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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95화 (95/100)
  • 95화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쇠붙이가 옷을 뚫고 가슴팍을 찌르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문 윤성은 빈손으로 검날을 있는 힘껏 밀쳤다.

    “하지 마! 대체 무슨 짓이야?”

    그가 칼에 손을 댄 순간 화희가 손을 놓아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검을 던져 버리려던 윤성은 델 것처럼 뜨거워진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녹는 것처럼 스르르 흘러내리더니 바닥에 떨어지기 전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뭐야?”

    화희가 윤성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돌려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너를 위한 사념이었구나.”

    나를 위한 사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그의 시선이 윤성을 지나 허공에 닿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뭔가를 꿰뚫는 것 같은 눈빛에 순간 짙은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아까부터 자신을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게다가 이 칼은 뭐고?

    당황한 윤성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제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얼핏 스치는 걸 보았다.

    찰나였지만 그림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형상이었다.

    이런 걸 윤민형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화희가 그의 머릿속에서 끌어낸 생각 비슷한 것이었다.

    “서, 설마 이거 나와 관련된 거야?”

    칼날이 자신의 손바닥을 향하도록 검을 거꾸로 쥔 화희가 책상에 기대서 대답했다.

    “네 사념이 만든 미래였어. 검의 피는 과거 천부신의 피였고. 너와 닿은 시간이 연결되었으니 지금 본 네 미래가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윤성은 크게 뜬 눈으로 그와 검을 번갈아 보았다.

    “난 복수를 양보할 생각도 없고 무엇보다 너와 내가 본 이상 미래는 바뀔 거다.”

    “……내 미래?”

    “천부신을 죽이고 싶잖아?”

    내 미래라고? 내가 아버지를 죽이는 게 내 사념이고 내 미래라고?

    선뜻 와닿지 않는 화희의 말 가운데 ‘천부신을 죽인다’는 말만이 가슴에 콱 박혔다.

    아니라고,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놓은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았다.

    정신 병원에 갇혀서도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남자를 나는 증오하고…….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왜 하필 이 남자를 찾아온 거지?

    민수아를 구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고 ‘화희’를 찾은 건 무엇보다 천부신이 풀려난 것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불행의 원인은 천부신이다. 자신의 아버지란 사람은 자신만 불행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천부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던 건가. 그의 손에 묻은 피를 뻔히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 자신조차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아버지 때문에 제 손에 피를 묻힌 꼴이 되어 버렸다. 나는 증오하고 있다. 그 사람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다.

    분하지만,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주위에서 천부신과 대적할 수 있는 건 이 남자뿐이었다.

    자신을 천부신이 만든 수렁에서 꺼내 줄 수 있는 것도, 천부신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우연처럼 모든 것은 이 남자를 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남자와 엮이면서부터 환청과 환영도 시작되었다.

    윤성은 자신이 내린 결론이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등을 떠밀린 것처럼 물었다.

    “혹시 나도 당신처럼 힘이 있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이런 게 보이는 건가?”

    “넌 나보다 수아 씨와 가까워.”

    “가깝다니, 어떤 식으로?”

    잠시 뜸을 들이다 툭 내던지듯 말한 화희가 비릿하게 웃었다. 시니컬한 웃음이 불길한 전조 같았다.

    “불행한 일이 꼬이는 능력이랄까.”

    “그딴 게 무슨 능력이야?”

    “사고가 꼬이다 못해 예지까지 하는 걸 보면 뻔하잖아. 막으라고 닦달하는 거지.”

    “그, 그럼 혹시 내가 아버지를 막을 수 있…… 윽, 뭐 하는 거야?”

    “네까짓 게 무슨 수로?”

    단검의 날로 제 손을 툭툭 내리치던 화희가 불쑥 검으로 제 손바닥을 슥 그었다. 순식간에 살이 갈라져서 붉은 피가 흘렀다.

    그의 피보다, 제 피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는 화희의 표정이 더욱 섬뜩했다.

    “그놈을 막는 건 ‘나’겠지. 남은 건…….”

    눈살을 찌푸린 윤성이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는 순간, 화희가 검을 내던지고 그의 뺨을 꽉 움켜잡았다. 턱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윤성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검은 눈을 강제로 바라보게 됐다.

    “……으읏.”

    전처럼 살갗에 한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온몸이 굳었다.

    화희가 상처 난 손을 주먹 쥐며 억지로 벌려진 그의 입술에 피를 흘리듯 떨어뜨렸다.

    “숨은 쥐새끼를 끌어낼 미끼지.”

    “으윽…….”

    윤성이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절머리 치자 화희가 턱을 놓아주며 피 묻은 손으로 그의 볼을 툭 두들겼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피 맛이 끔찍했다. 그러나 윤성은 악착같이 피를 삼켰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끌어들인 것 같은 불행을 스스로 떨쳐 버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 * *

    민철은 아까부터 시계만 흘깃거렸다.

    그에게 있어 제일 상대하기 힘든 건 무심하면서 까다로운 걸 동시에 해낼 수 있는 그의 상관이었고, 그다음은 착하면서도 고집이 센 상관의 약혼녀였다.

    수아는 왔다 갔다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다 급기야 수맥을 찾는 것처럼 양 검지 끝을 세우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큰 사고가 일어날 장소에 내가 ‘놓이는 것’이라면 뭔가 느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음, 전혀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돕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으니까 제발 좀 앉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책상을 방패처럼 두른 채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민철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를 정신 없게 만들던 수아는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확실히 뭔가 있어. 어제부터 화희는 뭘 하는지 보이지도 않고, 의외로 입이 가벼운 민철에게 캐묻는 수밖에 없는데…….

    그녀는 모르는 척 슬슬 본론을 꺼내 보았다.

    “아, 당분간 윤성이에게는 천 회장이 싱크홀 주범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천 회장이 한 짓들도 막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갖고 있더라고요.”

    “어, 그거라면 윤성 군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그녀는 흠칫 굳은 민철을 응시하며 아니길 바라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풀려난 천 회장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윤성이는 아니겠죠?”

    “……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천부신과 가깝지만 그의 편에 서지 않을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정곡을 찔린 듯 시선을 돌린 민철이 어깨를 움츠린 채로 중얼거렸다.

    “윤성 군이 먼저 이사님을 찾아왔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연락도 안 되고요. 나도 좀 불안…….”

    “화희 씨가 그러라고 했단 말이에요?”

    “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수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민철이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리려 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아는 액정에 뜬 뜻밖의 이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주해린이었다. 얘가 연락할 땐 꼭 뭔가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불안한 예감이 더 커지기 전에 얼른 전화를 받자마자 해린의 들뜬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언니, 윤성이가 TV에 나와! 화면발 진짜 쩔어.

    “갑자기 무슨 소리…….”

    -언니, 뉴스 안 보는구나? 지금 TV 틀어 봐. 채널마다 다 나오는걸?

    핸드폰 밖으로 목소리가 들렸는지 민철이 놀란 표정으로 급히 프로젝터와 연결된 TV를 틀었다.

    곧 화면에 윤성의 얼굴이 가득 찼다.

    기자 회견 장소인 듯 단상 앞에 선 윤성을 향해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속보라고 뜬 큰 글씨 아래 윤성이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부신 건설 천부신 회장의 아들, 천윤성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건 제 아버지와 부신 건설에 대한 양심선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양심선언, 그 단어에 회견장 내부가 크게 술렁거렸다. 잠시 틈을 준 윤성은 대사를 외운 듯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지난 28일, **동 싱크홀 사고는 부신 건설의 부실 공사가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뿐 아니라 부신 건설은 15년 전…….

    수아는 손에 든 핸드폰도 잊고 화면 속 윤성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부신 건설 천 부신 회장의 장자, 천윤성’ 그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적의에 찬 그의 눈빛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언니, 근데 그 냄새나는 아저씨가 만두를 어떻게 하는 건 아니겠지? 여보세요? 언니?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해린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윤성의 양심선언은 대놓고 천부신을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뭔가 잘못됐다. 수아는 불길한 느낌에 온몸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때, 귓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안 돼!’

    자신의 비명이었다. 순간 TV 화면 대신 다른 장소가 눈앞에 보였다.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사방이 무너진 고층 건물 안이었다. 뚫린 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허공이 아찔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려 무덤처럼 쌓인 돌 더미 옆에 윤성이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서 천부신이 섬뜩하게 웃으며 커다란 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유, 윤성아!’

    남자들에게 팔다리를 붙잡힌 채 바닥에 무릎 꿇려 있던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어깨 너머로 그녀를 돌아본 천부신이 이를 드러내며 대놓고 비웃었다.

    ‘내 아들마다 홀리다니, 창녀 같으니……. 무능한 네년은 이번에도 아무도 구하지 못할 게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천부신이 돌을 내리쳤다.

    ‘안 돼!’

    비명을 지른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결박을 뿌리쳤다. 순간 팔을 붙잡은 손이 느슨해졌고 수아는 피를 흘리는 윤성을 보며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윤성의 머리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눈에 아프게 박혔다.

    죽이고 싶다. 나쁜 놈, 죽여 버릴 거야.

    순간적으로 치솟은 분노가 그녀의 마음을 온통 검게 물들였다.

    자신의 비명에 귀가 멀 것 같았다.

    “민수아 씨? 괜찮습니까?”

    민철이 희게 질린 채 헐떡거리는 그녀를 흔들었다.

    퍼뜩 정신이 든 수아는 눈을 깜빡였다. 무너진 건물과 자신의 비명, 죽어 가는 윤성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게 뭐지?

    설마……?

    수아는 무표정한 화면 속의 윤성을 거듭 쳐다보다 급히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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