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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98화 (98/100)
  • 98화

    충격, 놀람, 걱정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폭발한 것 같았다.

    “유, 윤성이가 기자 회견 하는 걸 보는데 이상한 게 보였단 말이에요. 천 회장이 윤성이를 주, 죽이는 장면 같은 거였는데…….”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화희는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크게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마 그 멍청한 기자 회견 때문에 벌어질 일이었겠죠. 난 천부신을 만나는 척 위치만 알아내라고 했지, 화를 부추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라면 화희 씨와 연결된 내가 차라리 낫잖아요? 윤성이와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시선을 피하듯 눈길을 돌리던 화희가 잠시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짧은 한숨을 내쉬고 털어놓듯 말했다.

    “난 천윤성에게서 당신과 반대의 사념을 보았습니다. 내게 보일 정도면 의지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반대요? 그럼 윤성이가 천부신을 죽일 거라고요?”

    “죽이고 싶다는 미움은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책감이죠. 천윤성 성격으로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고, 그 후엔……. 죄책감이 사람을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 알잖습니까.”

    말끝을 흐린 그가 수아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지금의 그녀가 아닌, 그녀 안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과거의 그녀를 보는 듯했다.

    수아는 기자 회견 내내 무표정하던 윤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부분 그런 자리라면 떨거나 수치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담담했다. 뭔가를 각오한 것처럼. 꼭 황궁을 떠나던 과거의 그녀처럼.

    원망하듯 화희를 붙잡은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수아는 그를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힘없이 물었다.

    “……윤성이가 내 전생과 같은 길을 갔을 거란 뜻이에요? 천부신을 막지 못한 자책감에 스스로 자멸하는?”

    “내 피를 먹였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본인이 원치 않는다 해도.”

    “피를 먹였다고요?”

    수아는 입술을 깨물고 쓰게 웃는 화희를 살폈다.

    언제나 깔끔하고 완벽하던 차림이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만사 제치고 달려온 그를 탓하다니 나만은 그러면 안 됐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도 다 나 때문인데.

    게다가 윤성이에게 피를 먹였다는 건 대신 죽음의 고통을 겪는다는 거잖아.

    수아는 그녀의 표정 하나, 시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는 화희와 마주 보다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괜찮아요? 나한테 피를 먹이고 나면 고통스러워 보이던데…….”

    화희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픕니다. 당신이 차에서 떨고 있는 걸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당신에게 패대기까지 당했으니.”

    “내가 언제 패대기를……. 멱살을 좀 잡았……. 저기, 혹시 결계로 묶인 김에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뒤늦게 미안함과 고마움, 걱정까지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몰려들자 어쩔 줄 몰라하던 수아는 그를 살피며 안타깝게 물었다. 달래듯 그녀의 손을 덮는 다정한 손길과 달리 그녀의 마지막 물음에 화희의 목소리가 대번에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차라리 방금처럼 화를 내요.”

    “화희 씨는 당장 할 일이 많잖아요.”

    “많기는커녕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오지랖을 마음껏 펼쳐요. 나는 내 마음대로 당신을 지킬 테니까. 천윤성이 전생에 우리의 아이였든 뭐든, 내 우선순위는 매우 확고…….”

    “자, 잠깐만요! 지금 뭐라 그랬어요?”

    매섭게 잘라 말하는 화희에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수아는 별안간 머릿속이 번쩍이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아슬아슬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간 영감에 초조해진 그녀는 와락 그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요!”

    일어나려다 다시 멱살을 잡힌 화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관적으로 화를 내 주시면 좋을 텐데요.”

    “다시 말해 보라니까요!”

    “수아 씨는 참 일관적으로 내 멱살을 잡는-”

    “아니요, 그 앞에!”

    “천윤성이 전생에 우리의 아이였든 내 우선순위는…….”

    “아, 아이가 아니라니까요!”

    건물을 떠올릴 때마다 혀끝에 맴돌던 ‘아기’나 ‘아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근데 정답은 아이가 아니고 그와 비슷한 단어였다.

    답답한 마음에 수아는 그의 멱살을 잡은 채로 눈을 부릅떴다.

    영문도 모르고 대꾸하던 화희가 변명하듯 대답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아니면 청소년……. 하아, 수아 씨, 괜찮은 겁니까?”

    그러나 수아는 그의 물음을 흘려들으며 급한 마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천 회장이 있는 건물이 어딘지 알겠어요!”

    드디어 생각났다.

    <애기씨, 저기 저 나무 아래에서 내 머리도 예쁘게 땋아 주고 꽃반지도 만들어 줬었잖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던 단어는 아기가 아닌 ‘애기씨’였다.

    “빨리 타요!”

    그를 놓아주고 급히 핸들을 잡는 그녀를 본 화희가 잠시 눈을 가늘게 떴으나 이내 픽 웃으며 조수석에 앉았다.

    * * *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춥고 무서웠다.

    윤성은 내내 잊고 있었던 아이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아원이 불타고 천부신과 커다란 집에 살면서부터 그는 늘 춥고 아팠다.

    부신은 그에게 미래에 생길 일을 말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윤성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일을 말했다가 고아원 원장이 죽었고 자신은 무서운 남자와 살게 됐으니까. 무엇보다 원장을 죽인 남자의 말은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늘 부신에게 얻어맞고 갇힌 채 굶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건가 싶을 만큼 매우 아팠다.

    아마 그때부터 기억이 뒤죽박죽 사라졌을 것이다. 스스로 기억과 예지를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은 어린아이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으나 눈앞이 깜깜했다. 찬 바람에 살이 에일 것처럼 추웠다.

    윤성은 자신이 손발이 묶이고 눈까지 가려진 채 어딘가 야외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민수아도 잡혀 온 건 아니겠지?

    “……민수아?”

    혹시나 해서 작게 불렀는데 갑자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불쑥 그의 몸이 짐짝처럼 덜렁 들리는가 싶더니 안대와 재갈이 벗겨졌다.

    “아직도 그 계집 타령이냐? 혹여 그 계집에게 홀려서 그딴 짓을 벌인 거야?”

    쫙-

    무릎이 꿇린 채 눈이 부셔 제대로 초점을 맞추기도 전에 억센 따귀가 날아왔다.

    익숙한 혐오와 두려움이 윤성을 짓눌렀다.

    바로 그의 눈앞에 아버지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과 달리 의자에 기대앉은 천부신은 정확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그를 대했다.

    쫘악. 쫘악-

    따귀를 연이어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윤성은 맞아서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최대한 주위를 살피려 애썼다.

    그가 끌려온 곳은 고층 건물의 넓은 옥상이었다.

    한쪽 구석에 예닐곱 명이 윤성처럼 손발이 묶인 채 모로 눕혀 있고, 무기로 무장한 남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착륙장엔 헬리콥터까지 대기 중이었다.

    천부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짐작이 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없애고 도망칠 작정인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민수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시름 놓자 윤성은 어쩐지 체념의 기분이 되었다.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으니까.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고아원 원장과 고아원의 아이들, 부신의 서재에서 보았던 환영 속 남자, 천부신에게 죽은 이들은 그 외에도 많겠지.

    이 남자를 막을 힘이 없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소리 높여 남들의 억울함을 알릴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 자신의 침묵도 죄였다.

    닥치는 대로 그를 매질하던 부신은 분노가 더 들끓는지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나는 신과 같은 사람이다. 저기 보이는 것들 전부 내 손짓 하나로 무너뜨릴 수 있어. 그런데 네까짓 게 나를 감히 일개 협잡꾼으로 만들어?”

    이어질 매질을 각오하던 윤성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신? 신이라고?

    그는 고개를 들어 새삼 천부신을 자세히 살폈다.

    색색의 휘황찬란한 옷차림, 왕좌에 앉은 듯 거만한 자세, 안하무인의 말투, 게다가 지금 벌이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는 천부신은 권력과 돈에 미쳤을 뿐, 이딴 허황된 망상에까지 빠져 있지는 않았다.

    대체 이 미친놈은 누구지?

    아, 알게 뭐야. 그래 봤자 비열한 살인자와 망상에 빠진 살인광의 차이였다.

    윤성은 가혹한 매질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려다 포기하고 부신을 증오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부신 역시 그를 멸시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며 지껄였다.

    “너 같은 놈은 곱게 키울 게 아니라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도사견으로 키웠어야 했다!”

    “무, 무슨 헛소리야? 난 절대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하! 내가 식충이 같은 네놈한테 바라는 게 있을 성싶으냐?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게다.”

    천부신이 눈앞에 시커먼 뭔가를 들이밀었다. 관자놀이에 차가운 쇠붙이가 닿았다.

    본능적으로 움찔 몸을 떠는 그를 잔인하게 비웃은 천부신은 권총의 총구로 그의 몸을 가늠하듯 훑었다.

    “네놈을 쉽게 죽여 주진 않는다. 알량한 혓바닥을 놀려 이 몸을 모욕한 대가는 치러야지.”

    천부신,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귓가에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렸다.

    윤성은 이를 악물었으나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이 절로 샜다. 걷어차인 것처럼 그가 바닥을 나뒹굴자 천부신이 총을 다시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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