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연지곤지]
네리아GM에게 편지를 보낸 후.
“마을에 위기가 닥쳤다네. 자네 같은 건실한 모험가가 필요해.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는가?”
이건 내가 마을로 나가자마자 어떤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가 날 붙잡고 한 말이었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는 아니었고, 내가 까마득히 옛날 뉴비일 때 봤던 할아버지였다.
잡몹들한테 쓸려나가는 마을의 촌장 할아버지.
유네리아의 모든 유저들이 입을 모아 하는 소리가 있다.
[그때 초보 마을 할아버지만 안 도와줬어도 모험가가 이렇게 호구잡히진 않았을거임]
내 마음이 딱 이거였다. 이 할배가 유네리아 스토리 대재앙의 시작이었으니까.
“싫은데요?”
초보 마을은 지뢰다.
메인 스토리 내용이 바뀌었다더니 마을 내부 풍경을 대충 둘러본 결과 거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대표적으로 이 마을 설정 같은 거.
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무기 창고에는 낡고 녹슨 무기밖에 없는 이 마을에 몬스터가 쳐들어온다.
그리고 마을 청년들은 무기 살 돈을 들고 튀어 버리고 그 덕에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죽으면서 시작되는 게 이 게임 스토리였다.
이 할아버지 덕에 그 한가운데에 휘말리는 게 유저 역할이고.
난 그 호구 짓을 두 번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얻어야 할 물건이 어딨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난 그냥 그것만 들고 튈 셈이었다.
“응?”
할아버지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 지금까지 댁 앞을 지나간 수많은 모험가가 그랬듯이 나도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겠지.
하지만 할아버지, 그건 그냥 유저들의 속마음은 무시한 채 캐릭터가 고개를 끄덕이게 설정되어 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자네가 이 마을을 무시하면 이 마을의 모두는 몬스터들에게 처참하게 밟혀서 죽을 거라네.”
그때 할아버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 옆집 애들은 일곱 살밖에 안 됐고, 나는 이제 자식놈들 독립해서 내 삶을 좀 찾으려고…….”
아니, 이런 디테일한 설정까지 있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내가 마음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물었다.
“하지 않겠는가?”
하긴 뭘 해! 난 몸을 홱 돌렸다.
“안 사요.”
“도와주면 이걸 주겠네!”
할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자 내 앞에 보상 아이템이 떠올랐다.
보상 아이템은 누가 한 오륙 년은 실컷 썼는지 손때가 가득한 낡은 검이었다.
난 아이템창을 켜 본 다음 1초 만에 거절했다.
“안 해요.”
“잘 들어 보게. 자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채 빛도 못 본 마을의 아이들이…….”
“아, 그거 댁네 손자가 숲에서 괴상한 크리스탈 주워 와서 몬스터 몰려오는 거잖아!”
스토리 다 깬 사람 얕보지 마라!
그리고 내가 안 도와준다고 나 때문에 죽는 것처럼 멀쩡한 사람 가해자로 만들지 마!
“……흠흠.”
역시 그 엿 같은 설정도 안 바뀌었나 보다.
길 가던 멀쩡한 놈 세워다 자기네 손버릇 더러운 손자 놈 뒤처리를 시키려던 할아버지는 아픈 듯 숙이고 있던 허리를 멀쩡하게 폈다.
어쭈?
그때였다.
―와장창!
마을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유저 캐릭터가 퀘스트 수락을 하고 나서 진행되어야 하는 이벤트였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내 앞에 떠 있는 퀘스트창의 [마을을 돕겠습니다] 버튼을 마음대로 누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남의 거 맘대로 건들지 마!
뒤늦게 몸을 틀었지만 이미 버튼은 눌러진 후였다.
할아버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허리 아픈 할아버지로 돌아가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겠네……. 부탁하네, 모험가……!”
“아련한 목소리로 배웅하지 마, 망할!”
난 결국 마을 외곽으로 움직였다.
이 마을 도와주는 기분은 절대 내기 싫었다. 일부러 마을 멀리에서 몬스터를 소탕할 생각이었다.
“잠깐, 거기! 저쪽은 몬스터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위험해요!”
그때 누가 날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웬 남자 NPC가 검을 든 채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
맞다, 이 마을에 얘가 있었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개념 있는 놈!
“전 켄이라고 합니다.”
급한 상황에 꼭 자기소개하는 NPC들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그가 말했다.
“저쪽은 위험하니까 제가 맡겠습니다. 어떻게 외부인에게 가장 위험한 곳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① 켄에게 이곳을 맡긴다
② 아니다, 함께 이곳을 처리하고 가자]
선택 창이 떴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을 맡기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난 유일하게 개념 찬 이 켄이라는 NPC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여길 혼자 맡은 켄은 몬스터를 다 막는 대신 왼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거든.
유네리아는 초반부터 참 하드하게 전개되는 게임이다.
난 [아니다, 함께 이곳을 처리하고 가자]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됐……”
“거절하지 마십시오.”
살짝 묵례한 켄이 멋대로 손을 뻗어 [켄에게 이곳을 맡긴다]를 선택해 버렸다.
“어?”
내가 벙쪄 있는 사이에 그는 앞으로 뛰어갔다. 이미 몬스터는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봄?
벙찐 것도 잠깐, 난 결국 아이템창을 열었다.
내가 유네리아 처음 할 때 켄 왼팔 잃은 거 보고 얼마나 울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순 없지.
다행히 네드 님은 나랑 비슷한 과의 사람이었다.
요컨대 꾸미기용 아이템은 나중에 사고 스펙에 필요한 무기부터 주르륵 사는 스타일.
문제는 레벨 제한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아이템창에는 만렙인 레벨 500 때나 낄 수 있는 수준의 레전드급 장비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까 네리아GM의 편지 말미에 써서 보낸 내용은 이거였다.
[아이템 착용 레벨 제한을 해제해 주세요.]
사실 안 될 줄 알았다. 뉴비가 사기템 들고 설치면 안 되니까.
그래서 뒤에 불쌍한 듯 페이크도 쳐 놨다.
[여기 음식에도 레벨 제한 있잖아요.
레벨 백은 넘어야 맛있는 거 먹을 텐데 운영자님들 진짜 너무하시네요]
그 덕인지 그냥 GM들이 생각이 없는 건지 아이템 착용 레벨 제한이 풀려 있었다.
난 아이템창에 있는 500렙제 레이저포를 들고 켄의 어깨를 잡았다.
“저리 비켜요.”
그렇게 한 마리씩 때려잡아서 언제 잡아요, 그죠?
레이저포의 안전핀을 푼 내가 켄에게 찡긋했다.
―찌이이잉! 쿠구구궁!
그리고 곧, 초보 마을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유네리아 공학의 끝장판인 레이저포가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