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 *
부신은 전면으로 보이는 유리창 앞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개미굴처럼 뻗은 시가지가 제 발아래 펼쳐진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니지, 사람들이 모두 개미처럼 보이는 풍경처럼 당장이라도 하찮은 것들을 모두 짓밟아 버리고 싶어서 안달 났다는 것이 더 정확한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다, 당신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희게 질린 남자가 그의 등을 향해 소리 질렀다. 감상을 방해받은 부신이 언짢은 기색으로 눈짓하자 그의 양옆에 섰던 수하 중 하나가 남자를 세게 걷어찼다.
부신은 구둣발로 숨 막힌 비명을 지르며 엎어진 남자의 머리를 짓밟고 비웃었다.
“이 몸은 당장 쓸모가 있는 네놈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과연 네 식솔들도 무사할지는 모르겠구나.”
중년 남자는 눈앞에 보란 듯이 흔들리는 자신의 가족사진을 시선으로 좇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내 가족은 왜……?”
“그동안 내 돈으로 네놈 식솔들의 배를 불려 놓고서 갚은 것이 없으니까. 목숨으로라도 내 은혜를 갚아야지.”
“나는 최, 최선을 다해 천 회장을 도왔소! 하, 하지만 증거들이 넘쳐나는 데다 언론에서 터뜨리는 바람에…….”
“언론을 주무르는 건 당신 전공이잖소. 김 의원,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부신이 말끝에 힐끗 눈짓하자 옆에 있던 수하가 위협하듯 겨누던 총구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옆방의 침대 아래에 반쯤 벗겨진 구두를 신은 발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 옆에서 몸을 뒤지고 핸드폰을 조작하던 수하가 시체의 피에 젖은 머리채를 잡아 들어 보였다.
“저, 저 사람은……!”
“내 돈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 놓고서 이 몸이 곤란해하는 동안 관망만 하던 놈이지.”
누구나 알 정도로 낯익은 고위 관직자의 시체를 본 남자가 하얗게 질려 사지를 떨기 시작했다.
“이, 이봐요, 천 회장. 제발 살려 주시오! 이러지 말고 우리 옛정을 생각해서…….”
“당장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으면 네놈뿐만 아니라 네놈 식솔 전부 내가 으깨 버릴 것이야.”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부신은 바닥을 기며 살려 달라고 비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참으로 체면이 우습게 됐다. 한때 황제였던 자신이 저잣거리 건달처럼 이 무슨 상스러운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놈이 존재하는 한, 이런 촌극은 불가피했다.
36년 전, 윤회를 거듭하고도 자신을 쫓는 화희를 ‘발견’하는 순간 그의 해묵은 분노는 깨어났다.
그를 피해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숨기던 때 극한의 두려움이 온전히 자신의 것처럼 밀려왔다. 수치심은 그다음이었다.
화희에 대한 두려움이 잠자고 있던 그의 복수심과 증오를 일깨웠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놈에게 당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힘이 필요했다.
전전긍긍하던 그는 우연히 깨닫게 되었다.
부실 공사로 건물이 무너지고 하수관을 잘못 내서 한 지역이 물에 잠기자 그는 제가 가진 힘을 깨닫게 됐다. 자신에게는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을 일으킬 힘이 있다는 걸. 자신이 천벌을 내리는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현재 자신인 천 회장은 모든 걸 뒤엎기엔 담이 작았다. 그는 늘 자신이 일군 것들을 잃을까 늘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마지막 패를 미루고 미루다 때를 놓치고 말았다.
거울 속에 갇힌 채 또 다른 자신인 천 회장에게 목이 터지라 외쳐서 그나마 대비를 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여기에 쓰인 대로 진행해라. 귀신 같은 놈이니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지금이라면 틀림없었다. 본보기 삼아 건물 몇 개를 부수고 협상안을 내밀면 정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힘을 되찾고 모가지를 틀어쥔 놈들을 조종해서 화희 그놈도 차례로 없애면 된다.
차근차근 열을 성을 다하면, 천 년 전처럼 신은 그의 뜻을 들어줄 것이다.
부신은 의원을 놓아주고 전면 창을 의기양양하게 손짓했다.
“영광인 줄 알아야지, 몇 시간 뒤면 내 힘을 직접 보게 될 테니까.”
“저, 회장님.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건넛방에서 시체의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조작하던 수하가 급히 달려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동영상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제물로 키웠던 아이였다.
-천부신 회장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이 같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국민 여러분께 제 아버지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이, 이놈이-!”
여유만만하던 부신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놈이 벌인 일보다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에 부아가 치밀었다.
괘씸한 놈,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길러 준 은혜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감히 날 모욕해?
그래, 내 아들이었던 만큼 네놈도 성대하게 묻어 주마.
“이놈을 당장 잡아 와라!”
부신이 외치자마자 수하 몇이 급히 방을 나갔다.
그는 전면 유리창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천의 무덤이 될 지상을 훑었다.
* * *
화희는 넓은 지하 주차장 안을 죽 훑었다.
예정대로 비워 놓은 주차장으로 몰래 잠입한 놈들은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하 5층까지 합하여 총 23층인 이 건물은 몇 시간 뒤면 지하 주차장을 시작으로 연쇄적으로 붕괴될 예정이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겠지만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지는 제각각이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 수상한 일인지 알고도 돈 때문에 하는 자, 모든 것을 알지만 악의에 인이 박인 자, ‘악의’ 자체를 즐기는 자.
몸을 숙인 경찰 한 명이 운전석의 유리창을 두들기자 지루한 표정으로 시계만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창문을 내렸다.
“무슨…… 윽!”
경찰이 채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들 뒤에 서 있던 화희가 길게 팔을 뻗어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유리창에 세게 박았다.
경악하여 굳었던 김세원은, 기절한 남자를 끄집어내고 핸들 옆 버튼을 누른 화희가 냉랭한 눈길로 쏘아보자 서둘러 열리는 냉동 칸을 확인했다.
“큼큼, **동 저수지 공사 현장에서 빼돌린 산업용 폭탄이 맞습니다. 정확히 3분의 1 양입니다. 그런데 이걸로…… 어, 어디 가십니까?”
“이놈은 아무것도 몰라.”
화희는 주차장을 휙 둘러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운전사는 제 트럭에 무엇이 실린지도 모르고 기절한 순간까지도 시시껄렁한 잡생각만 했다.
탕-!
어디선가 지하 주차장 전체가 울릴 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서, 설마 총입니까?”
김세원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묻자 화희는 냉동 칸의 폭탄을 눈짓했다. 폭탄도 있는 판에 총이 대수냐는 뜻이었다.
탕탕, 총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냉동차에 총알이 턱턱 박혔다.
김세원이 재빨리 손짓하자 냉동차에 뛰어 탄 경찰 대원 둘이 차를 몰고 나가며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김세원이 화희를 따라오며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계획이 틀어지면 바로 실행할 예정이었나 봅…… 아, 죄송합니다. 기, 긴장되어서, 그만.”
화희는 뒤따르는 경찰들을 곁눈으로 훑다가 휙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처진 김세원이 뒤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애원했다.
“이, 이사님 제발! 수습 가능한 선으로, 예?! 네에에?”
쾅, 화희는 주차장 입구에 있던 차의 보닛 위로 훌쩍 뛰어올라 손을 뻗었다. 손에서 길게 뻗어 나온 그림자가 앞유리창을 뚫고 총을 든 자의 머리통을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총을 떨어뜨린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어 깠다.
‘죽여, 모두 죽여서 없애. 이번 건만 끝내면 숨어 살지 않아도 돼. 받은 돈으로 부자가 되면-’
화희는 남자의 사념에서 얻을 것이 없자 손을 거둬들였다. 악의에 인이 박인 자였지만 단순히 무기를 쓰기 위해 고용된 자였다.
“뭐, 뭐야! 으악-”
옆에서 혼비백산한 운전석의 남자가 혼비백산해서 차에서 뛰어내리려다 화희가 닫은 차 문에 다리를 찧고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주위 주차된 차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저 새끼 뭐-”
누군가 외쳤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화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러진 놈들을 내려다보았다. 걔 중 가장 의지가 또렷한 놈을 골라 사념을 들여다보았다.
이놈들이 벌써 여섯 번째 다리였다.
서태산과 강우량이 찾아낸 생매장당할 뻔한 트럭 기사들로부터 시작된 연결 고리였다. 기사들에게 연락한 자, 그자를 사주한 자, 그자가 속한 조직의 윗선, 여섯 단계를 거쳐서 드디어 ‘주도한 자’에게 닿았다.
시간과 인내, 능력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수아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선의’나 ‘명분’, ‘정의’ 같은 건 항상 ‘악의’보다 늦는다는 것이다.
막상 맞닥뜨리면 그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이들이 가진 악의만은 단단하고 굳건하며 심지어 끝도 없이 진화했다.
단 몇 시간만 늦었으면 건물들은 무너지고 정부에 천부신의 협박이 먹혀들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눈 딱 감고 다 쓸어 버리면 좋을 것을, 왜 이리 먼 길을 돌아야만 하는 것일까.
<아무리 버러지라도 무슨 권리로 사람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해요?>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 것들이 과연 사람인가?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 해도 그의 근본적 의문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저런 놈을 보면 그의 의문은 깊어졌다.
이미 주차장의 총성을 들은 순간에 차에 올라타 도망치기 시작한 노정일은 그 와중에도 내일이면 과연 이 건물이 몇 층이나 남을까, 몇 명이나 죽을까 속으로 셈하고 있었다. 인두겁을 쓴 것 같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진심이었다.
화희는 먼 거리에서도 진하게 느껴지는 그의 악의 어린 사념을 읽었다.
노정일, 일명 노 실장은 악의를 즐기는 자였다. 남의 고통이 곧 자신의 즐거움이었다. 담이 약해서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못하는 대신 강자에게 붙어 자신의 악의를 대신 행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창 너머로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노정일이 차를 빠르게 몰아 화희를 향해 덤벼들었다. 혀를 찬 화희가 손을 뻗자, 차체에서 뻗어 나온 검은 그림자에 휩싸인 노정일이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화희를 아슬아슬 스쳐 지나간 차체에서 심하게 몸부림치던 노정일은 찰나 이를 악물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체념, 그리고 더욱 짙어진 악의.
눈살을 찌푸린 화희가 그곳을 돌아보았으나 노정일은 이미 엑셀을 끝까지 밟아 주차장 정중앙의 기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화희가 손짓하자 핸들을 잡은 노정일의 팔이 기괴하게 꺾여 비틀렸다.
순식간에 ‘쾅!’ 굉음이 울려 퍼지고 기둥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간 차가 기둥의 일부분을 들이박았다. 운전석 앞부분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지고 기둥이 부서졌다.
부서진 기둥으로부터 쩌저적 갈라진 금이 천장까지 뻗어 나가면서 우수수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이, 이사님-! 으악!”
놀라 달려온 김세원이 부르는 것과 동시에 기둥 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콰콰쾅-
시멘트 덩어리가 주차된 차들 위를 덮쳤다. 차들이 연쇄적으로 밀려나며 경보음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찌그러진 차 문을 연 화희는 기절한 노정일의 머리를 쥐고 잠시 들여다보다 휙 놓아 버리고 피가 묻은 손을 그의 옷깃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다 문신이 손등까지 타고 올라온 것을 확인한 그는 붉게 물든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지나치게 힘을 개방한 탓에 육체가 점점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귀가 먹을 것 같은 경보음 때문에 귀를 틀어막은 김세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다 놀라 물었다.
“설마 다치셨습니까?”
“건물이나 봉쇄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어.”
화희가 휙 걸어가 버리자, 김세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녕 이게 수습 가능한 선입니까?”
시멘트 잔해에 깔린 차 여섯 대, 반 시체가 된 범인 여덟 명, 커다랗게 뚫린 천장과 부서진 기둥 그리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고층 건물 한 채.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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