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 *
환영 속 건물은 윤 할머니의 옛 집터 근처에 있었다.
수아를, 어릴 때 화재에서 구해 주고 죽은 주인집 딸로 착각해서 ‘애기씨’라고 부르는 윤 할머니는 치매 증상이 심해질 때마다 그녀에게 옛날 집에 가 보자고 성화였다. 그래서 작년 할머니의 건강이 괜찮았을 때 수아가 모셔 간 적이 있었다.
벌써 오래전에 불에 탄 집은 흔적도 없어지고 지역 자체가 아예 바뀌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예전 풍경으로만 보이는지 연신 그녀에게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설명했었다.
<애기씨, 저기 저 큰 나무 아래에서 내 머리도 예쁘게 땋아 주고 꽃반지도 만들어 줬었잖아.>
그때 할머니가 ‘나무’라고 가리켰던 것이 한창 짓는 중이던 그 건물이었다.
당시엔 할머니의 향수 어린 눈빛과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수아의 눈에도 건물이 정말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저거예요!”
수아는 핸들을 생명줄처럼 꽉 붙잡고 연신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앞에 우뚝 선 건물을 보고 외쳤다.
그러나 화희는 건물은 본 체도 않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 괜찮습니까?”
“네. 화희 씨가 나더러 위험하니까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라고 강요하지 않아서 괜찮아요.”
“나도 수아 씨가 왜 윤성이한테 안 가고 자기에게 왔냐고 따지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그럼 진심으로 화가 났을 테니까.”
차를 타고 건물을 찾아가는 중에 김세원 검사에게 윤성이 납치되었다는 전화가 왔었다.
이미 짐작했던 듯 화희는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장소를 알아낸 것에 크게 놀란 듯했다.
<다행이군요. 내 피가 그리 오래 막아 주진 못했을 텐데.>
덕분에 이제 끝내는 일만 남았다며 겉으로 여유로워 보였지만, 조금 전부터 불쑥 고통이 느껴지는지 이따금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그의 셔츠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본 수아는 몸을 움찔 떨었다.
화희가 못마땅한 눈길로 피에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치명상은 이제 시작이군요. 총 같은데……. 예지에선 천부신이 뭘로 죽였습니까?”
“부, 부서진 돌 같은 거요.”
“확실히 바뀌고 있군요. 아까 수아 씨도 예지와 달리 용감하게 악당을 무찔렀고.”
다행히 금방 피도 멈추고 상처도 아물었지만 사슬 같은 붉은 문신이 목과 손등까지 퍼지고 있었다. 마치 온몸에 독이 퍼지는 것처럼.
“이, 이 검흔은 왜 더 심해지는 거예요?”
“뭐, 지금의 육체와 맞지 않는 오래된 힘을 가져다 쓰니까 금이 가는 거죠.”
“그, 그럼 큰일 아니에요?”
“설마 내가 수아 씨랑 할 일도 많은 이 몸을 허투루 다룰까 봐서요?”
안타깝게 고개를 저은 수아는 그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듯 물었다.
“화희 씨, 진심이에요. 정말 내가 대신 아프면 안 될까요?”
“나보단 천윤성이 더 괴로울 겁니다. 이쪽이 죽음만 회수하는 단발성이라면 그쪽은 진짜 죽지만 않는 거라서.”
윤성이 위험하니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화희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못 보겠고.
안절부절못하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본 화희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정 날 위하고 싶으면 집에서 내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겠다고 약속해요. 그럼 그때 실컷 울게 해 줄게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다치지만 말아요.”
“뭐든지라, 참 입맛 돋네요. 같이 오길 잘했군요, 집에 가는 길부터 시작할 수 있으니까.”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농담을 던지는 화희에게 대꾸하며 수아는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는 고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윤 할머니와는 커다란 나무처럼 보이던 건물이, 지금은 천부신 때문에 꼭 바벨탑처럼 보였다.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신의 사명을 부르짖으며 신 같은 힘을 원했던 천부신은 결국 바벨탑의 유래처럼 재앙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
윤성아, 제발 힘내서 조금만 더 버텨 줘.
수아의 떨리는 손을 안쓰러운 듯 꽉 잡아 준 화희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화희와 윤성, 두 남자가 무사하길 간절히 빌었다.
* * *
뜨거운 불벼락이 연달아 몸에 내리꽂힌 것 같았다.
그러나 윤성은 고통에 헐떡거리면서도 악착같이 고개를 쳐들고 천부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은 미쳤어! 신은 개뿔, 당신은 그냥 정신병자 살인자야!”
“하, 뭐라? 이, 이, 주둥이만 산 놈 같으니-!”
천부신이 갑작스러운 윤성의 반항에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다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를 의아하게 노려보던 윤성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 허겁지겁 자신을 살폈다.
이, 이게 뭐야?
총에 맞은 곳곳에서 불꼬챙이에 쑤셔진 듯 격통이 느껴지는데 피는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서 옷이 뚫린 부분을 만져 보아도 상처는 없었다.
대신 붉은 천이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천이 아니었다. 무수히 작은 글자들로 이루어진 얇은 막이었다.
“……설마?”
천부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총구로 뚫린 옷가지를 들춰 보다 인질들이 묶인 곳을 향해 총을 쏘았다.
“으읍!”
입에 재갈이 물린 남자 중 하나가 팔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팔이 금방 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총의 이상이 아닌 걸 확인한 부신이 이를 갈며 바닥에 나뒹군 그의 머리채를 사납게 휘어잡았다. 부신의 눈이 순간 증오로 희번덕거렸다.
“하, 화희 그놈 짓이로군! 이제 보니 네가 그놈과 짜고 날 우롱한 게냐?”
“읏, 그 역겨운 냄새 좀 어떻게 해 보시지? 그깟 장난감 같은 총이 아니라 당신 악취 때문에 죽을 것 같으니까!”
“빌어먹을 네놈들을 내, 반드시 찢어 죽일 것이다!”
천부신이 이를 갈며 그의 머리채를 잡고 옥상 끝 쪽으로 끌고 갔다. 사지가 묶인 윤성이 버둥거리며 버티려 하자 얼굴에 대고 마구 총을 갈겼다.
다치진 않아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연이어 덮치자 윤성은 힘없이 쓰러졌다.
“이런, 가뜩이나 쓸데없는 걸로 가득 찬 대가리에 굳이 뭘 또 처넣으려고.”
그때,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가깝게 들렸다.
흠칫 뒤를 돌아본 천부신이 뒷걸음질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여, 저놈을 죽여라!”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를 눈치채지 못했던 수하들이 화희를 보고 일제히 총을 쏘아 댔다.
귀가 먹을 것 같은 총성에 윤성은 희미해진 시야로 화희를 넘겨보았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똑같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크게 흔들리고,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점차 바람이 붉게 변하며 거세게 퍼지기 시작했다. 옥상 전체로 퍼져 나간 바람에 휩쓸린 남자들이 어느새 사지를 기괴하게 비틀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바람을 피해 혼비백산 도망치던 몇몇은 발목뼈가 부러진 것처럼 반대로 돌아간 발을 붙잡고 저 멀리 휙 나가떨어졌다.
옥상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은 윤성의 근처뿐이었다. 천부신이 거센 바람에 그를 놓치고 바닥을 나뒹굴자 윤성은 급히 끌려다니느라 느슨해진 발의 밧줄부터 풀었다.
뒤늦게 윤성은 왜 화희의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이 들렸는지 깨달았다.
안개에 휩쓸린 남자들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비명은 음 소거가 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비명뿐 아니라 바람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옥상을 뒤덮은 바람이 모두 빨아들이는 것처럼.
기괴한 광경이었다.
붉은 바람의 태풍 속에 우뚝 서 있던 화희가 휘날리는 머리칼이 성가신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천천히 걸어왔다.
“봐라, 신은 나 천부신을 선택했다! 네놈이 아무리 사특한 짓을 한다 하여도 난 지금처럼 다시 부활할 것이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화희가 그를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난 네놈 따위의 신이 되기 싫은데? 내가 널 불러냈거든.”
“……뭐?”
경악한 천부신에게 화희가 윤성을 턱짓하며 혀를 찼다.
“복수가 하고 싶어져서.”
막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윤성은 화희와 눈이 마주쳤다. 바람 때문에 붉게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섬뜩했다.
화희에게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가 천부신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에게 욕설을 짓씹던 천부신이 돌연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시, 시끄럽다! 내, 내가 천부신이야! 아니야, 이 몸은 신에게……. 닥, 닥쳐라! 네가 다 나약하여서 일을 망친 거다! 아니지, 저놈 때문이다! 저놈이 우리를-!”
누군가와 싸우는 것처럼 횡설수설 고함을 지르던 천부신이 화희에게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 댔다. 그러나 총성조차 바람에 묻히고 총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를 지켜보던 윤성은 허무하여 힘이 빠졌다. 아무리 저 남자가 대단하다 해도 신처럼 의기양양하던 천부신이 고작 몇 분 만에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나는 이제까지 뭘 한 거지?
그를 피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천부신이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는 천부신이야. 이 일만 성공하면 네깟 귀물도…….”
윤성은 옥상 끝까지 물러난 그가 품에서 뭔가 꺼내 든 것을 보았다. 기계 버튼이었다.
……설마 끝까지 여기를 무너뜨리려고?
빨간 불빛이 빠르게 번쩍이는 것을 본 윤성은 자기도 모르게 부신에게 달려들었다.
막 버튼을 누르려던 부신이 야차와 같은 얼굴로 그를 세게 밀쳤다. 천부신의 손에 들린 것을 뺏는 데만 온 힘을 쏟았던 윤성은 난간 너머로 몸이 넘어가도 잡아챈 것을 놓지 않으려 주먹 쥔 손을 뻗지 않았다.
시야가 한꺼번에 휙 돌아 눈앞이 아찔해졌다.
우습게도 수백 미터 허공에 붕 떠오른 순간, 마지막 하고픈 건 별게 아니었다.
그저 돌아갈 곳이 있으면 했다.
‘집’이라고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불러 보고 싶다고, 윤성은 그렇게 소원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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