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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12)
  • <15화>

    잘 보니 날 부르기 위해 톡톡 두드릴까 고민하는 듯했다.

    내 옆구리에 매달려 졸고 있던 엘데는 그게 거슬렸는지 네드 님의 손가락을 콱 물어 버렸다.

    [-198,321]

    머리 위에 데미지가 뜬 네드 님이 멈칫하며 손을 뗐다.

    “왜요?”

    내가 묻자 네드 님이 데이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

    NPC 신경 써서 말 조그맣게 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난 PC 버전이었지만 전에 대장장이가 내 무기 하나 부숴 먹었을 때 눈앞에서 쌍욕 고래고래 했는데…….

    “라비스를 먹여 보면 안 될까요?”

    라비스? 지금 키트 파는 NPC한테 좋은 짓까지 하라고?

    순간 솟아오른 분노가 기쁨과 놀라움으로 치환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

    네드 님, 유네리아에 적응 좀 하셨구나!

    여전히 내 품에서 나오는 라비스 병을 경계하시는 건 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여튼 좋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라비스도 많고, 밑져야 본전이다.

    “어머, 세상에! 그렇게 여행을 오래 했다고? 우리 언니도 세상에 둘도 없는 모험을 했다던데, 언제 한 번…….”

    그렇게 몇십 분 후 데이아와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속으로 칼을 갈고 있는 건 내 손에 라비스가 들려 있는 한 들키지 않으니까 괜찮다.

    우리는 NPC 데이아의 집에 데이아 위로 언니가 네 명 있으며 그 언니들의 직업이 뭔지 성격은 어떤지 뭘 좋아하는지 같은 쓸데없는 정보를 들어가며 인내한 끝에 놀라운 쾌거를 이룩해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이런 것도 있는데 한번 볼래?”

    어느새 반말을 하게 된 데이아는 카운터 안쪽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네드 님의 눈이 마주쳤다.

    이거다! 이번에야말로 하늘의 기운!

    “아까보다 좀 더 좋은 상자야.”

    “…….”

    이 NPC 눈깔이 금색인 걸 보고 진작 금화에 미친 NPC라는 걸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나에 금화 백 개만 줘.”

    지껄이는 소리는 아주 화룡점정이었다.

    300레벨 대 스테이크 33개를 먹고도 1개는 남는 금액을 키트 가격으로 제시한 주제에 데이아는 싱글벙글 웃고 있기만 했다.

    저 상자 대신 아무래도 데이아의 멱살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네드 님이 상자를 덥석 집었다.

    데이아는 양심도 없는지 네드 님의 주머니에서 알아서 금화 백 개를 꺼내 갔다.

    상자를 열자 나오는 건 당연히 잡템이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꽃잎]

    잎사귀에서 업그레이드 된 것이 아주 감동스럽다.

    네드 님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다음 상자를 집었다. 난 네드 님의 손을 제지했다.

    “이거 까다가 전 재산 탕진할지도 몰라요.”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안 될 놈 중에 대표적인 사람을 아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남들은 몹 열 마리만 잡아도 나온다는 아이템이 내가 잡으면 늘 백 마리를 잡아도 안 나왔다.

    그래서 난 아이템 구해 오라는 퀘스트는 애초에 제끼고 살았다.

    에이리 님은 내 극악한 운을 보고.

    ‘너무 데미지가 세서 아이템이 녹아 버리는 건 아닐까요?’

    하는 얼토당토않은 가설을 제시했지만, 그게 슬슬 믿길 만큼 난 늘 아이템 운이 극악이었다.

    그건 키트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에이리 님이 키트에서 대박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릴 동안 난 늘 키트 잔해를 들고 울어야 했다.

    “게임을 그렇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겁니다.”

    네드 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유네리아에 물들지 않은 순진한 영혼이었다.

    “네리아GM이 우리를 여기 떨어뜨려 놓고 튄 걸 생각해 보세요.”

    난 이 순수한 뉴비에게 세상의 썩은 기운을 주입하려 애썼다.

    “……!”

    그 와중에 상자를 네 개째 열던 네드 님이 멈칫했다.

    드디어 좀 현실을 알게 되었나 했더니 네드 님이 멈춘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네드 님이 상자 안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건 하얗고 푸른 기운이 집약된 무언가였다. 누가 봐도 햇살 환한 하늘에 구름이 동동 떠 있는 모습을 상상할 법한 모습이었다.

    [하늘의 기운]

    “헐.”

    내가 입을 떠억 벌렸다. 내 주변엔 나 빼고 다 될 놈만 있는 모양이다.

    * * *

    우리가 회생의 물약을 얻는 데까지는 수많은 고비가 있었다.

    용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군말 없이 생산 스킬을 돌리던 네드 님마저 마지막에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이 죽은 걸 살리는 게 쉽습니까, 용이 죽은 걸 살리는 게 쉽습니까?”

    “그야…….”

    답은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네드 님은 용 대신 스킬 맞고 죽을 기세였다.

    원래 유네리아에서 용의 존재가치는 고기방패이거늘, 주객이 전도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둘 다 안 죽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요.”

    간신히 위기(?)와 고비를 넘고 넘어 우리의 손에 회생의 물약이 쥐어진 건, 우리가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내가 자는 사이 실패를 견디며 오기와 끈기로 재료를 끌어모아 네드 님이 만들어낸 회생의 물약이었다.

    아, 오해하지 말자. 네드 님이랑 난 따로 잤다.

    “용 소환해서 주면 돼요.”

    그리고 네드 님은 사용법을 몰라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환장하겠다.

    “아하.”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와 고행 끝에 정답을 알아낸 네드 님은 입고 있던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이템창을 여는 게 아니라 왜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나 했더니 액세서리창에 착용한 다음 속주머니에 넣어 놓으신 모양이었다.

    곱게 품에(?) 안고 계셨던 손바닥만 한 노란 용을 네드 님이 톡톡 건드리자 우리 앞에 불쑥 커져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내 용 ‘비상식량’이었다.

    눈을 감은 채 몸을 말고 있는 녀석에게 네드 님이 다가갔다.

    “…….”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부드럽다.

    편지로 미안하니까 먹이는 잔뜩 줬습니다, 하실 땐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이 많이 드신 모양이었다.

    엘데도 말대답 꼬박꼬박 하고, 가끔 날 쏘아보기도 하고, 어쩔 땐 고개를 홱 돌린다든지 하는 반응을 보여 주는 거 보면 아마 비상식량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PC버전에서 용을 길들여본 유저라면 모를까 용을 처음 보는 뉴비라면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300레벨대에 용을 조련해 본 적이 없는 뉴비만의 순수함이었다.

    “……네드 님?”

    근데 좀 얼굴 어루만지는 시간이 길었다. 네드 님이 날 돌아보았다.

    “용이 입을 안 벌립니다.”

    “…….”

    그거 아주 상식적으로는 심각한 문제였다. 난 미안한 얼굴로 비상식량을 가리켰다.

    “그냥 몸에다 뿌리시면 돼요.”

    “아.”

    오늘따라 많은 깨달음이 있는 네드 님은 물약 뚜껑을 열어 비상식량에게 뿌렸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파앗!

    비상식량의 주변에 천상계처럼 두꺼운 구름 이펙트가 생겼다가 서서히 걷혔다.

    네드 님은 갑작스런 큰 이펙트에 놀란 것 같았지만 비상식량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구름이 완전히 걷히자 노란 용이 서서히 눈을 떴다.

    완전히 살아난 걸 증명하듯 머리 위에 HP 바와 함께 상태 바가 떴다.

    [이름 : 비상식량

    HP: 363,300/363,300]

    [상태 : 맹독, 마비, 피로(3), 절망, 배고픔]

    피로는 죽었다 살아나면 걸리는 거니까 이상할 게 없는데 문제는 나머지 세 개였다.

    저건 죽기 전에 걸린 것 같은데?

    “네드 님. 제가 스킬창에 해독이라고 따로 정리해 놓은 거 있을 거예요. 용한테 쓰시면 돼요.”

    네드 님이 내 스킬창과 고군분투하는 동안, 비상식량은 반쯤 뜬 눈을 좀처럼 완전히 뜨지 못했다. 피로 증상이었다.

    ―그르르…….

    용은 자고로 몸빵용이다.

    그만큼 저주저항력도 최고치로 찍어 놨는데 저런 디버프가 걸려 있을 정도면 북쪽 바다 너머 몬스터들 수준이 짐작이 갔다.

    부디 거기엔 크리스탈이 없길 바라야겠다.

    ―크르릉……

    잠시 후, 비상식량이 날개를 활짝 폈다. 해독이 끝난 모양이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둘러보던 비상식량은 날 보고 움찔했다.

    “엥?”

    알아보나? 캐릭터 데이터 다 바뀌어서 못 알아보는 줄 알았는데?

    비상식량이 슬금슬금 나한테서 뒷걸음질 치는 걸 보니 100%였다.

    알아본 게 분명하다.

    “어쭈, 피해?”

    다가가자 비상식량이 날개를 펼쳤다.

    내가 정상적인 데이터를 갖고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반응이다.

    요컨대 저건 서열정리가 안 됐을 때……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보다 약할 때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쭈.

    “쉿.”

    그때 네드 님이 흥분한 용의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비상식량은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수그렸다.

    저것도 내가 원래 데이터를 가졌을 땐 보이지 않던 반응이었다.

    저놈은 말 안 듣기론 최강이었기 때문에 내가 먹이를 줄 때를 제외하면 고개를 수그리는 법이 없었다.

    “착하지.”

    안 착한데요? 걔 착한 역사가 없는데? 저놈 데이터도 바뀐 거 아냐?

    난 아무리 봐도 내 용 같지 않은 비상식량을 입을 떠억 벌리고 쳐다보았다.

    ―탁, 탁.

    놈은 기분이 좋은지 꼬리로 바닥을 통통 두드리고 있었다.

    네드 님은 놈을 쓰담쓰담해 주고는 아이템창에서 웬 커다란 고기를 꺼냈다.

    후추와 소금간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은 그 커다란 고기는 다름 아닌 예누스 정제육이었다.

    “?????”

    그냥 예누스 고기가 용가리계의 츄르라면 저거는 츄르계의 끝장판이었다.

    하지만 많은 유저들이 정제육은 쓰지 않는다.

    예누스 고기가 하나에 금화 반 개 정도 한다면 저건 하나에 금화 15개는 줘야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비상식량은 앞에 놓인 예누스 정제육을 아껴먹지도 않고 그대로 낼름 꿀꺽 삼켜버렸다.

    놈의 식사 시간은 네드 님이 예누스 정제육을 네 개나 줬을 때에야 끝났다.

    “헐.”

    난 입을 떠억 벌렸다. 방금 저놈 입으로 금화 60개가 들어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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