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12)
  • <5화>

    마을 주변의 나무가 와장창 꺾인 거 말고 마을에 피해는 없었다.

    레이저포로 깔끔하게 절삭 된 나무는 초보 마을의 올겨울 땔감이 되어 난 오히려 칭찬까지 받았다.

    “읏챠.”

    마을 사람들이 신나서 땔감 정리를 하는 동안, 난 마을에 숨겨져 있는 크리스탈을 파냈다.

    “원래 스토리 맨 마지막에 돌아와서 찾아와야 하는 물건이지만.”

    어차피 내가 나중에 가져갈 물건인데 미리 얻는다고 뭐 달라지겠어?

    촌장 할아버지가 생색내며 파티를 열 준비를 하는 동안, 난 몰래 마을을 떠날 채비를 했다.

    어차피 이 레벨 대 마을에서 주는 음식이면 뻔했다.

    음식에도 레벨 제한이 걸려 있는 게임이니까 뉴비들이 오는 이 마을에서 맛있는 걸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식빵 몇 개만 가져다 아이템창에 넣어 놓은 참이었다.

    “모험가님!”

    아는 목소리다. 돌아보니 켄이었다.

    난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아, 맞아. 켄이 있었지.

    그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도와준 보람이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켄은 멀리서 뛰어왔는지 헉헉거리고 있었다.

    “마을을 떠나시는 겁니까?”

    “네.”

    “파티를 즐기시지 않고…….”

    “원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

    내가 볼을 긁적였다.

    차마 이 착한 NPC에게, ‘당신네 마을 레벨 대가 낮아서 음식 맛없을 게 뻔히 보여서 튄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셨군요. 그럼 대신 이걸 들고 가 주시겠습니까?”

    켄이 준 건 약간의 현금이 든 주머니였다.

    네드 님이 게임머니는 별로 안 샀는지 마침 없어서 문제였는데.

    내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봤는지 켄이 웃었다.

    “모험가분들께는 현금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모험가 말고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인데요?

    하지만 난 굳이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죠. 사실 그 몬스터들 다 막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검을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켄한테 또 이런 설정이 있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유네리아. 게임 엉터리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네.

    그럼 원래 스토리 대로라면 켄은 얼마 배우지도 않은 검을 들고 마을 지키겠다고 기 쓰다가 왼팔 잘린 거야?

    헐.

    그러고 보니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마지막에 다섯 번째 크리스탈을 찾으러 온 이 마을에서 켄의 무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도 그걸 에이리 님이 알려줘서 알았다.

    누가 묻었는지 모르겠지만 투박하고 넓은 돌에 [켄]이라고만 간신히 음각되어 있는 초라한 무덤.

    요컨대 모험가가 스토리 깰 동안 켄은 어디 가서 죽어 버린다는 소리다.

    세상에.

    “몸 건강히 잘 있으셔야 해요.”

    갑자기 솟아오른 측은지심에 내가 켄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말했다. 켄이 얼굴을 붉혔다.

    “꼭 그러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뵙고 은혜를 갚을 때까지요.”

    살아 있는 게 은혜 갚는 겁니다, 착한 NPC 양반.

    게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경우 있는 NPC 켄을 뒤로하고, 난 마을을 떠났다.

    * * *

    마을을 떠난 후 계획을 세웠다.

    일단 최대한 빨리 레벨업해서 초보존을 벗어난 다음 네드 님과 만난다.

    원래대로라면 레벨업 하는 데 한참 걸렸겠지만…….

    “물건 좀 빌리겠습니다, 네드 님.”

    내 손에는 네드 님이 잔뜩 사 놓은 레전드급 끝장판 무기가 들려 있었다.

    “이야…… 이걸 내가 실물로 보게 될 줄이야.”

    별걸 다 사 놨다.

    심지어 네드 님의 아이템창에는 내가 사고 싶어서 맨날 거래 사이트를 뒤져도 없던 ‘토르의 검’까지 들어 있었다.

    원래 ‘레살라토르의 검’이었지만 검의 특수효과가 번개라서 그냥 유저들은 토르의 검이라고 불렀다.

    이런 특수효과가 붙은 아이템은 본디 귀한 아이템이다. 특히 옵션에 ‘마비’가 붙은 이런 검은 더더욱.

    오죽하면 집 한 채는 팔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냐며, 별명이 ‘집판검’이었다.

    토르의 검은 공격할 때마다 주변에 번개가 튀어서 번개 마법데미지도 같이 먹이는 게 특징이다.

    근데 여기에 마비 효과가 붙으면?

    “캬…….”

    그런 아이템을 사용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감탄이 나왔다.

    마비 효과는 몬스터가 쩡 하고 돌덩이처럼 굳어서 튕겨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옵션이었다.

    한마디로 이 마비 효과가 붙은 토르의 검을 대고 있기만 해도 토르가 강림한 것처럼 미친 번개 공격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서버에 하나밖에 없다는 마비 붙은 토르의 검이 어딜 갔나 했더니…….”

    네드 님, 대체 얼마나 돈을 쓰신 거예요?

    상상하는 게 두려울 만큼의 액수가 떠오르자 난 생각을 멈췄다.

    어쨌든 이딴 사기템이 널린 아이템창을 들고 레벨업을 못하면 그게 바보였다.

    네드 님이야 장비 레벨 제한 때문에 천천히 키울 수밖에 없었겠지만 난 레벨 제한이 없잖아?

    “네드 님, 죄송하지만 좀 쓸게요.”

    어차피 나랑 정보 바뀐 네드 님도 지금쯤 내가 끼고 있는 장비 아이템을 본의 아니게 신명 나게 쓰고 계실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나면 템 좀 빨리 바꾸자고 해야겠다.

    집판검급 물건을 몇 개나 들고 있는 아이템창, 탐나긴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마찬가지였다.

    [유니 / Lv. 98]

    여튼 덕분에 레벨업은 순조로웠다. 벌써 레벨이 91이나 올랐으니까.

    “메인 스토리 하기 싫은데 하긴 해야겠지.”

    난 빌어먹을 촌장 할아버지를 생각했다가 한숨을 쉬었다.

    유네리아를 시작하는 유저들이 가장 처음으로 보는 있어 보이는 동네, ‘테리반 성’에 도착한 건 그날 오후였다.

    “탑승용 펫도 한 마리 없다니.”

    놀랍게도 네드 님은 그 비싼 걸 다 사 놓고도 말 한 마리 안 사 놨기 때문에, 나까지 본의 아니게 뚜벅이 신세였다.

    내 원래 캐릭터 데이터만 있었으면 용이나 거대한 박쥐를 타고 하늘을 날아 일이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덕분에 한참 동안 걸었다.

    “테리반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경비병이 뭐라고 하는 걸 흘려들으며 성안으로 진입했다.

    내 기억대로라면 여기서 두 번째 메인 스토리 퀘스트가 시작된다.

    레벨이 한 5쯤 되면 진입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 성 여관인가 어딘가에 NPC가 처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음유시인인가 뭔가 하는 놈이었을 거다.

    스토리상 지금 유네리아 대륙은 가라앉고 있는데, 그게 내 아이템창에 들어 있는 이 크리스탈 때문이다.

    그래서 대륙 각지에 흩어진 크리스탈을 한 자리에 모아 이세계의 문을 열고, 그냥 거기로 크리스탈을 몽땅 던져 넣고 대륙을 구하는 게 메인 스토리다.

    그리고 그 스토리의 서막을 열어 주는 NPC가 바로 저 음유시인이었다.

    왜, 그런 흔한 전개 있잖아. 옛날얘기 해 주는 음유시인.

    “저기 있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덕지덕지 기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음유시인은 여관 로비 구석에서 수상쩍게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노래 한 곡 들려주시겠어요?”

    내가 쿡쿡 찌르자 음유시인이 바로 반응했다.

    역시 NPC다운 반응이었다.

    “내 노래를 듣고 싶은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금전을 건넸다.

    이놈은 금전을 주지 않으면 입도 열지 않는 악명 높은 NPC로 유명했으니까.

    “크흠.”

    아니나 다를까 금전을 받고 나서야 음유시인은 아에이오우 하며 입을 풀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크리스탈 얘기나 하겠지, 뭐. 난 지루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전설의 전사 네드는 맨손으로 땅을 가르고…….”

    뜬금없이 아는 닉네임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네? 누구?

    “전설의 전사 네드는 맨손으로 땅을 가르고 던전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을 구했답니다.”

    “네, 네드가 누구죠?”

    설마 내가 아는 그분?

    내가 네드라는 이름에 관심을 보이자, 내가 네드 님 팬인 줄 알았는지 음유시인은 상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글쎄, 대륙 북쪽에…….”

    초보 마을이 있는 곳은 대륙 서쪽.

    대륙 북해에는 매우 추운 군도가 있다.

    날이 추워지면 아예 그 근처가 꽁꽁 얼어붙어 대륙 본토하고 연결되는 곳.

    그때마다 북쪽에만 사는 강한 몬스터가 대륙 본토까지 내려와 인간들에게 피해를 준다.

    하지만 이제는 네드 님이 그걸 다 쓸어 버려서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

    그것도 맨손으로 쓸어 버렸다고 한다. 무기 하나도 안 끼고.

    “와…… 대단하네요…….”

    난 영혼 없이 감탄했다.

    당연하다.

    네드 님이 들고 있는 내 스펙과 장비면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거기 계시지?”

    심지어 내 캐릭터는 메인 스토리도 다 깼잖아.

    아니, 네드 님도 여기 떨어졌으니까 메인 스토리 새로 받았으려나?

    그럼 초보 마을에 있어야지 왜 대륙 반대편에서 저러고 있지?

    “아…….”

    난 내 아이템창에 고이 모셔져 있는 메디카 제국의 제복을 보고는 납득했다.

    본래 국적대로 메디카 제국에서 시작된 모양이다.

    그럼 국적이 서쪽 알라반인 나랑은 다른 곳에서 시작될 수밖에.

    시작 국적이 메디카라니, 켄의 스윗함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게다가 길치셨지…….”

    여튼 메인 스토리는 어디서 하는지 모르겠으니 발 닿는 대로 가서 때려 부수고 계시는 네드 님 근황은 잘 들었다.

    문제는 네드 님이 스토리를 모르니 그 북쪽 섬에 있는 크리스탈을 뽑았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처럼 스토리를 꿰고 있는 사람이면 어차피 찾으러 갈 크리스탈 미리 뽑아야징! 하고 뽑았을 텐데.

    “잘 들었어요.”

    여튼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건 알겠다.

    네드 님이 다 쓸어버린 덕에 한동안 북쪽에서 몬스터가 내려올 일은 없겠지만, 크리스탈을 뽑기 전엔 몬스터 생성을 근절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난 길가 구석에 서 있는 우편함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리아GM…… 네드 님한테 메인 스토리 안내도 안 해 줬나 보지?

    그게 이 게임의 뉴비를 대하는 방식이야? 응?

    “아니, 잠깐만.”

    난 우편함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차피 게임 내의 우편이다.

    닉네임만 알면 네드 님한테도 우편 보내기가 가능하다.

    네리아GM이 아무리 일을 못 한다고 해도 뜬금없이 게임 세계에 떨어진 네드 님한테 아무런 언질도 안 줬을 리 없다.

    그럼 나랑 캐릭터 바뀐 건 알고 계실 텐데.

    “우편 보는 법은 아시려나?”

    난 우편함을 만져 창을 띄웠다.

    이거 잘하면 쉽게 스토리 깰 수도 있겠는데?

    모로 가도 대륙만 구하면 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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