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 *
어디선가 희미하게 차량 도난 경보음이 들린 것 같았다.
초조하게 윤성과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던 수아는 흠칫 놀라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평화롭고 복잡한 도시의 모습만 비쳤다.
불안해서 잘못 들은 건가?
<나와 결계로 묶였으니 인재의 예지가 구체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와 당신의 본질이 가장 크게 상응하는 부분이니까.>
화희의 말대로 정말 내가 사고를 예지할 수 있게 된 거면 어떡하지? 환영 속 무너진 건물, 천부신과 천윤성, 그리고 낯선 남자들에게 붙잡힌 자신의 모습이 진짜가 된다면?
천 회장이 풀려난 마당에 윤성이는 왜 그런 도발적인 기자 회견을 한 걸까.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긴 거라면…….
-누나?
드디어 통화가 연결되어 핸드폰으로 윤성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너 어쩌려고 그래?”
-없는 얘기 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라도 해야 온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을 더럽다고 피하지.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이었어.
“그러다가 그 사람이 앙심을 품고 해코지라도 하면…….”
-안 그래도 지금 경찰들에게 포위당했어.
“뭐?”
-누나 남친이 나더러 유명해지고 싶으면 반반한 얼굴로 연예계나 진출하라던데? 그러면서 경찰을 잔뜩 보내서 가둬 놨어. 비아냥거리면서 챙겨 주는 척하면 멋있어 보일 줄 아나, 참 나.
“……그래서 지금 어딘데?”
-무슨 호텔 같은 덴데, 나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밥은 또 더럽게 맛없어.
화희가 윤성을 이용해서 천부신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 것 때문에 가슴 한구석이 무거웠는데 툴툴거리는 윤성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조금 안심이 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죽했으면 그런 일까지 했을까 더욱 걱정이 깊어졌다.
윤성이 천부신에게 가진 자책감의 무게는 ‘과거의 그녀를 통해’ 익히 짐작이 가니까.
“어, 저기, 윤성아. 전에도 말했지만 나쁜 사람을 막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 없어. 나쁜 건 나쁜 짓을 한 사람이잖아. 너는 어리고 힘이 없었으니까…….”
-나도 알아. 아, 그만 끊어야겠다. 내 걱정 말고 누나나 잘 있어.
수아는 윤성이 급히 전화를 끊자 꺼진 핸드폰을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말을 피한 느낌이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저, 집으로 돌아가 주시겠어요?”
수아는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기사에게 요청했다. 화희가 당분간 데리고 다니라고 붙여 준 경호원 겸 기사였다.
회사까지 찾아가도 화희를 만날 수 없어서 민철을 닦달했지만, 차라리 집에서 기다렸다가 자초지종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윤성은 전화를 끊고 못마땅하게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끝까지 잔소리야, 진짜.
지금이라도 수아에게 좀 믿음직스럽게 보이고 싶은데 늘 이렇게 된다.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투덜거렸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의 인생이 더 대단했다. 그래서 더욱 그녀가 좋아졌다. 매번 끔찍한 사건 사고에 휘말리면서도 어떻게 민수아는 밝고 야무질 수가 있을까.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은 결코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면서도 너무 아까웠다.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곁에 있어 주면 어떤 고난이든지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하, 아직도 자신은 나약하다. 지킬 생각은 않고 기댈 생각부터 하다니.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나쁜 짓을 뻔히 눈 뜨고 보고만 있었던 자신이 미워서, 과거에 대한 후회가 없도록. 그게 비록 고자질 같은 기자 회견이라고 해도, 그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어설픈 시작이었다.
“근데 내 용기는 여기까지인가…….”
아까 전화로 싸늘하게 화를 내던 화희를 떠올리자 억눌렀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된다고 했을 텐데. 기껏 생각해 낸 미끼가 널 죽이고 싶게 만든 살의인가?>
화희가 화를 내는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네가 잘못되면 난 수아 씨에게 용서받을 수 없을 거다.>
천부신을 없애는 것도, 애써 재난을 막으려는 것도 전부 민수아 하나를 위해서. 그런 남자니까 민수아에게 조금이라도 미련을 남길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윤성은 슬쩍 창문의 커튼을 젖혀 보다가 문밖의 기척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귀를 기울여 보니 교대 시간인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말소리에 불과했다.
놀란 가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그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호텔 로비부터 방 앞까지 경찰들이 경호를 서고 있음에도 불길한 느낌은 시시각각 커져 갔다.
사실은 매우 두려웠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원한을 품으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날 어떻게 할까. 화희의 말대로 죽이려 할까? 아니면 잡아서 괴롭히다가 끝내는 죽일까?
윙-
마치 그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온 집 안의 불이 점멸된 듯 윤성이 주위를 더듬어 급히 스탠드의 스위치를 켰으나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니 조금 전까지 훤하던 호텔 입구도 깜깜했다.
호텔 전체가 정전된 건가? 하필이면 지금?
윤성은 핸드폰 플래시를 켠 채로 숨을 죽이고 문밖의 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윤성 씨, 경찰입니다. 정전으로 신변 보호가 어려우니 이동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보안상 도착할 때까지 알려 드리지 않는 게 규칙입니다.”
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던 윤성은 걸쇠를 걸고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눈에 익은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 둘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복도를 넘겨보았으나 비상등마저 나갔는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진짜. 일은 저질러 놓고 이렇게 잔뜩 겁을 집어먹으면 어쩌겠다는 거야?
스스로가 한심해진 윤성이 재차 굳게 마음을 먹고 걸쇠를 푸는 순간.
지지직-
벌컥 열린 문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전기 충격기를 들고 그에게 히죽 웃었다.
“안녕, 도련님.”
“으읏-!”
순식간에 윤성은 전기에 감전되어 경련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떨며 도망치는 그에게 전기 충격기를 재차 들이댄 남자가 뒤쪽을 향해 속삭였다.
“어디 보자, 이놈까지 열셋. 이제 B팀이 맡은 민수아라는 계집만 남은 건가? 시간 맞춰 차량을 바꿔야 하니까 연락해 봐.”
미, 민수아? 가물가물 잠기는 의식에 윤성은 뒤늦게 버둥거렸다. 그러나 틀어막힌 입에서는 꼴사납게 신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 * *
그 건물 주위를 분명히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수아는 환영 속 장면을 되새기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무너진 건물의 뚫린 벽 아래로 보이던 풍경을 지난 적이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기억이 날 듯 말 듯 답답했다. 이상하게도 자꾸 ‘아기’란 단어만 생각났다.
왜지? 윤성이 일이라 그런가? 하지만 동생이라면 몰라도 아기는 오버잖아. 일단 그 건물과 비슷한 걸 찾아보자.
기사가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그녀를 돌아보며 당황한 듯 말을 건넸다.
“혹시 이사님께 연락받으신 게 있습니까? 경찰차가 따라옵니다.”
수아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백미러를 통해 사이렌을 끄고 뒤따르는 경찰차를 확인했다.
그들의 차가 서행하자 앞으로 추월한 경찰차는 정문 앞 진입로를 막고 멈춰 섰다. 곧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 둘이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경찰 중 한 명이 그녀 쪽의 차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민수아 씨죠?”
“그런데요? 무슨 일이세요?”
수아가 창문을 내리고 의아하게 쳐다보자 질문을 던진 남자가 품에서 신분증을 내보였다.
“**지구대 소속 경사 김남중입니다. 서울중앙지검에서 민수아 씨 신변 보호를 요청받았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차량 이동 부탁드립니다. 남자분 신원도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계십시오, 확인해 보고 이동하겠습니다.”
경찰의 말을 들은 기사가 그녀에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 문밖에 서 있는 경찰을 올려다보던 수아는 화희나 민철에게 물어보려고 핸드폰 잠금 화면을 풀었다. 그런데 순간 창문 사이로 보이는 경찰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왜인지 경찰의 얼굴이 기분 나쁘게 낯이 익었다. 수아는 차 문손잡이를 잡으려고 팔을 뻗는 경찰을 보자 본능적으로 도어 록을 걸었다.
아, 안 돼!
섬뜩하게 소름이 끼쳤다. 오는 동안 몇십 번이고 되새겼던 환영이 쏜살같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너진 건물에서 자신을 결박했던 남자! 경찰복을 입었지만 분명 그 남자였다.
수아는 자세히 확인할 여유도 없이 기사에게 소리쳤다.
“피해요, 경찰이 아니에요!”
그녀의 외침을 들은 기사가 흠칫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신분증을 검사하던 경찰이 뭔가를 휘둘렀다.
덜컥덜컥, 다른 한 명이 열린 운전석 쪽으로 손을 뻗자 수아는 급히 운전석으로 뛰어 넘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전체 도어 록을 건 사이, 전면 창으로 다른 한 명과 대치 중인 기사가 보였다.
“씨발, 귀찮게.”
차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남자가 욕설을 뱉으며 허리 뒤춤에서 뭔가를 꺼내 들고 기사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의 손에는 접이식 쇠 곤봉이 들려 있었다.
뛰어간 남자는 순식간에 길게 뺀 곤봉으로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 안 돼! 어, 어떡하지?”
단발에 기사가 쓰러지는 걸 본 수아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차는 시동이 걸려 있었다.
바, 방법이 없어.
그녀는 이를 악물고 액셀을 세게 밟았다. 엔진 소리에 범인들이 돌아보았지만, 수아는 핸들을 부여잡고 그대로 돌진했다.
콰, 쾅!
가까운 거리라 크게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미끄러진 차는 연이어 범인들을 세게 들이받았다. 차체에 느껴지는 충격이 끔찍했다.
차에 부딪힌 범인들이 붕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춘 수아는 차마 앞을 확인할 여력도 없이 손을 떨며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내, 내가 사람을 치었어! 주, 죽었으면 어떡하지?
충격과 두려움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 이럴 때가 아니라 기사가 괜찮은가 확인을 해야…….
똑똑.
그때 차의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벼락같이 들렸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수아는 어깨를 떨며 겨우 옆을 곁눈질했다. 커다란 인영이 유리창을 가리고 서 있었다.
“수아 씨.”
낯익은 목소리, 화희였다.
창밖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화희를 확인한 수아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기, 기사님은요?”
“수아 씨 덕분에, 저기.”
전면 창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범인들 사이로 머리를 짚고 천천히 일어서는 기사가 보였다.
“괜찮으니까 문 좀 열어 봐요.”
수아는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헛손질한 후에야 겨우 차 문을 열었다.
“나, 나쁜 놈들이 이, 이제 경찰까지 사칭해서 집에…….”
온몸이 후들거려서 쏟아지듯 내리는 그녀에게 몸을 숙인 화희가 팔을 벌렸다.
그러나 수아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안으려는 화희의 멱살을 움켜잡고 버럭 소리 질렀다.
“이런 짓까지 하는 놈들이잖아요! 근데 가뜩이나 안쓰러운 애한테!”
화희는 순식간에 자신의 멱살을 움켜잡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굳었다. 그의 재킷을 움켜잡은 수아는 매달리듯 흔들며 소리 질렀다.
“꼭 그놈을 만나라고 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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