드 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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