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하지만 안개 너머의 무언가는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안개 사이에서 검붉고 거대한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대로 섬을 양단할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한 검이었다. 네드 님 위치에선 피할 수 없는 위치였다.
“빨리, 빨리!”
난 엘데의 등짝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가면 죽을 텐데.
엘데는 걱정된다는 듯 말하면서도, 본심은 역시 반대인 듯 날 싣고 최고 속도로 네드 님에게 급강하했다.
“네드 님―!”
이번엔 네드 님도 들은 것 같았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는 네드 님에게 내가 손을 뻗었다.
“빨리 타요!”
다행히 안개 너머에서 내질러져 오는 검의 속도가 느렸다.
게임 몬스터는 보통 강한 필살기를 쓸 때, 그만큼 대기 시간이 걸린다.
이건 반대로 말하면 늑장 부리다간 우리 둘 다 북쪽 바다 생물들의 밥이 될 거라는 뜻이었다.
“……!”
네드 님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난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손을 한껏 뻗었다. 뒤를 흘끗 돌아본 네드 님이 내 손을 잡았다.
―후우웅!
우리가 손을 잡자마자 엘데가 수직으로 고도를 높였다.
네드 님의 몸이 떨어질 듯 바닥으로 확 쏠렸다.
난 네드 님의 몸을 있는 힘껏 위로 끌어당겼다. 네드 님의 발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몬스터의 검날이 지나갔다.
[-1,707,892]
검에 스친 네드 님의 머리 위로 무지막지한 데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난 네드 님의 HP가 아직 남아 있는 걸 확인하고 조심조심 네드 님을 엘데의 등 위에 올려놓았다.
“와, 진짜 죽을 뻔했네.”
저 무지막지한 데미지 뭐냐?
미지의 몬스터는 다행히 엘데의 빠른 속도를 따라올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몇 걸음 이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다가, 짙은 안개 밖으로 모습이 보일 즈음에 뒤돌아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니 님이십니까?”
돌아보니 네드 님은 긴가민가하는 얼굴이었다.
난 볼을 긁적였다.
“알고 손잡으신 줄 알았는데.”
“그야 이 세계에서 저를 부르실 분은 유니 님뿐이니까요.”
거참 설레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이었다.
“저 몬스터는 어쩌다가 잡고 계셨던 거예요?”
“잡고 있었던 게 아니라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네드 님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섬 밖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거 그냥 용 타고 날면 나올 수 있어요.”
그냥 몬스터 등지고 도망치기만 해도 됐을 텐데?
뭐가 문제였나 싶어서 쳐다보자 네드 님은 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그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더니 간신히 이야기를 꺼냈다.
“……용이 죽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지 뭘.
가볍게 넘기려던 난 심각한 얼굴의 네드 님을 보고 말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그거 회생의 물약으로 살리면 되는데…….
살리기 쉬운 건 아니지만 저렇게 암울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남의 용 이렇게 소중히 여겨 주는 사람 처음 봤다.
“그거 그냥,”
물약으로 살리면 돼요, 하려다가 난 말을 멈췄다.
조금만 늦었어도 400레벨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바닷속에 네드 님이 사망 상태로 풍덩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은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구하긴 했으니까.
구하고 나서 네드 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장난기가 불쑥 솟았다.
“아, 그거요. 용 제사 지내면 다시 태어나요.”
“예?”
네드 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관에다가 제사 지내면 용이 다시 거기서 태어나요. 생전의 기억은 없겠지만.”
난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날아가던 엘데가 듣다가 어이가 없었는지 긴 목을 뒤로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난 뭐라고 하는 대신 중지와 검지를 ‘V’자로 만들어 내밀어 보였다.
뉴비 낚는데 초치면 죽는다!
어차피 용이 죽으면 회생의 물약으로 살리면 된다는 건 유네리아를 안 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다.
회생의 물약 자체가 워낙 만드는 공정이 까다로운 물건이었으니까.
커뮤니티에서는 뭔가 품이 많이 드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회생의 물약 만드는 줄 알았다” 식으로 농담을 건네는 경우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관은…… 오동나무가 좋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아련한 표정으로 먼바다를 쳐다보는 네드 님께 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었다.
“……뻥이었어요.”
네드 님의 저 표정을 스크린샷으로 못 남기는 게 한이다.
* * *
우리가 엘데의 등에서 내린 건 대륙 북서쪽에 있는 마을에서였다.
대륙 북쪽 나라 메디카와 서쪽 나라 알라반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이 마을은, 내가 PC버전 할 당시에 용가리 밥 사러 많이 들렀던 동네였다.
“일단 상황을 좀 정리해 볼게요.”
우리는 드래곤 레스토랑 NPC가 용 전용 음식을 만드는 동안 테이블에 앉아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리 용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레스토랑이라지만 크기는 사람이 딱 오가기 충분한 정도였기 때문에, 엘데는 그 크기 그대로 레스토랑에 들어올 수 없었다.
밖에 두고 올 수는 없으니 일단 난 엘데를 축소시켰다.
유저에게 조련된 용은 악세사리로 변해 장비창에 부착될 수 있는데, 이 게임 세계에서는 그게 어떻게 구현되나 했더니 엘데는 손바닥만 한 크기가 되어 내 손등 위를 기어 다녔다.
세상에, 코피 터지게 귀엽다.
난 손등 위에 엎어져 자는 엘데를 슬쩍 내려놓고 네드 님에게 물었다.
“전에 크리스탈은 구했다고 하셨죠?”
“예. 보여 드릴까요?”
네드 님은 아이템창을 불러오는 듯 앞 허공을 잠깐 쳐다보았다.
내가 아이템창 켜면 NPC들은 내가 저렇게 보이겠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네드 님을 보는데, 네드 님이 아이템창에서 꺼낸 건 크리스탈이 아니라 웬 노트와 펜이었다.
―슥, 슥.
그러더니 내가 말리기도 전에 노트에 뭔가를 죽죽 그리기 시작했다.
앞을 흘끗흘끗 보면서 그리는 걸 보니 아이템창에 있는 걸 그리는 것 같은데…….
“……오.”
거기까지 생각했을 뿐인데 노트엔 벌써 익숙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건 네드 님이 편지에도 그려준 크리스탈의 모습이었다.
“그거 일일이 그리시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손을 들어 네드 님을 제지했다.
이미 크리스탈을 다 그린 네드 님이 눈을 깜빡이며 날 올려다보았다.
“아이템창에서 오랫동안 손대고 있으면 ‘링크’라는 선택지가 뜨는데, 그거 저한테 공유하시면 저한테도 아이템 정보가 보여요.”
아이템창을 띄운 난 내가 초보 마을에서 얻었던 크리스탈의 정보를 공유했다.
네드 님은 눈을 크게 떴다.
“아, 이런 게 있었군요.”
신기한지 네드 님은 크리스탈 말고도 여러 가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귀여워.
난 흐뭇한 미소를 숨기기 위해 애써야 했다.
네드 님이 보여주는 건 크리스탈 빼곤 내가 다 아는 물건들이었다.
네드 님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내 아이템창이니까.
“여튼 그 크리스탈 잘 갖고 계셔야 해요. 지금 우리가 크리스탈 두 개를 얻었으니까 세 개만 더 얻으면 되거든요.”
나는 네드 님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다행히 네드 님은 메인 스토리를 꼼꼼하게 읽는 성격이었다.
PC버전에서 레벨 7까지밖에 안 했다고 해도 초반에 나오는 스토리를 자세히 보셨는지 이해가 빨랐다.
설명을 다 들은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크리스탈은 대륙 중앙 호수에서 파괴해야 돼요. 어차피 시스템상 아이템창에서 크리스탈 꺼낼 수 있는 곳도 거기밖에 없지만.”
거듭 중요한 걸 강조한 난 아이템창에 있는 크리스탈을 집어 바깥으로 휙 내던져 보았다.
당연히 크리스탈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대신 아이템창에 곱게 다시 들어왔다.
[버릴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붉은 구슬이나 버릴 수 없는 아이템으로 해주지 그랬냐, 응?
새삼 억눌렀던 빡침이 올라왔다.
[-263,031]
그때 네드 님의 머리 위에 데미지가 떴다.
내 캐릭터 HP가 263만 정도니까 26만 정도의 데미지가 크다곤 할 수 없지만, 마을 한복판에서 뜨기엔 이상한 데미지였다.
뭐야, 독이라도 걸렸나?
“아, 이런.”
근데 네드 님은 놀라지도 않고 아이템창에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
난 눈을 깜빡였다. 뭐지?
파티창을 소환해서 네드 님 상태를 봐도 디버프 같은 건 걸린 게 없었다.
내가 놀란 게 보였는지 네드 님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여기 떨어진 후 얼마 되지 않아 계속 나타난 증상입니다. 가끔 시야도 좁아지고요.”
HP가 계속 떨어지고 시야가 좁아져?
게임만 아니었으면 과로로 병원에 실려 갈 것 같은 증상이었다.
난 설마 하는 마음에 네드 님한테 물었다.
“혹시 상태창에 노란 게이지가 몇 퍼센트쯤 차 있어요?”
내가 말한 건 포만도였다. 네드 님은 상태창을 보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14% 차 있습니다.”
지금 용가리 밥 살 때가 아니었잖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HP 떨어진 거 지금까지 물약으로 버틴 거예요?”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픔 때문에 닳는 건데 그걸 포션을 부어서 버텼다고?
뉴비들이 유네리아에서 포만도 때문에 당황하긴 하지만, HP가 다 닳아 바닥에 엎어져 보고 나면 포만도 시스템을 뼈저리게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근데 이 사람은 엎어질 순 없으니 HP를 물약으로 채워 가며 버틴 모양이다.
정말 돈 많은 뉴비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건 바쁘다고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 더블로 해서 입에 쏟아부으면서 안 자고 버티는 거랑 비슷한 건데…… 원래 그럴 땐 밥 드셔야 해요. 유네리아에 맛있는 거 많아요.”
내 설명에 네드 님은 단박에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옅게 웃었다.
“한두 번 해 본 짓은 아닌 것 같네요.”
대체 이 사람 현실에서 무슨 일하는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