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2)
  • <9화>

    “!”

    나도 모르게 아이템창을 열어 토르의 검을 집었을 때였다.

    “자, 여기가 옛날에 사제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았던 장소예요. 어떤 상황에서든 유혹받지 않고 무사히 가운데에 도달한 사람만이…… 응?”

    “어?”

    옷을 보니 대사제였다.

    횃불을 든 그 사람 뒤에는 올망졸망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수많은 견습 사제들이 서 있었다.

    뭐야, 여기 비밀 아니었어?

    그 순간 네리아NPC의 친절한 편지가 떠올랐다.

    [네 번째, 기존에 알고 계시던 내용과 일부 다른 메인 스토리 내용이 적용되었습니다.

    유네리아 대륙을 다시 한번 구해 주세요, 용사님!]

    일부 다른 메인 스토리 내용이 이거였어? 크리스탈 위치 바꾸는 거?

    그럼 일부 바뀌는 게 아니잖아, 염병!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견학은 요청하신 분들만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대사제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 열성적으로 대시해 오는 사제도 무시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참이었다.

    크리스탈만 뽑으면 메인 스토리 진행상 교황청 인간들이랑 엮일 일은 없었으니까.

    “그게,”

    난 대충 대사제한테 다가갔다가, 냅다 견습 사제들 사이를 뚫고 뛰었다.

    근데 견습 사제가 너무 많았는지, 그 순간 렉이 걸려 버렸다.

    “헉, 세상에.”

    대사제가 입을 떠억 벌리고 일부 견습 사제는 놀라 기절하기까지 했다.

    왜 그런가 싶어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내 몸은 온데간데없고 얼굴만 둥둥 떠 있었다.

    “오.”

    뒤돌아보니 몸이 뒤늦게 버벅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유네리아가 캐릭터 외형을 만들 때 뭘 잘못 건드린 건지 이렇게 얼굴과 몸이 따로 노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는데, 이게 이 세계 안에서까지 적용될 줄은 몰랐다.

    쓸데없는 잡버그 고치지 말고 이런 무서운 버그나 고쳐!

    “이단인가?”

    견습 사제가 흠칫해서 말하는 걸 어이가 없어서 맞받아쳤다.

    “아니 사람이 렉 좀 걸리기로서니 이단입니까?”

    “사람의 단면만 보고 오해하는 것은 불화의 씨가 된답니다.”

    그때 대사제가 온화한 얼굴로 사제들을 보며 말했다.

    옳은 소리 하는군.

    사제는 여전히 내 얼굴을 향해 버벅버벅 뛰어오고 있는 몸을 보며 말했다.

    “하나가 들어가 둘이 되는 네리아 님의 기적이 바로 이것이지요. 진정 독실한 신자분이시군요.”

    아니거든!

    * * *

    교황청 밖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내 머릿속은 진탕이었다.

    크리스탈 위치가 바뀌었다는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오는 길에 그 열성적인 사제가 다시 몸으로 부딪쳐 왔지만 부딪히고도 난 그냥 무시하고 뛰었다.

    “이렇게 되면 쉽게 클리어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어디로 바꿨는지는 어떻게 알고 클리어한단 말인가?

    정말 메인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클리어해야 하는 거야?

    “화나네?”

    물론 그런다고 못 깨는 건 아니다. 문제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그 긴 대사 다 듣고 쓸데없는 부탁 241,748,274개씩 들어줘 가면서 언제 클리어하고 앉아있단 말인가? 그것도 공략도 없이?

    [우편이 도착했습니다.]

    “어?”

    네드 님이다!

    난 순식간에 달려 우편함 앞에 도착했다.

    레벨이 낮아서 그런가, 얼마나 뛰었다고 숨이 찬지 모르겠다.

    그냥 메인 스토리는 일단 두고 레벨업부터 한 다음에 싹 퀘스트를 싹 밀어 버릴까…….

    [안녕하세요, 유니 님. 네드입니다.]

    정중하게 시작되는 편지를 보니 마음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지난번에 말씀해주셨던 위치에 다시 한번 다녀왔습니다.

    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봤더니 말씀해주신 공터가 있어 크리스탈을 습득했습니다.

    혹시 이렇게 생긴 크리스탈이 맞습니까?]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펜으로 정성스레 그려 놓은 크리스탈의 모습이 보였다.

    크리스탈의 반투명한 그림자는 물론이고, 거기에 반사되는 자기 캐릭터 모습까지 어렴풋이 그려 놓은 사진 같은 그림이었다.

    “헐.”

    이걸 직접 그린 거야? 난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아니, 아이템을 보여줄 거면 그냥 아이템창에서 조작해서 링크를 걸면 되잖아!

    기상천외한 뉴비의 편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크리스탈을 구해 오는 길에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섬의 상공을 지나고 있었을 때 커다란 손 같은 게 덮쳐 오더군요.

    타겟팅이 되는 것을 보니 몬스터인 듯했지만 유니 님의 ‘사냥 도감’에는 없는 몬스터였습니다.]

    “없었다고?”

    유네리아에서 나처럼 모든 스킬과 스탯을 다 찍은 유저들은 별 괴상한 짓을 다 하기 마련이다.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그런 내가 안 잡아본 몬스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지나치게 강한 데미지를 받고 있고, HP 회복 속도가 너무 빨라 제가 잡기에는 숙련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후퇴하였습니다.

    다행히 멀리 떨어지자 더 쫓아오진 않았습니다만 도중에 길을 잃어 모르는 마을로 들어온 듯합니다.

    그리고 용의 HPㄱ]

    “?”

    HPㄱ? HP가? HP가 뭐? 편지를 뒤집어 봐도 아무 말도 없었다.

    네드 님이 편지를 쓰다 귀찮아서 그냥 보낼 사람은 아닌데?

    그건 둘째치고 ‘지나치게 강한 데미지’? 내 스펙 들고 티가 날 만큼 데미지를 받았다고?

    “유네리아에 그런 몹은 없는데?”

    난 최고레벨 던전에서 가만히 있어도 안 죽는 사람이었다. 몬스터가 주는 데미지가 간지러워서.

    “그래서 용의 HP가 어쨌는데?”

    용이 죽는 거야 별문제 없다. 불쌍하긴 한데 다시 살리면 되니까.

    네드 님 말마따나 먹이 맛있는 거 많이 주면 된다.

    근데 편지가 끊긴 것도 수상하고…….

    무슨 일로 끊겼는진 모르겠지만 모르는 동네로 가신 데다가, 용이 죽었으면 네드 님은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도 모를 거다.

    용 살리는 법을 뉴비가 알 리가 없잖아.

    ‘회생의 물약’은 하나를 만들기 위해 무려 각각 다른 제조 스킬을 7번이나 따로 써야 하는 극악의 제조식을 자랑하는 물건이니까.

    “…….”

    편지를 탁 접은 난 상태창을 펼쳤다.

    [이름 : 유니 / Lv. 140]

    빨리 300 찍고 내 뉴비 주우러 가야겠다.

    메인 스토리고 뭐고 길 잃은 뉴비가 머나먼 타지에서 헤매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 * *

    뒤로 올려 묶고 있던 머리는 풀었다.

    네드 님의 패션센스에 기인한 남녀공용 메디카 제복도 벗어 던졌다.

    그 대신 입은 건 하얀 드레스였다.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로 나풀나풀한 드레스류는 아니었다.

    그냥 옷자락 끝에 검은색 라인으로 포인트만 줘서 심플해 보이지만 굉장히 활동적으로 보이는 드레스였다.

    사실 200레벨 대 마을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은 내 취향하고는 좀 동떨어진 촌스러운 부류였지만 이 옷은 그나마 봐줄 만해서 샀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

    “이래야 좀 사냥할 맛이 나지.”

    난 겉옷 탭에 입은 드레스를 재차 확인했다.

    레벨업을 많이 하면서, 갑옷을 입지 않은 유저는 한 방에 골로 보낼 수 있는 몬스터들이 슬슬 출현하고 있었다.

    이 동네의 갑옷 센스는 굉장히 흉흉해서 그 어떤 멋지게 생긴 캐릭터도 갑옷만 있으면 철깡통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적어도 레벨 100 이후부터는 겉옷 탭 사용이 필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리아GM이 이야기 안 해 줘서 몰랐는데 갑옷 입은 채로 움직이면 겁나 무겁다.

    쓸데없이 이런 것만 디테일하게 만들지 말라고, 어?

    [유니 / Lv. 248]

    레벨도 많이 올렸고 슬슬 마을 가서 다시 보급할 시간이다.

    포션도 좀 사고, 장비도 슬슬 수리할 때가 됐는데…….

    그러고 보니 불쑥 걱정되는 것이 또 네드 님이었다.

    “네드 님…… 잘 입었겠지?”

    나랑 캐릭터 데이터가 맞바뀌었잖아.

    나는 네드 님이 당시에 입고 있던 옷이 남녀공용 옷인 메디카 제복이라서 여자 캐릭터인 나도 그대로 입은 채 이 세계에 떨어질 수 있었다.

    근데 난 에이리 님 만날 때만 입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튕겨 버렸다.

    그러니 네드 님이 그 데이터를 그대로 받았다면…….

    “오.”

    난 이마를 짚었다.

    어쩌면 네드 님은 그 놀라운 기럭지와 얼굴 외형을 가지고 드레스를 입은 채 여기 떨어졌거나, 아니면 벗은 채로 네리아GM이랑 대화를…….

    참혹한 상상을 이어가던 난 눈을 감아 버렸다.

    네드 님이 부디 내 아이디로 속옷 탭에만 옷 장착하고 겉옷 탭은 안 입고 다니고 있진 않기를 빈다.

    그리고 부디, 부디 네드 님도 내 아이템창 어디 구석에서 공용 제복 찾아 입으셨길 바란다.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 자네 왔는가? 오늘따라 자네의 기운이 유달리 강인해 보인다네.”

    대장간 NPC가 내 옷을 받아들며 말했다.

    내가 대장간에 들어설 땐 일어나지도 않더니 장비 받아들 땐 세상에서 제일 공손한 손짓으로 받아들었다.

    하긴, 이해한다. 사람 공손하게 만드는 가격이죠, 그거?

    “자네는 어떻게 하면 이런 장비를 이렇게 험하게 쓸 수 있나, 응? 좀 더 곱게 쓰고 여기에 기름칠도 하고…….”

    “안 돼요. 갑옷 정비하는 법은 배우지도 않았어요.”

    난 스킬창을 켜서 미습득 스킬을 확인했다.

    내용이 많아 내리기도 피곤할 정도로 작은 스크롤을 내리자 중간쯤에 ‘갑옷 정비’라는 스킬이 보였다.

    이런 생산직 스킬까지 다 올릴 시간은 없다. 빨리 300부터 찍는 게 급선무였다.

    [지나치게 강한 데미지를 받고 있고, HP 회복 속도가 너무 빨라 제가 잡기에는 숙련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후퇴하였습니다.]

    ‘용의 HPㄱ’로 편지가 끊기고 나서 아직도 편지는 오지 않았다.

    벌써 하루 반나절이 지났는데 네드 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

    처음엔 뭔가 오류가 났나 싶었는데 이제는 점점 확신이 생겼다.

    네드 님은 뭔가 편지를 하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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