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유네리아 대륙의 크리스탈은 다섯 개다.
그중 하나는 내 아이템창에 곱게 잠들어 있고, 하나는 네드 님이 뽑으러 가셨으니 세 개만 더 뽑아다가 합쳐서 한 번에 파괴하면 된다.
스토리가 조금씩 바뀌었다곤 하는데 지금까지 진행해 본 결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진 않았다.
다섯 개 크리스탈이 모이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가장 어려운 건 그거다.
“네드 님이 크리스탈 들고 무사히 찾아올 수 있을까?”
…….
“그냥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해야겠다. 내가 날아서 가야지.”
레벨 250부터는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좀 크게 상승한다.
‘유네리아는 반만렙부터다.’ 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엿 같은 경험치량을 자랑한다.
레벨업 열심히 해서 네드 님 주워오려면 용을 타야 하니까 적어도 300은 넘어야 하는데, 용이 300부터 바로 말 듣는 것도 아니고…… 아, 복잡하다.
“아냐, 그래도 네드 님이 직접 오는 것보단 낫지.”
직접 와 달라고 했다간 유네리아 미아가 되실지도 모른다.
역시 내가 레벨업해서 가는 게 빠를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요, 지갑은 무섭지만 귀여운 뉴비 님.”
여튼 네드 님은 네드 님이고, 내가 레벨 140을 찍자마자 온 곳은 교황청이었다.
그리고 이 교황청에서 모시는 신의 이름이 그러니까…….
“네리아…….”
생각하자마자 얼굴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자꾸 네리아GM이 생각나는데.
생각해보면 이 게임, 하는 유저는 더럽게 많은데 외부에 드러난 GM 이름이 네리아뿐이다.
설마 네리아교랑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하여튼 이 기분 더러운 네리아교의 교황청 가장 깊숙한 곳에 크리스탈이 있을 것이다.
게임 설정상 고대인들이 열심히 크리스탈을 숨겨놓았다지만, 그런 고생이 무색하게도 난 크리스탈 위치를 다 안다.
이게 바로 인생 2회차…… 아니, 캐릭터 다시 키우는 사람의 이점 아니겠어?
“…….”
행복회로 돌리다 보니 눈물이 났다.
이점 맞냐? 그냥 내 캐릭터 돌려주면 안 될까?
“어서 오십시오, 네리아 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아, 예.”
왠지 GM 축복받으라는 것 같아서 굉장히 찝찝하다.
저 축복의 가루랍시고 뿌리는 파우더도 어쩐지 네리아GM의 날개에서 흩날리던 푸른 파우더랑 비슷해 보인다.
[네리아 교황청에 진입합니다. 축복의 언어를 말씀해주십시오.]
“아…….”
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왠지 진리인 것 같지만 내 입으로 하기 참 민망한 말을 다시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하나가 들어가 둘이 나오는 기적이 늘 함께하기를.”
요컨대 둘이 들어가 셋이 나오는 기적이 아니라, 하나가 들어가 둘이 나오는 기적이다. 오해 없길 바란다.
커플 하나가 쪼개져서 솔로 둘로 나오길 원하는 지옥의 솔로교.
농담 아니다.
이 교황청 퀘스트는 지옥의 솔로 퀘스트로 유명했다.
애초에 이 교황청 자체가 솔로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네리아 교황청’에 진입합니다.]
다행히 네드 님은 돈도 있고 장비도 있지만 커플은 없는 훌륭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교황청에 입장하는 건 무리가 없었다.
내 캐릭터도 결혼한 적은 없어서 다행이다.
혹시 캐릭터 데이터 꼬인 것 때문에 둘 중 하나라도 결혼했답시고 입장 안 됐으면 그냥 교황청 문을 레이저포로 밀어 버리려고 했는데. 흠흠.
“안녕하세요, 유니 님! 저희 네리아 교황청에 오시는 건 처음이시군요.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나요? 기도실은 총 70실 중 49실이 비어 있답니다.”
대체 지옥의 솔로교 네리아교에 뭘 그렇게 빌러 오는 사람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난 기도실엔 관심 없었다.
이쯤 되면 선택창이 뜰 때가 됐는데?
기도실에 간다, 아이템 구매, 다른 용무가 있다 등등.
“…….”
“…….”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창은 뜨지 않았다.
나도 교황청 사제도 눈을 깜빡인 채 서로를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유니 신자님?”
“어, 네?”
NPC가 대화 재촉까지 하니까 묘하네?
“70층 중 49실이 비어 있답니다. 어디로 가시겠어요?”
“아니, 저 기도실 간다고 한 적 없는데.”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사제와 나 사이에 다시 어색한 기류가 지나갔다.
“그럼 아이템 구매를 하러 오셨나요?”
“아뇨, 아니, 그냥 갑자기 오늘 신앙심이 뻐렁쳐서요.”
“아…… 예. 돌아온 솔로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멋대로 오해하지 마라, 눈물 나니까.
난 내게 깊이 인사하는 사제를 뒤로하고 교황청 본관에 들어섰다.
* * *
원래 여기 퀘스트는 유저가 교황청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놈이 책을 산처럼 쌓은 채 뛰어가다가 유저한테 갖다 박으면서 시작된다.
그 책들 사이에 끼어 있던 수상한 물건이 떨어진 걸 유저가 주우면서, 이러쿵저러쿵 네리아교의 비리가 밝혀진다.
뭐 이런 허접한 내용의 시나리오인데.
“잠시만 지나갈게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책의 탑이 내게로 돌진해 왔다.
저놈이다!
반드시 갖다 박아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인지 책을 들고 있는 사제는 눈부신 속도로 질주해 왔다.
하지만 내 레벨이 여기 일곱 배인데 내가 그걸 맞아 줄 리가 없었다.
“아, 지나가십쇼.”
내가 옆으로 슥 피하자 사제는 그대로 지나갔다.
난 분명 지나가는 순간 사제의 얼굴을 봤다.
당황한 얼굴. 이게 아닌데? 얼굴.
“고생하세요! 그렇게 무거운 거 막 들고 다니면 허리에 안 좋아요!”
지옥의 솔로 네리아교의 사제니까 허리의 여러 가지 의미 중 하나는 쓸모가 없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허리는 중요한 법이다.
사제가 그렇게 쌩 지나가고 나서 난 그대로 교황청 안으로 진입했다.
* * *
난 게임을 오래 하면서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사실 NPC는 사람이 직접 조종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어떻게 저렇게 직업정신 투철하게 달려들 수 있지?
“오늘 많이 보네요!”
내가 인사한 건 다름 아닌, 그 책 탑을 들고 뛰어다니는 사제였다.
전에 퀘스트 깰 때야, 다짜고짜 퀘스트가 진행되어 버리는 바람에 저렇게 끈기 있는 NPC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차피 난 교황청의 크리스탈 위치를 안다. 그니까 교황청 퀘스트 안 깨고 크리스탈만 들고 튈 셈이었는데…….
―타다다닥!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긴박하다.
난 책 탑을 든 사제 NPC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옆으로 슥 피했다.
“!”
벌써 오늘만 네 번째였다.
넓은 복도가 나올 때마다 NPC는 어김없이 내 옆으로 뛰어와서 갖다 박으려고 했다.
사실 다시 뛰어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해서 두 번째 뛰어올 땐 부딪힐 뻔했다.
좀 많이 놀라긴 했는데 캐릭터 레벨 자체가 높다 보니 피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근데 그때 스쳐 지나가는 사제 NPC의 표정이 오기에 물들어 있는 걸 무시한 결과가 이거였다.
“얼른 크리스탈 갖고 내빼야겠다.”
교황청 밖으로 나가도 쫓아올 기세였다.
난 고개를 흔들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제 교황청 중심부라서 아까 그 사제 같은 말단은 들어오지도 못한다.
난 조금 마음을 놓은 채 걸음을 옮겼다.
“!!!”
그때 사제가 다시 옆에서 튀어나왔다.
근데 사제의 손에는 책 대신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유저가 원래 발견해야 하는 물건.
“얍!”
사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냉큼 내 앞으로 펜던트를 집어 던졌다.
뭐야, 장갑 대신 펜던트 던지는 건가? 한 판 붙자고?
근데 그런 것치고는 뒤에 액션이 없었다.
날 더러 어쩌라고? 주우라고?
“아하.”
발견하고 반응해 주길 바라는 거로군.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난 펜던트를 못 본 듯 그냥 지나가 버렸다.
퀘스트 안 할 거라니까.
이단자는 너희들끼리 잡으세요.
어차피 네리아교에서 이단자라고 해 봐야 사내 커플(?) 아니냐?
“????????”
난 당황하는 NPC 앞을 슥 지나와 버렸다.
교황청의 구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교황청을 넓게 둘러싸는 그 빌어먹을 숲, 그 안쪽의 본관, 아주 좁은 공간이지만 지하로 미로가 연결되어 있는 중심부.
원래 유저는 네리아교의 이단자를 잡으면서 우연히 들어간 미로 중심부에서 크리스탈을 발견하게 된다.
“아우, 먼지.”
내 캐릭터도 이렇게 먼지 좀 마시면서 들어갔겠지?
새삼 미안해지네.
컴퓨터로 볼 때와 미로를 실제로 들어오는 건 느낌이 아예 달랐다.
절대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것 없을 것 같은 텁텁한 공기다.
화면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들어온 거라 몇 번 헤매긴 했지만, 한 번 가닥을 잡자 금세 익숙한 장소가 나왔다.
“이거 같은데.”
미로 한가운데 뚫린 공터.
그 가운데에는 대놓고 낡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인간적으로 퀘스트 템인데 숨기려면 땅에 묻어 놓는 정성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쯧…….”
하여간 설정 엉터리로 한 건 알아준다.
얼른 갖고 가야겠다.
상자를 벌컥 열자 하얀 책이 보였다.
“응?”
하얀 책이라고? 크리스탈이 아니고?
“이건 뭐야?”
난 책을 덥석 집어 들었다.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밑에 크리스탈 깔렸나 싶어서.
근데 그런 건 없었다.
“뭔데, 이게?”
[네리아교 성전]
“…….”
난 왠지 커플이 깨지는 101가지 방법이 쓰여 있을 것 같은 성전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때 미로 한구석이 시끄러워지면서 불빛 여러 개가 근처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