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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112)
  • <11화>

    용의 둥지. 용 조련용이자 메인 스토리 진행용 던전.

    오만데 가서 민폐 끼치는 인간답게 이제 구름 위까지 올라와서 용을 잡아가는 바람에, 용과 인간 사이의 전쟁이 나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전쟁 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천상계에 크리스탈이 있다면 모를까.

    천상계에서 조심해야 할 건 딱 한 가지뿐이다.

    내 원래 스펙을 가져와도 조심해야 하는 몬스터들이 몇 군데 위치하고 있는데, 그놈들만 피하면 된다.

    물론 300레벨에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길가다 발에 채듯 그런 놈들이 있는 건 아니고, 2층인 이곳보다 한 층 아래에 잠을 자고 있는 걸 깨우지만 않으면 된다.

    그 외엔 어차피 용들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용 옆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겨도 상관없었다.

    “어디 보자…….”

    사실 레벨 300에 용을 조련하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다.

    조련하기도 힘들뿐더러 어찌어찌 조련한다고 해도 용 자체의 레벨이 300대이다 보니 서열정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기보다 약한 놈의 말은 안 듣겠다며 용가리들이 뻐기기 때문에 귀찮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난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최대한 말 잘 들을 것 같은 놈을 찾아야 하는데.”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놈은 딱 봐도 성깔 있어 보이는 붉은 용이었다.

    근육이 듬직한 게 일단 타고 날면 꽤 빠를 것도 같고, 길들이는 맛(?)도 있어 보이는 놈이었지만 레벨 300의 스펙으로는 좀 무리가 있었다.

    “대체로 빨간 놈들은 성깔이 있으니까 거르고.”

    다음으로 보이는 건 파란 놈들과 노란 놈들이었다.

    번쩍번쩍한 비늘을 빛내며 햇살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놈들은 죄다 제 성질머리를 뽐내는 듯 눈썹이 45도 이상으로 하늘로 뻗쳐 있었다.

    “다 성깔이 더러워 보이는데.”

    왠지 레벨업이 너무 잘 풀리나 했더니, 천상계에서 막힐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이십 분은 뺑이를 치고서 바닥에 털썩 앉아 버렸다.

    “아니, 뭔 놈의 용가리들이 죄다 성질이 나 있어?”

    그런 놈들만 누가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용들은 원래 먼저 유저를 공격하는 몬스터가 아닌데도, 내가 근처만 지나가면 콧김을 뿜으며 발을 구르는 놈들도 있었다.

    “좀 순한 놈 하나만 걸리면 바로 잡는데.”

    난 손에 들린 예누스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용들은 냄새만 맡아도 좋아서 환장한다는 고기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더 달라고 들러붙는다는, 그러니까 조련이 쉬워진다는 소리다.

    일명 용가리계의 츄르!

    “츄르면 뭐 하냐. 주고 싶은 놈이 없는데.”

    ―휙!

    난 고기를 패대기쳐 버렸다.

    ―띠용!

    그런데 내가 패대기친 고기는 구름이 생각보다 푹신한 재질인지 멀리멀리 튀어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구름 위에 드러누워 청명한 하늘 멀리 날아오르는 고기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철퍽!

    “응?”

    그러다가 뭔가 잘못됐다 싶은 생각이 든 건 고기가 뭔가에 부딪힌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절대 구름에 닿아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난 고기의 비행경로를 추적했다.

    고기가 날아올라 떨어진 곳은 하필이면 영 좋지 못한 곳이었다.

    “……X 됐다.”

    구름 아래를 내려다보자 나오는 말은 이거밖에 없었다.

    천상계 1층, 잘 드러누워 자고 있던 드래곤이 콧잔등에 떨어진 고기를 인식했는지 앞발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2층에 자고 있는 놈들보다 두어 배는 큰 것 같은 용의 날개가 서서히 펴졌다.

    물론 만만찮게 성질이 더럽다는 걸 증명하듯 꿈틀거리는 눈썹이 예사롭지 않았다.

    메인 스토리를 다 깬 내가 처음 보는 용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 보는 용이 아니라서 문제였다.

    “하필 저놈이야?”

    저놈은 이 용 조련 컨텐츠가 업데이트된 지 2년 만에 출시된 용과 인간의 전쟁에서 선봉장을 맡았던 놈이었다.

    한마디로 인간이라면 학을 떼는 용.

    ―크르르르……

    용이 눈을 번쩍 떴다.

    용의 눈이 콧잔등에 올려진 예누스 고기를 한 번 봤다가 위를 불쑥 쳐다보았다.

    그리고 당연히 거길 내려다보던 나와 용의 눈이 마주쳤다.

    ―펄럭!

    “으어어어엄마야!”

    용의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구름 몇 개는 흩어지기까지 했다.

    불쑥 2층으로 솟아오른 용이 내게 그대로 급강하했다.

    내 주변에서 졸고 있던 2층의 용들이 놀라 사방으로 도망쳤다.

    ―콰앙!

    다행히 구름이 뭐든 잘 튕기는 재질(?)이라서 그런지 용의 주둥이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 대신 구름만 한 뭉텅이 삼킨 용은 애피타이저는 다 먹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나를 쳐다보았다.

    “망했네.”

    망했다고 해도 여기서 곱게 용의 한 끼 점심 식사가 될 순 없었다.

    습관적으로 연 아이템창에서 토르의 검이 잡혔다.

    “아, 이게 있었지?”

    난 거대한 용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콧잔등을 고기로 얻어맞은 놈은 파란색이었다.

    물 속성의 용이다.

    토르의 검 효과인 번개가 그나마 잘 먹힐 터였다.

    “…….”

    문제는 저놈이 메인 스토리에서조차 유저가 죽이지 못하는 용이라는 점이었다.

    지금보다 몇 년 전이긴 했지만 용 전쟁이 업데이트되고 나서, 한동안 버그로 저놈이 NPC가 아니라 몬스터가 되어 천상계를 뛰어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당시에 온갖 어려운 컨텐츠는 다 섭렵한 유저들이 심심하다고 잡아보려 몰려왔다가, 하늘다리 밑에서 산더미 같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1층 용한테 덤비지 마라]

    [이걸 깨라고 만들어 둔 거냐?]

    당시 커뮤니티는 난리도 아니었지만 유얼머니게임즈는 이렇게 해명했다.

    [안녕하세요, 유저님^^

    깨라고 만들어놓은 던전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음, 역시 망겜다운 대응이었다.

    아무튼 그때 만렙이 400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레벨 300인 지금 내 스펙으로는 날개 끝에만 스쳐도 사망이다.

    “음…….”

    네드 님이 대륙을 돌고 돌다가, 어느 날 우연히 하늘다리를 발견해서 여기에 뻗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살려 줄 확률은?

    “…….”

    난 생각을 중단하고 토르의 검을 들었다.

    그냥 어떻게든 템빨로 저놈 때려잡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 * *

    용이 활짝 펴고 있던 날개를 접고 나를 주시했다.

    그대로 내게 쇄도할 모양이다. 난 자세를 낮춘 채 용에게 집중했다.

    “…….”

    구름이 침대 매트로 딱 좋은 재질이라는 걸 잠깐 까먹었다.

    그러니까 나만 빨리 튀어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

    구름의 반동까지 받은 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파지지직!

    토르의 검 특수효과인 번개가 주변을 꽉 메웠다.

    경험치 바가 오르는 걸 보니 주변으로 튄 번개 몇 가닥이 2층의 용 몇 마리를 그대로 태워 버린 모양이다.

    ―파파파팟!

    원래는 푸른색인 번개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눈앞에 커다란 번개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강한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용이 끌고 온 풍압이었다.

    [이름 : 유니

    HP : 11,114/19,783]

    다행히 그 이상 내가 용에게 밟히는 일은 없었다.

    용은 토르의 검 효과가 먹히긴 먹히는지 접었던 날개를 애매하게 편 채 전기를 맞고 있었다.

    마비 효과 때문에 튕겨 나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데미지를 입는 것이다.

    [-6,673]

    [-7,111]

    [-6,909]

    [-6,774]

    용의 머리 위로 무수한 데미지가 지나갔다.

    거의 초당 서너 번은 데미지를 받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용의 체력은 깎일 기미가 안 보였다.

    “……이거 칼이 먼저 닳는 거 아니겠지?”

    순간 불길해진 난 토르의 검을 살폈다.

    다행히 얼마 전에 수리를 하고 온 덕에 내구력은 아직 빵빵하게 남아 있었다.

    “휴.”

    긴장이 좀 풀리는 기분이다.

    이대로 칼을 들고만 있으면 언젠간 끝나지 않을까?

    ―비겁한 인간 같으니!

    그때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토르의 검이 말하는 줄 알고 이게 말로만 듣던 에고 소드였나 싶어 감동받는 사이, 용이 날 매섭게 쳐다보았다.

    “아, 말도 할 수 있었구나.”

    원래 용이랑 인간은 말이 안 통한다는 설정 아니었나?

    난 용의 얼굴에 댄 토르의 검을 물리지 않은 채 용과 대치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와 말을 섞기 싫었을 뿐!

    용이 포효했다.

    순간 방심했다가 방어 스킬을 제대로 쓰지 못한 탓에 HP가 확 까였다.

    [HP : 117/19,783]

    와, 죽을 뻔했다.

    원래 대화할 때 밥 먹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별수 없었다.

    난 칼 든 쪽 반대쪽 손으로 특제 HP물약 뚜껑을 땄다.

    “근데 지금은 왜 말해?”

    HP를 채우자 당연한 의문이 들었다.

    용은 도로 완전히 회복된 내 HP 바를 한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새 용의 HP는 반 이하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음, 생각보다 오래 안 걸리겠다.

    ―그건……!

    정곡을 찔렸는지 논리 결여 용가리가 입을 다물었다.

    사정 다 압니다.

    난 머리를 긁적였다.

    “아쉬우니까 뭐라도 말하고 싶었겠지.”

    열 받은 용이 다시 포효했다.

    ―쩡!

    이번엔 방어 스킬을 제대로 써서 HP는 별로 까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성격이 순한데?

    물론 전신에 번개가 꽂히는데 공손해지지 않을 존재가 몇이나 있겠냐마는……

    난 용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길들일 만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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