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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112)
  • <10화>

    어차피 네드 님과 나는 본의 아니게 운명공동체였다.

    네리아GM은 우리의 캐릭터 데이터가 바뀐 탓에 우리를 이 빌어먹을 동네에서 빼 줄 수 없다고 했다.

    이 세계에 와야 하는 건 원래 나 하나였는데, 버그로 네드 님까지 온 셈이니 이 세계에 있는 유저는 우리 둘뿐이다.

    따라서 살려줄 수 있는 것도 서로뿐이다.

    그냥 크리스탈 각자 모아서 만난 다음에 ‘어휴, 안녕하십니까! 이제 이 빌어먹을 물건 작살 내고 탈출합시다!’ 하면 끝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일이 훨씬 복잡해졌다.

    원래 교황청에 있어야 할 크리스탈도 없고, NPC들 반응을 보니 어딘가로 옮겨진 게 아니라 아예 설정이 바뀌어서 크리스탈 위치가 처음부터 다른 곳에 배정된 것 같았다.

    게다가 네드 님이 한 대 맞고 반피가 됐다는 그, 내 사냥 도감에 없다는 몬스터도 문제였다.

    이거 자칫하다가 네드 님이랑 나랑 대륙 반대편에서 따로따로 죽어 버리는 곤란한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니터링은 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전무후무한 이벤트를 열었는데? 이 세계에 떨어진 유저들을 지켜보고 있진 않을까?

    “아냐…….”

    행복회로는 3초 만에 사라졌다.

    어떤 일 하나 제대로 하는 법이 없는 불신의 아이콘인 유네리아 운영진이 우리를 살려 주러 올 거라곤 기대하지 말자.

    여기엔 우리 둘뿐이다.

    최대한 빨리 네드 님하고 합류해야 한다.

    크리스탈 어쩌고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레벨 300 찍자마자 용가리부터 잡아타고 북쪽으로 날아가야 했다.

    300레벨에는 용이 말을 좀 안 듣겠지만 더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다 수리됐네. 수리비는 1,760골드라네.”

    “아, 고맙습니다.”

    대장장이는 내게 다시 공손하게 장비를 내밀었다.

    물론 나한테 공손한 게 아니라 장비한테 공손한 거였다.

    “아 그런데 자네, 혹시 동쪽 던전에서 나온다는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는가?”

    장비를 들고 뒤돌아서던 내 걸음이 멎었다.

    이건 본능이었다.

    보통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NPC의 말을 들어주면 십중팔구 ‘그 몬스터를 몇 마리만 죽여 주시게’ 또는 ‘그 몬스터가 갖고 있는 어쩌고저쩌고를 가져와 주시게’ 하는 전개로 흘러갔던 것이다.

    “못 들어봤는데요?”

    난 아주 뻔뻔하게 반응했다. 그 몬스터들이 경험치 하나는 잘 준다.

    하지만 딱 레벨 247까지만 최고의 경험치를 자랑하는 몬스터라는 게 문제다. 248이 된 지금은 다른 데로 가야 했다.

    “그럼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보게. 그 던전 근처에 아비라이트라는 광석이…….”

    내 어깨를 꽉 잡은 대장장이는 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나도 모르게 대장장이 NPC의 다른 쪽 손을 주시했다.

    저 손이 언제 불쑥 튀어 올라서 내 앞에 뜬 퀘스트 수락 버튼을 누를지 모른다!

    초보 마을 할아버지부터 몇 번이나 당하면서 내 안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요즘엔 구할 수가 없다네. 성의 병사들이 도와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무리가 있어.”

    한숨을 푹 쉬면서 슬쩍 나를 올려다보는 게 아무리 봐도 이건 퀘스트다!

    “그래서 그런데…… 강한 자네가 조금만 수고해 줄 순 없겠나? 아비라이트가 없으면 고급 장비를 수리할 수가 없어.”

    “음…….”

    ……이렇게 나오면 이건 또 다른 문제다. 고급 장비 수리면 남 일이 아니잖아?

    대장장이를 슬쩍 본 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 던전이면 아직 레벨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다.

    레벨업 최단 루트랑은 좀 비껴가게 되겠지만 수리를 생각하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토르의 검을 고치겠다고 한 간덩어리 부은 대장장이는 이 NPC밖에 없다.

    결국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 그럼 던전 근처의 몬스터 ‘메라이아’를 999마리만 잡아다 주게!”

    “네?”

    몇 마리요?

    조금만이라며? 조금만 도와 달라며?

    아니, 애초에 던전 근처에 몬스터 999마리가 있었으면 이딴 성은 진작 쓸려 버리지 않았을까?

    저 이야기인즉슨 메라이아가 999마리째 재생성될 때까지 던전 앞에서 죽치고 앉아서 몹을 때려잡으라는 소리였다.

    “확 무시해 버려?”

    내면의 악마가 ‘그딴 부탁 씹어 버려’라는 제목의 삼중창을 불러제끼기 시작했지만 그러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수리가 문제였다.

    아비라이트고 뭐고 간에 유네리아의 시스템상 저 퀘스트를 깨고 가지 않으면 저 대장장이 NPC는 날 볼 때마다 퀘스트 근황만 물어볼 뿐 수리 선택지를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염병!

    “할 수 없지.”

    [퀘스트 ‘대장장이의 고충’을 입수했습니다.]

    [대장장이의 고충

    - 메라이아 999마리 잡기(0/999)]

    난 퀘스트를 수락했다. 물론 곱게 메라이아를 잡아줄 생각은 없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아니, 한 여덟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를 할 때였다.

    * * *

    유네리아에는 무려 몇십 종이나 되는 생산직 스킬이 존재한다.

    내가 그 수많은 스킬 중에 여덟 보 전진을 위해 선택한 건 ‘물약 생산’ 스킬이었다.

    “유니 님은 이 많은 물약을 어디에 쓰려고 매번 그렇게 가져가시는 건가요?”

    “연구를 좀 해 보고 싶어서요.”

    NPC한테 스킬이 어쩌고 해 봐야 고개만 갸웃거리니까 대충 알아먹을 말로 해 줘야 한다.

    “네, 그럼 고생하세요.”

    평소 같았으면 호감도를 위해서라도 좀 이야기해 뒀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난 재빨리 포션을 아이템창에 욱여넣고 약사의 집을 튀어나왔다.

    “빨리 마스터해야지.”

    원래 ‘물약 생산’ 스킬은 뉴비들에게 유네리아의 또 다른 진입 장벽으로 통하는 극악의 생산 스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도 수많은 엿 같은 스킬을 마스터하다 보면 그냥 하찮은 난이도로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걸 마스터하게 도와준 뉴비가 한둘이 아니었다. 수련법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내가 이걸 마스터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고로 게임도 인생도 인맥 아니겠어?”

    인맥이 있으면 세상살이가 좀 쉬워지는 편이다.

    빠른 속도로 스킬을 마스터한 나는 금세 원하던 물건을 만들어냈다.

    [‘라비스’ 제작 성공!]

    아, 스킬 올리기 귀찮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난 만들어낸 물약을 흔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살이 쉽게 쉽게 갑시다.”

    * * *

    “아, 자네 또 왔는가? 그래, 동쪽 던전 근처의 메라이아 수는 좀 줄었고?”

    나를 살피던 대장장이 NPC는 금세 실망했다.

    “한 마리도 잡지 않다니! 그러면 아비라이트를 구할 수 없네!”

    대체 날 몇 초 째려보고 나서 내가 잡은 메라이아 숫자를 때려 맞추는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오늘 따질 건 그게 아니다.

    “에이, 어떻게 사람이 일 생각만 하고 살아요? 아저씨도 일하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서 이것 좀 가져왔는데.”

    난 아이템창에서 내 비장의 무기를 불쑥 꺼냈다.

    아, 물론 레이저포 아니다.

    “아니, 그런 귀한 걸…….”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본 대장장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꺼낸 물건은 다름 아닌 ‘라비스’라는 이름의 음료였다.

    NPC들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주로 사용되는 물건.

    “이거 같이 먹으면서 회포도 좀 풀고 합시다. 예?”

    난 어느새 대장장이 NPC가 옆에 끌어다 놓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라비스를 오순도순 20통쯤 까고 나서 대장장이 NPC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아니, 어딜 가려고!”

    “이제 일하셔야지요. 저도 메라이아 잡고.”

    “에이, 메라이아는 무슨!”

    대장장이 NPC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가 앉았던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우리 성에도 병사 많다네! 지금까지 이 성이 안 망한 걸 보면 어련히 알아서 잘 잡지 않겠나? 그보다 여기 앉아서 이야기나 좀 더 들어보게!”

    그러더니 내 앞에 퀘스트 클리어 창이 떴다.

    원래는 메라이아 999마리를 잡아 와야 열리는 창이었다.

    [Level Up!]

    [Level Up!]

    심지어 그냥 999마리를 잡았을 때 주는 경험치보다 지금 주는 경험치가 두 배는 되었다.

    호감도의 힘이었다.

    옳지, 쉽게 쉽게 갑시다.

    난 의자에 도로 앉으면서 대장장이 NPC에게 웃어 주었다.

    * * *

    퀘스트와 몬스터 사냥을 병행하자 레벨 300을 찍는 건 금방이었다.

    그 과정에서 들어간 라비스 음료가 몇 개인지는 묻지 말자.

    그래도 3만 골드는 안 들었다.

    [‘천상계 : 용의 둥지’로 진입합니다.]

    내가 레벨 300을 찍자마자 벼락같이 달려간 곳은 천상계로 통하는 하늘다리였다.

    원래는 적어도 레벨 400은 넘어야 오는 곳이었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질질 끌 시간이 없었다.

    아무래도 더 늦으면 우리 뉴비님이 어딘가에서 싸늘하게 발견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길 못 찾는 뉴비라면 대체 어느 기상천외한 장소로 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제발 네드 님, 부디 길은 잃어도 좋으니 눈에 띄는 곳에 계시고요. 엔간하면 마을에…….”

    그렇게 빌면서 난 용의 둥지에 들어섰다.

    [용의 둥지 : 특수한 스킬을 사용하여 용을 조련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온 인간은 오랜만이군. 수련을 게을리한 인간은 이곳에서 숨쉬기조차 어렵다고 하던데, 어떤가?”

    하늘다리 NPC 마이딘이 물었다.

    “글쎄요.”

    난 어깨를 으쓱했다. 숨 쉬는 거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레벨 299 이하의 캐릭터가 이곳에 오면 하늘의 공기를 견딜 수 없어 금세 쓰러진다는 잡스러운 설정이 있었던 것도 같다.

    레벨 300부터는 갑자기 폐의 구조라도 개편되는 건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었다.

    “좋아. 부디 조심하기 바라네.”

    마이딘은 내 안전(?)을 확인하고는 금세 하늘다리를 타고 쓩 내려가 버렸다.

    천상계에 혼자 남은 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흐음…….”

    여기는 천상계라는 지역명 그대로 구름 위에 있는 공간이었다.

    구름 위에는 용들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거기에 침입하는 게 바로 나 같은 인간이었다.

    “미안하다, 애들아.”

    하지만 이쪽도 급하단다.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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