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100화 (100/100)

100화

“이 건물이 무너지면 아래 지대를 산사태처럼 덮칠 가능성이 크답니다. 토대를 허술하게 쌓았다면 백 퍼센트고요.”

차를 세우고 다가온 민철이 까마득히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는 수아에게 말을 건넸다.

높은 지대에 세워진 36층의 건물은 부신 건설 소유로, 완공 후 입주 직전 부신 비리가 터지는 바람에 빈 상태였다.

무너진 건물, 뚫린 벽을 통해 보이던 아찔한 지상, 그리고 그 앞에서 윤성의 머리를 내려치던 천부신…….

예지대로였다면 분명 이뤄졌을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할까. 그런 악인에게 윤성이는 이제껏…….

마음이 무거워진 그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쥐고 가슴에 올리자 민철이 어색하게 위로했다.

“윤성 군은 무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이사님이죠. 곧 경찰이 도착할 텐데 제발 수습 가능한 선으로 해결해 주셔야 할 텐데요.”

화희가 들어간 지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몰려들어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중에서도 유독 건물 위쪽에만 새카맣게 어둠이 드리워지고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붉은빛이 번쩍였다.

놀란 수아가 건물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따라오던 민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만요! 저, 저게 뭔- 으아악!”

옥상에서 검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사람의 인영이었다.

찰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간절히 빌며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이번만은, 제발.

반드시 아이를 지켜 주세요.

자신이 절박하게 무엇을 빌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사람이 윤성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내면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 기도였다.

그러나 인영은 그대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고, 막 땅에 닿기 직전, 수아는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살려 주세요, 제발!”

자신의 흐느낌이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자신의 목소리만 오롯이 들렸다.

그것을 깨달은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바로 옆에서 민철이 비명을 지르던 모습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화희가 시간을 멈췄다는 것을 깨달은 수아는 급히 건물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머리 위 높이에서 윤성이 깃털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잔뜩 겁에 질린 그의 얼굴을 보자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달려간 그대로 힘껏 발돋움한 그녀는 윤성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가볍게 느껴지는 윤성을 바닥에 눕힌 수아는 급히 옥상 위를 쳐다보았다. 시간을 멈춘 것은 화희겠지만, 윤성이 추락할 정도면 그도 위험한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순간 그녀의 의문에 답하는 것처럼 작은 조각들이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벚꽃?

놀란 수아가 꽃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꽃잎은 그대로 그녀의 손바닥을 투과하여 바닥에 흩어졌다. 꽃잎이 닿은 회색의 보도블록이 녹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풀밭으로 변했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예전, 뒷동산에서 화희가 산의 기억을 보여 주던 때와 비슷했다. 흩날리는 벚꽃은 건물이 생기기 전 이 땅이 가진 기억이었다.

이것이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보내는 화희의 메시지임을 깨달은 수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윤성을 내려다보았다.

“윤성아, 이제 다 끝났어. 앞으로 괜찮아질 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곧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뜬 그가 그녀에게 멍하니 물었다.

“……민수아?”

“응.”

그녀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멍하던 눈동자에 경악이 들어찼다. 벌떡 몸을 일으킨 윤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이, 이게 뭐야? 왜 다 안 움직여? 나, 난 저기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 있……. 하, 설마 저 인간이 하다 하다 이제 시간까지 멈춘 거야?”

“그래, 화희 씨가 널 구했어.”

목이 메어서 겨우 대답하던 수아는 화희가 그를 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통을 떠올렸다. 그러자 울컥 화가 치밀어 윤성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야단쳤다.

“너 때문에 진짜 십년감수했잖아! 왜 네 잘못도 아닌 일로 삽질해서 여러 사람 힘들게 만들어? 이게 더 민폐야.”

“윽! 귀신처럼 나타나서 뭔 소리를…….”

“화희 씨 아니었으면 네가 귀신이 될 뻔했다고! 죽다 살았으니까 이제 쓸데없는 죄책감 같은 건 떨쳐 버리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다시 살아, 알아들어? 한 번만 더 삽질하면 직접 내 손으로 묻어 버리겠어!”

“악, 그만 때려! 아, 진짜!”

놀란 걸 수습하기도 전에 연신 수아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윤성이 머리를 감싸며 피하다 잠시 후 헛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라고? 나도 진짜 그러고 싶다.”

“아직 어린데 뭐가 걱정이야. 그러고 싶으면 그러면 되지.”

“……아아아아악!”

수아와 윤성이 마주 보며 투덜거리다 민철의 비명에 동시에 귀를 막았다. 적막하던 사위에서 갑자기 우렁찬 비명이 터지니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아…… 악? 천윤성?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급히 달려와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민철을 보며 윤성이 인상을 썼다. 천천히 일어난 그는 민철에게 다가가 그때까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서 내밀며 고갯짓했다.

“내 몫까지 실컷 놀라 줘서 고맙긴 한데, 이것 좀 먼저 경찰에게 넘겨주면 더 고마울 것 같은데요.”

“이, 이게 뭡니까?”

“폭파 발신기 같던데요. 진짠지 궁금하면 눌러 보시든가요.”

“으아악! 직접 넘기지 왜 이런 걸 나한테 줍니까?”

“……무서워서요.”

얼떨결에 건네받은 발신기를 든 민철이 우왕좌왕했다. 윤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를 무시하고 수아 곁으로 되돌아왔다.

잔뜩 붓기 시작하는 그의 뺨과 절뚝거리는 다리를 발견한 수아는 양손으로 발신기를 받쳐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는 민철을 가리켰다.

“다친 것 같은데 병원부터 가. 혼자 가기 힘들면 강 변호사님한테…….”

“됐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땐 누나 남친이랑 가까운 데 있는 게 제일 안전한 것 같으니까.”

“안 돼. 넘보지 마, 내 남자야.”

아픈 것처럼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바닥에 주저앉던 윤성이 그녀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와, 이상한 남자랑 사귀더니 농담도 썰렁해졌어.”

“이상한 게 아니고 특별한 거야.”

실없이 투닥거리던 둘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건물의 옥상에 닿았다.

잠시 옥상을 쳐다보던 윤성이 앉아 있기도 힘든 것처럼 땅바닥에 드러누우며 수아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저 위의 일은 우리가 상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겠지?”

“……그렇지 않을까.”

수아는 까마득히 높은 위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화희가 다치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화희 씨, 빨리 돌아와요. 보고 싶어요.

* * *

최후의 보루마저 놓치고 난 부신은 허무하게 제 빈손을 쳐다보았다.

분명 모든 것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는데, 어째서?

‘다 너 때문이다! 네놈이 모든 걸 망쳤어!’

머릿속에서 놈이 소리쳤다.

‘네놈이 저놈을 신의 선물이라 착각한 탓에 모든 것이 틀어졌다!’

이를 갈며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래, 놈의 말이 맞았다.

부신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화희를 증오에 차 노려보았다.

신이 내린 선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베기 위한 검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화희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며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이제 슬슬 사라져야지.”

“……으윽!”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가 부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목까지 타고 올라온 붉은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를 향해 뻗어 왔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밧줄처럼 온몸을 휘감은 글자들이 살을 파고들어 근육을 가르고 뼈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온갖 소리가 그의 안에서 악다구니 쳤다.

‘……천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 주세요!’

‘그런 나쁜 놈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부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저주는 그의 의식을 갉아 대며 갈기갈기 찢었다.

피투성이가 된 천부신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화희는 본 척도 않고 다시 난간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저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천부신의 ‘존재’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화희는 자신의 몸에 쌓인 사념을 털어 내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단검의 사념으로부터 입은 상처는 결국 천부신에 의해 생긴 것이었으므로.

미쳐 날뛰는 놈을 단칼에 없애면 쉬울 것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지만 답은 간단했다.

놈을 없애도 용서받을 수 있기 위해서였다.

천 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킨 대가로 수아를 만날 수 있었고, 그것으로 그녀의 믿음을 얻었다.

<난 화희 씨가 무슨 일을 하든,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약속도 잘 지켰잖아요, 무려 천 년 동안이나.>

그 믿음으로 인해 전생과 달리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고 결과는 바뀌었다.

화희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조용히 물었다.

이것으로 신부는 괜찮을까요?

당연히 단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화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난간 아래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하긴 뭐가 중요할까. 윤성과 나란히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는 수아를 보기만 해도 이렇게 마음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데.

늘 그녀를 찾아 헤매기만 했지,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돌아간다는 건 ‘이상향’과도 같은 일이었다.

슬슬 느껴지는 육체의 한계마저 그녀를 위한 일처럼 느껴져서 감미롭다.

생각에 잠겨 있다 여겼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화희는 어느새 그녀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화희 씨!”

그를 본 수아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걱정과 반가움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울컥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품에 가득 끌어안고 숨을 몰아쉬자 안에서 들끓던 힘이 스르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이제 됐다는 것처럼.

그를 위로하듯이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 * *

정말 긴 하루였다.

하늘이 불타는 것처럼 노을이 붉디붉었다.

화희가 뒤늦게 경찰과 함께 도착한 김세원 검사와 ‘뒤처리’에 대해 말을 나누었고, 윤성을 병원에 보낸 수아는 근처 거리를 한 바퀴 죽 돌아보았다.

작년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건물을 기억한 게 용할 정도로 낯익은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윤 할머니에게 들은 대로 상상했던 커다란 나무가 더 눈에 익을 듯했다.

맞아, 아까 화희가 내린 벚꽃 말고도 이 근처가 전부 벚꽃 나무 천지였던 것 같은데.

잠시 거리를 둘러보며 넋을 잃었는데 불쑥 나타난 화희가 그녀를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꼼짝 못 하도록 단단히 허리를 감은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가끔은 뒤에서 하는 것도 좋겠죠. 허락해 줄 거죠?”

“……네?”

“오늘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 준다면서.”

뜬금없이 야하게 들리는 말에 질색한 그녀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북적거리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사라진 후였다.

수아가 거침없이 허리 아래로 내려가려는 그의 손을 쳐 내며 뜨악하게 쳐다보자 화희가 상큼하게 대꾸했다.

“인사 말입니다.”

“…….”

“인사를 꼭 마주 보고 하란 법은 없으니까. 뒤에서 할 수도 있고 옆에서 할 수도 있고.”

“아…… 인사요?”

“무슨 생각을 했기에 표정에 야성미가 넘칩니까?”

“그, 그게 아니라 방금도 봤는데 새삼 무슨 인사예요?”

“수아 씨 말고. 애기씨는 처음 만났으니까요.”

얼굴이 붉어진 수아가 삿대질하자 갑자기 그녀에게서 한 발 물러선 화희가 묘한 표정으로 목례하며 인사했다.

“안녕, 애기씨. 미안해요, 내가 그때 많이 늦었었죠.”

애기씨? 수아는 경악하여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 나란 말이에요?”

“당신의 삶은 고작 18년이었어요. 하지만 그 생은 내게 무척 길었었죠. 무려 36년 만에 겨우 당신을 찾았는데 다 타 버린 집만 보게 됐죠.”

“그럼 그 방에 있던 반쯤 탄 일기장이 혹시…….”

“맞아요, 당신 겁니다.”

그의 얼굴에 들어찬 진한 슬픔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수아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 눈만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도 거리가 뒤바뀌기 전의 모습을 본 것처럼 상상했지만, 그것을 실제로 확인하는 것은 별개였다.

내 전생들은 대체 얼마나 파란만장한 거야?

그를 바라보며 입만 벙긋거리는 그녀의 뺨을 감싼 화희가 다정하게 웃었다.

“인사도 다 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죠.”

“그냥 가도 돼요? 일은 다 끝났어요?”

“나머지는 공권력의 문제니까요. 난 이제 수아 씨가 내게 한 약속만 받아 내면 됩니다.”

“…….”

“왜 그런 표정입니까? 설마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거라면 곤란한데요? 그 약속 하나만 믿고 내가 얼마나 속전속결로 천윤성을 구했는데.”

화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가라앉으려던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 남자와의 대화는 종잡을 수가 없어. 전에는 기승전결혼이더니, 지금은 기승전야설이야?

수아는 그를 흘기다가 눈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꽃다발에 눈을 크게 떴다. 청보라빛의 델피늄 이었다. 왜 뒤에서 끌어안았나 했더니 꽃다발을 숨기느라 그런 듯했다.

놀란 그녀가 멍하니 쳐다보자 쑥스러운 것처럼 눈을 내리깐 화희가 양손으로 꽃을 받쳐서 다시 내밀었다.

“급하게 준비해서 포장이 안 예쁘지만 꼭 지금 드리고 싶어져서.”

“어…… 고마워요.”

한겨울에 생생하게 피어난 델피늄이라니. 수아는 방금 꺾은 듯한 꽃다발을 받아 들고 잠시 만지작거렸다. 벅찬 감정이 밀려와 손끝이 떨리는 것 같았다.

크게 숨을 몰아쉰 화희가 오랫동안 참았던 고백처럼 속삭였다.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사랑하고 은애합니다, 민수아 씨.”

고개를 든 수아는 충동적으로 꽃다발을 그에게 안기고 양팔로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싫어요. 화희 씨는 이제까지 나를 기다리고 지켜 줬잖아요. 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지키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당신은 그냥 날 사랑해 주기만 해요.”

그들의 발치에 결국 꽃다발이 떨어졌다. 그에게 빈틈없이 안긴 수아는 바닷바람처럼 시원하면서 가을 소나무의 솔향처럼 깊고 은은한 그의 체취를 맡으며 나머지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진짜 너무 사랑해요, 화희 씨.”

대답 대신 화희가 그녀의 귓가에 웃음을 흘렸다. 기쁨으로만 충만한 웃음소리는 대답으로 매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 붉은 노을이 어둠에 밀려서 사라졌다.

한참 서로를 안고 보듬었던 수아와 화희는 밤이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고 달이 한가운데에 떠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서로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다른 때보다 특별했다. 과거를 완전히 끝내고 미래만을 향해 나아가는 길처럼 느껴졌으니까.

『델피늄』 본편 완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해바라기.sy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