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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12)

<12화>

원래 유네리아에서 용은 캐릭터당 한 마리만 길들일 수 있다.

“흐음.”

용의 HP는 이제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슬슬 조련이 가능한 HP가 된다.

유저 입장에서야 용은 죽으면 다시 재생성되는 몬스터에 불과하지만, 메인 스토리에도 나오는 이 용 입장에서 죽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크르르……!

용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자존심은 더럽게 세서 살려달라고 못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저기, 내가 대륙 북쪽으로 최단 시간에 실어다 줄 최고 빠른 용가리를 수소문하고 있는데 혹시 아는 용 있어?”

난 용의 얼굴을 누르고 있던 토르의 검에서 슬쩍 힘을 풀며 물었다.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아 마비와 번개 효과는 그대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용도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크르르.

아니나 다를까 용이 눈을 내리깔았다.

자존심은 있지만 실리는 찾는 놈인 모양이다. 마음에 들었다.

난 용을 위해 슬쩍 운을 띄워 주었다.

“난 너처럼 강한 용은 처음 보거든. 2층에 있는 용들하곤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난 다른 한 손으로 아이템창에서 예누스 고기를 꺼냈다.

“내가 먹는 건 제대로 책임질 수 있는데.”

용이 흠칫했다. 사실 아까 다 봤다.

구름 다 날려 버리면서 1층에서 2층으로 솟아오를 때 그 와중에 콧등에 얹어져 있던 예누스 고기 낼름 먹은 거.

내가 토르의 검을 슬쩍 떼자 HP가 7,000 정도밖에 안 남은 용이 날개를 접고 웅크렸다.

용이 서열을 받아들였을 때 유저에게 보이는 자세였다.

[용 ‘엘데’를 조련하시겠습니까?]

얘는 메인 스토리에 나오는 용이라서 내가 이름을 따로 못 정해 주나 보네.

난 유니 캐릭터로 조련했던 내 버그덩어리 용 ‘비상식량’을 생각하며 볼을 긁적였다.

게임 오래 하다 보니 몬스터하고 딜해서 조련도 해 보고, 참 오래 하고 볼 일이었다.

[YES]

난 조련 선택지에서 고민 없이 YES를 눌렀다.

이제 진짜 연락 두절 이틀째인 내 뉴비 주우러 갈 때였다.

* * *

용 엘데는 993살이라고 했다.

자기는 대륙에 인간이 자리 잡기도 전부터 하늘에서 그걸 내려다봤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난 듣는 척하면서 흘려들었다.

―한때는 용과 인간이 함께 살아 숨쉬는 세계를 꿈꿨었지. 그런데…….

엘데는 수다쟁이 과인지 한마디만 말을 받아도 열 마디는 뱉어내는 굉장한 놈이었다.

한참을 떠들던 그가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반말을 하는 건 남들이 보기에 조금 이상할 것이다.

그 긴 얘기를 왜 늘어놓나 했더니 결론은 반말하지 말라는 거였나 보다.

난 어이가 없어서 툭 던졌다.

“내가 존댓말로 엘데 님, 엘데 님, 하면서 예누스 고기만 픽픽 던져 주는 것도 모양새 굉장히 이상해 보이지 않아?”

―…….

논리 결여 용가리 엘데가 내게 조련당한 뒤로 벌써 네 번째 패배였다.

내가 엘데를 조련시킨 지 사십 분밖에 안 됐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한 전적이었다.

“일단 북쪽 끝에서부터 훑는 게 빠를 것 같아. 정확히 네드 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어.”

무슨 몬스터를 만났던 건지 알면 좀 찾기 쉬울 텐데, 사냥 도감에 없는 몬스터라니 짐작도 가지 않았다.

―북쪽 바다 너머의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다면 바다 너머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한참을 날던 엘데가 뜬금없이 말했다.

난 맞바람에 인상을 쓰고 있어서 더 인상 쓸 것도 없었다.

“북쪽 바다? 그 섬하고 대륙 사이에 있는 거라고 해 봐야 400레벨 대 수중생물밖에 없잖아. 그런 걸로는 지금 네드 님 스펙에 데미지 1도 못 줘.”

―그곳이 아니라 섬 너머.

“섬 너머라고?”

거기라면, 언젠가 에이리 님과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기억에도 남았다.

세상이 네모라고 주장하는 과거의 과학자들이 봤으면 바로 이거라며 무릎 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잔치를 벌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우리가 봤던 건 ‘세상의 끝’이 아니라 ‘맵의 끝’이었다.

‘PC게임이 뭐 이렇죠.’

‘오래된 유네리아에 뭘 바라겠어요.’

‘하긴, 벌써 4년도 더 전에 업데이트된 컨텐츠인데…….’

그러면서 에이리 님하고 욕을 신명 나게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요컨대 섬 너머 북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거긴 아무것도 없는데?”

내 말에 엘데가 콧방귀를 뀌었다.

―구름 위에서 사는 종족을 너무 무시하는군.

저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메인 스토리가 바뀌었다고 했다.

교황청에 있어야 할 크리스탈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제자리에서 싹 사라져 있었고.

거기다 메인 스토리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새로운 맵이 하나 더 나오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거기 몹 수준이 어느 정도야?”

내 질문에 엘데는 즉시 답했다.

―너는 스치기도 전에 죽는다.

그야 지금 내 레벨이 300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좀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그 섬하고 대륙 사이 몬스터들하고 비교하면 어때?”

요컨대 레벨이 400대는 넘느냐는 소리였다.

―가끔 북쪽 바다의 생물이 섬 주위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번에 수십 마리를 잡아먹는다고 하더군.

“뭐?”

그럼 400레벨 대 몬스터 수십 마리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놈이라는 거네?

그 정도 몬스터면 네드 님이 한 방에 HP가 반으로 깎였다고 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놈들 눈 좋아?”

유저한테 물어볼 땐 ‘멀리 있어도 걔가 공격해요?’ 하고 물어봤겠지만 상대가 애완동물…… 아니, NPC 비슷한 무언가다 보니 단어도 골라서 물어봐야 했다.

이렇게 말해도 알아들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엘데는 알아들은 듯했다.

―섬의 절반 정도는 항상 놈들의 시야 안에 있다고 보면 된다.

“헐.”

인식범위가 장난이 아닌데? 멀리 있어도 습격당한다는 소리잖아.

난 네드 님이 쓸어버렸을 섬을 떠올렸다.

그 섬 자체도 좁은 편이 절대 아니었다.

엘데 말대로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했다.

“빨리 가자.”

그런 흉악한 곳에 있을 네드 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 편지 못 한 것도 죽어서 그런 거 아니겠지?

* * *

엘데와 그의 등에 탄 내가 대륙의 북쪽 끝에 닿은 건 대략 한 시간 후였다.

보통 용이 대륙 횡단에 반나절이 걸린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엘데의 속도는 과연 1층의 용답게 괴물같이 빠른 셈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날아왔는데도 내 마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대륙 북쪽이 이렇게 생겼었나?”

내가 모르는 건물과 지형이 가득했다. 아예 맵 자체가 통째로 갈아치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날씨가 춥게 설정되었는지 생각보다 넓은 범위의 바다가 얼어 있었다.

저게 지면으로 생각해도 될 만큼 단단하게 얼었는지는 밟아 봐야 알겠지만.

―북쪽 바다의 안개가 걷히면서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지.

확실한 건 엘데가 설정상 993살인 게 생각보다 쓸모 있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메인 스토리를 깨면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나 PC 버전에 없었던 설정 같은 걸 잘 알고 있었다.

북쪽 바다 같은 새로 추가된 것들까지 포함해서.

덕분에 원래는 근방 NPC들에게 물어물어 해결해야 할 의문들을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운영진은 내가 엘데를 길들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그는 가끔 세상의 비밀(?)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원래 유저라면 메인 스토리를 깨기 전엔 몰라야 할 크리스탈의 비밀 같은 것들까지.

“안개가 걷혔다고?”

그리고 나보다 인식 범위(?)가 넓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아까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 엘데는 북쪽 대륙 끝에 닿자 그 소리가 뭔지 정확히 인식해 냈다.

―북쪽 바다에서 싸우는 인간이 있군.

이 동네에서 싸움박질을 할 사람이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난 엘데의 등을 팡 쳤다.

“빨리, 빨리 가! 십중팔구 그 사람이야!”

내가 하는 말마다 토를 달던 엘데는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별말 없이 속도를 훅 냈다.

3초쯤 기특해하다가 주변을 쓸어가는 바람에 날아갈 뻔하고 나서 엘데의 진심이 의심됐다.

이놈은 그냥 내가 바다에 떨어지길 원한 거 아냐?

진심은 알 길이 없었지만 중요한 건 엘데가 그만큼 빨랐다는 것이다.

내가 있던 대륙 서남쪽에서 대륙 북쪽까지 날아오는 데 채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그였다.

이런 섬 하나 건너는 데 오래 걸릴 리가 없었다.

“……!”

과연 가까이 다가가자 원래 있어야 할 맵 너머의 안개가 걷힌 게 보였다.

정확히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좀 더 멀리에 안개가 있었다.

맵이 확장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섬 끝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어……!”

내 새끼손가락보다도 짧아 보일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아는 하얀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가끔 기분 전환 겸 입는 제복이다.

“네드 님!”

손을 모아 그쪽으로 크게 소리 질렀다.

네드 님은 듣지 못했는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네드 님 주변에 거대한 창이 서너 개 떠올라 안개 속으로 쇄도했다.

―우우웅!

뭔가 부딪히는 소리는 너무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대신 공기가 울렸다.

그래도 멀리서도 데미지는 똑바로 보였다.

[-677,392]

[-1,011,128!]

[-633,327]

[-707,024]

보는 사람 속이 뻥 뚫리는 데미지였다.

아니, 뉴비 아니었어?

어지간한 공대 사람들보다 스킬 조합을 잘 쓰시는데?

난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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