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2)
  • <6화>

    [안녕하세요, 네드 님. 전 유니라고 합니다.]

    아니, 어차피 우편 처음에 유니라고 뜰 텐데 굳이 NPC처럼 자기소개하지 말자.

    [안녕하세요, 네드 님. 혹시 저번에 던전 앞에서 활 준 사람 기억하시나요?]

    “…….”

    저 다단계 아닙니다. 옥장판 안 팝니다.

    그래도 왠지 실제로 펜 들고 쓰고 있자니 자기소개 안 하기가 뭐했다.

    [안녕하세요, 네드 님. 전 유니라고 합니다.

    혹시 저번에 던전 앞에서 활 준 사람 기억하시나요? 제가 그 사람인데……

    운영자한테 상황 전해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운영자 진짜 일 못 해요 아 진짜 어떻게 구슬 하나 바뀌었다고 사람 데이털욺ㄴㄹㄷㅁ너롱ㄹ]

    줄을 찍찍 긋자 막 쓴 부분은 지워졌다. 거참 편한 시스템이다.

    [운영자한테 상황 전해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뭔가 저 때문에 번거로운 상황에 처하신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사실 죄송스러워야 하는 건 네리아GM이었지만 그 빌어먹을 운영자가 그런 상식적인 말을 해 줬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써 주었다.

    “그래, 뉴비가 무슨 죄가 있겠어…….”

    가장 큰 죄는 운영자한테 있고 조그만 죄는 구슬 바뀐 거 안 바꿔 간 기존 유저인 나한테 있지.

    뉴비는 죄가 없다!

    뉴비란 이유로 모든 게 다 용서된다!

    우리 네드 님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도 역시 유네리아 골수 유저는 맞는지 상대가 뉴비라고 생각하니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음유시인 NPC한테 북쪽 몬스터 섬 쓸어버렸다는 얘기 들었어요.

    저희가 이 세계를 빠져나가려면 대륙을 구해야 하잖아요? 사실……]

    근데 크리스탈 얘기 이거 스토리 스포일러하는 건데.

    뉴비한테 이래도 되나?

    잠시 고민했던 난 금방 고민을 접었다.

    어차피 북쪽에 있으면 북쪽의 가장 큰 성에도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 성주는 크리스탈을 못 찾아 혈안이 된 NPC다.

    그 동네 있으면서 크리스탈 얘기를 하나도 못 들었을 리는 없다.

    [저희가 이 세계를 빠져나가려면 대륙을 구해야 하잖아요? 그게 크리스탈을 모아야 하는 거거든요?

    근데 그 크리스탈 중 하나가 그 쓸어버리셨던 섬에 있어요. 섬 어디에 있냐면]

    난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편하게도 내가 있는 위치와 좌표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좋았어.

    [섬 있는 맵에서 좌표 X177 Y887 Z131 근처에 가보시면 버려진 마을 같은 거 있는데, 거기 구석에서 커다란 붉은 지붕 집 옆으로 무슨 길 같지도 않은 길 들어가면 공터가 나와요.

    거기 땅 파보시면 크리스탈 있거든요? 그거 아이템창에 넣어 놓고 계실 수 있을까요?

    깨뜨리시면 안 돼요!]

    난 깨뜨리면 안 됨을 강조했다.

    크리스탈을 깨뜨리면 그야말로 대재앙이 일어날 테니까. 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네리아 PC버전에서 크리스탈을 부순 유저의 말로를 생각하면서.

    * * *

    유명 커뮤니티 유네리아 게시판에 있는 어떤 유저가 메인 스토리 진행 도중에 크리스탈을 깨부순 적이 있었다.

    그놈은 그 캐릭터로는 스토리 진행이 안 된다고 툴툴거렸다.

    [그럼 문의 넣어 고쳐주겠지]

    커뮤니티 사람들의 반응은 일관되었다.

    하지만 운영자한테 문의하자 답변이 왔다고 올려놓은 게 가관이었다.

    [안녕하세요, 땡땡 유저님.

    크리스탈 하나를 먼저 깨뜨려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문의 주셨군요. ^^

    저희도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 참 애석합니다^^

    다음의 안내를 따라 주시면 신속하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글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네리아 공식 홈페이지 > 고객센터 > 캐릭터 데이터 > 캐릭터 삭제]

    한마디로 캐릭터 삭제하고 다시 하라는 소리였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대응은 유네리아 관련 커뮤니티뿐만이 아니라 온갖 커뮤니티 유머 게시판을 떠돌아다니며 화제가 되었다.

    그 유저는 어이가 없어서 유얼머니게임즈 본사까지 쫓아갔지만 결국 몇 달 후 근황을 들어 보니 크리스탈 깬 캐릭터 버리고 새로 키우고 있다고 했다.

    결국 해결 안 해 줬다는 소리다.

    “어우.”

    난 몸서리를 쳤다.

    네드 님이 뭣도 모르고 그렇게 크리스탈 깼다간 우린 영영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크리스탈 깨지 말라는 말에 밑줄에 별표까지 쳤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유니 드림]

    써 놓고 뭔가 찜찜해서 추신을 달았다.

    [p.s. 캐릭터 레벨 업 하는데 갖고 계신 물건 써도 되나요?

    사실 좀 쓰긴 했는데ㅠㅠ 제가 나중에 캐릭터 데이터 돌려받으면 수리비랑 다 배상해 드릴게요ㅠㅠ]

    맘대로 써서 죄송합니다!

    물론 근황 듣자 하니 네드 님도 제 장비 실컷 쓰고 계신 것 같지만 여튼 말씀은 드려야겠다.

    무려 토르의 검을 몰래 써 놓고 차마 입 쓱 닦을 수는 없잖아?

    [‘네드’님께 우편을 발송하였습니다.]

    우편을 보내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은행으로 향했다.

    켄이 준 돈주머니가 생각보다 좀 무겁다. 은행에 좀 박아 놓고 다녀야겠다.

    * * *

    “허허…….”

    사실 좀…… 기대하긴 했다.

    장비 아이템 스탯이 모두 네드 님 걸로 바뀌었다고 해도 내 닉네임과 외형은 유니 때 그대로였으니까.

    그래서 은행에 들어설 때까지 난 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은행 NPC는 나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안녕하십니까.”

    하지만 은행 NPC는 날 보더니 어깨부터 딱딱하게 굳어 인사했다.

    누가 봐도 우리 낯선 사이다.

    내가 전에는 이 성 은행 NPC랑 호감도 MAX 찍어서 어깨동무까지 하는 사이였는데.

    나 VIP였잖아요. 그래서 나 은행 수수료 다 깎아 줬잖아요.

    왜 그런 낯선 눈으로 날 보세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말투까지 아주 깍듯하다.

    그래, 당신마저 날 못 알아본다 이거지?

    NPC는 심지어 눈에 띄게 긴장까지 하고 있었다.

    이 은행 NPC인 엔과는 친해진 지가 한참 돼서 엔이 원래 처음 손님을 어떻게 맞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원래 이런 딱딱한 성격이었나?

    “금고에 돈 좀 맡기러 왔어요.”

    난 결국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뒤로 돌렸다.

    뒤에 있는 수많은 사물함 중 하나를 열 생각인 거겠지.

    하지만 엔은 뒤도는 대신 카운터 아래의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가시지요.”

    “?”

    가? 어딜? 설마 네드 님은 은행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건가?

    아니, 은행에 처음 온다고 해도 갑자기 은행 NPC가 유저를 어디 데리고 가기도 하나?

    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누르며 엔을 따라갔다.

    엔은 은행 카운터 뒤쪽의 좁은 길로 나를 안내했다.

    유네리아를 10년 동안 하면서 별 쓸데없고 엿 같은 컨텐츠까지 하나하나 다 타파한 나였지만 은행에 이런 으슥한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뭐지? 돈 맡기러 왔다가 뒤통수 맞고 기절하는 전개인가?

    슬슬 불길해지자 난 슬쩍 아이템창을 띄웠다.

    여차하면 토르의 검 들고 다 때려눕히고 튈 생각이었다.

    뉴비 스펙으로 돌아오니까 별짓을 다 해 본다.

    내 캐릭터면 누가 뒤통수를 쇠빠따로 후려갈겨도 느낌도 안 왔을 텐데, 이 HP 상태면 잘못 맞았다간 골로 가기 딱 좋다.

    그럼 네드 님이 날 찾을 때까지 죽은 채로 여기에 엎어져 있어야 한다.

    그런 건 딱 질색이다!

    “도착했습니다.”

    난 침을 꼴깍 삼켰다.

    네드 님 캐릭터의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낮아서 그런지 어두운 곳에서는 시야가 잘 잡히지 않았다.

    엔의 목소리와 함께 무슨 소리가 함께 들렸다.

    ―철컥.

    뭐지? 수갑인가? 아니면 쇠사슬? 막 묶이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이러저러하고 이쿵저쿵한 것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갑자기 눈앞에 있는지도 몰랐던 문이 활짝 열렸다.

    ―파앗!

    그리고 그 안에서, 주황빛치고는 너무 밝고 노란빛치고는 너무 석양에 가까운 빛이 확 터져 나왔다.

    그걸 본 난 눈이 부셨지만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헐.”

    “용건이 끝나시면 문을 세 번 노크해주십시오.”

    엔이 문 안에 들어가 있는 날 내버려 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난 눈앞에 쌓인 황금산을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네드 님, 그냥 돈이 무거워서 안 들고 다니셨던 거였구나.”

    내 앞에 있는 황금산은 모두, 네드 님이 은행에 맡겨둔 금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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