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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94화 (94/100)

94화

* * *

막 찻잔을 내려놓으려던 수아가 눈만 깜빡거리며 화희를 쳐다보았다.

“……잘못 들은 거면 좋겠는데요.”

“먼저 상의를 하고 싶었지만 반대할 게 뻔…….”

뜨거운 김이 나는 찻잔을 위험천만한 물건처럼 쳐다보던 화희는 그녀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자 흠칫 말을 멈췄다.

볼을 부풀린 수아는 팔짱을 끼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숨기거나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찻잔을 탁자 끝으로 밀어 놓은 화희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딱히 숨긴 건 아닙니다. 지금 말하고 있으니까…….”

“말장난하기예요?”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 그가 고개를 숙이자 수아는 진정하려고 애쓰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풀려난 천 회장이 나쁜 짓을 하면 어떡해요? 제일 먼저 당신을 해치려고 할 텐데.”

“나는 튼튼하니까 걱정 없습니다. 걱정하는 건 단 하나뿐이죠.”

불쑥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가늘게 뜬 화희가 그녀의 아래위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수아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는 화희 씨와 결계로 묶였다면서요? 화희 씨가 튼튼하면 나도…….”

“수아 씨 전체보다는 수아 씨의 한 부분이 문제죠.”

“어떤 부분이요?”

“오지랖 말입니다. 저번에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구하려다 같이 떨어질 뻔했죠. 끝까지 안 놓더군요?”

“……그렇다고 나만 살자고 놓을 수는 없……. 미안해요. 혼자 구할 능력도 없으면서 걱정 끼쳤네요……. 어, 그런데 지금 누가 혼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감히 수아 씨를 어떻게 혼냅니까?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니까 그놈만 잡아서 혼내 주면 됩니다.”

“음, 혼내 주고 싶은데 오히려 풀어 준 이유는 뭔데요? 천 회장도 풀려나자마자 숨어 버리면 어떡해요?”

무표정하게 설명하던 화희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그놈과 접촉한 자의 사념을 읽으면 됩니다. 지독한 사념은 남에게도 붙어서 따라오거든요.”

“사념의 흔적을 읽다니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사념이라는 건 어떻게 보이는 거예요?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도 보여요?”

“전혀요. 내 리딩은 주로 부정적인 사념에 특화되어 있어서.”

“음,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허허벌판에 깊고 좁은 구멍이 수없이 뚫렸다고 상상해 봐요. 그 안에 빠진 사람들이 악을 쓰는 거죠. 그저 중얼거리는 정도로는 내게 닿지 않아요.”

“왜 거기 들어가 있는데요?”

“힘든 상황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스스로 파고들어 갑니다. 나올 생각은 않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더 깊게. 소위 삽질한다는 거죠.”

“그래서 사념인가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생각.”

농담처럼 덧붙인 수아는 문득 그의 꿈에 빨려 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허허벌판에 나무처럼 뿌리박혀서 수많은 사람들의 악다구니를 강제로 들어야만 했던 꿈.

“그런 걸 들어도 괜찮아요?”

“상태가 안 좋을 땐 불쾌한데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쨌든 남의 일이니까.”

“그런 성격이라 다행이네요.”

“지금 욕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나는 화희 씨 꿈에서 잠깐 들었는데도 너무 괴로웠거든요. 화희 씨가 괜찮다니까 정말 다행이죠.”

“하아…….”

화희가 길게 숨을 내쉬며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왜요?”

“예뻐서. 그리고 너무 혼내지 말라고 비는 겁니다.”

얼떨결에 단단한 가슴팍에 안긴 수아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마음에 걸리는 걸 물었다.

“천 회장과 접촉한 사람은 어떻게 알아내요? 주도자도 찾지 못했는데 그 사람은 찾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화희의 손길이 멈칫 굳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며 대답했다.

“사람을 붙일 겁니다. 천부신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재난을 주도하려 할 테니까.”

“맞아요, 그 사람 신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접촉- 으읏!”

뭔가 더 걸리는 게 있는데. 수아가 더 자세히 물으려고 하는 순간 화희가 그녀를 바짝 끌어당겨 소파 위에 눕혔다. 머리 옆으로 팔을 짚은 그는 고개를 숙여 짓궂게 그녀의 목덜미를 입술로 깨물며 말을 돌렸다.

“당신과 내가 어떻게 결계로 이어지는지는 안 궁금합니까?”

“결혼은 현생을 묶는 거고 음, 그…… 교합은 육체와 힘을 연결한다면서요.”

“배운 걸 잘 기억하다니 착한 학생이군요. 그럼 이론 말고 실기로 가 볼까요? 결혼할래요, 아니면 섹스할까요? 아무래도 좀 불안해지는데.”

“자, 잠깐만요! ……으읏, 간지러워요.”

수아가 그의 어깨를 밀쳤으나 화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 여기저기 예민한 곳을 지분거리는 통에 그녀의 머릿속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대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걸 보니 더 이상 말할 기색이 아니었다.

나중에 강 변에게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천부신에 대한 그의 증오는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알았다. 그런 화희가 그렇게까지 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아는 잠시 머릿속에 생각을 미뤄 두고 못 이기는 척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을 마주 포갰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얼른 이 일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빌면서.

* * *

“안 돼!”

윤성은 자신의 고함에 잠에서 깼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너무나 현실 같은 악몽을 꿨다.

P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회장 안이었다. 수많은 정‧재계 사람들이 모여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장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고 바닥이 푹 꺼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아래층으로 떨어지거나 무거운 돌 더미에 맞아 죽었다.

건너편 건물에서는 천부신이 망원경을 통해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지켜보며 매우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돌무덤으로 변해 가는 회장 안으로 민수아가 나타났다.

밖으로 도망쳐도 시원찮을 판에 반대로 뛰어 들어온 그녀는 쓰러진 ‘누군가’에게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밖으로 끌어내려고 애쓰다가 붕괴된 천장 잔해에 깔려 죽었다.

윤성은 악몽 속에서 그 누구보다 수아의 고통과 두려움을 온전히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겪었다.

개꿈이라고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사람들이 죽는 사고에 있게 된다는 민수아의 말이 떠올랐다.

<나랑 있으면 위험해지거든.>

혹시 수아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어제 싱크홀 사고로 도배된 뉴스를 봤기 때문에?

하지만 어째서 아버지가 나왔을까? 마치 건물이 무너진 게 그의 짓인 것처럼.

윤성은 혹시나 해서 포털 사이트에서 ‘P그룹 창립 50주년’을 쳐 보고 기함했다.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1주일 후 5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장소도 그가 꿈에서 봤던 건물이었다.

본능적인 감이 강하게 주장했다.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어릴 적 고아원 원장이 살해당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윤성은 궁지에 몰린 것처럼 헐떡이면서 제대로 생각하려 애썼다.

이 일을 누구에게 알려야 할까? 하지만 누가 믿어 줄까. 정말 꿈처럼 아버지가 무슨 짓을 꾸미는 거면 어떡하지? 하지만 아버진 미쳤잖아. 미쳐서 정신 병원에…….

이때 갑자기 무슨 불길한 신호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김세원 검사였다.

-내가 깨웠습니까?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요?”

-소식 들었습니까? 천 회장이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한 시간 전, 병원에서 나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충격받은 윤성은 세차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되묻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그게 가능해요? 미, 미쳤잖아요.”

-갑자기 멀쩡해졌답니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요.

“……몰랐어요.”

-천 회장이 윤성 군을 찾아갈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가 접촉을 시도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요.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몰랐다.

마, 말도 안 돼. 분명히 미쳤었는데 멀쩡해졌다고?

아버지가 미친 건 꾸며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미쳤던 건 애초에…….

그럼 미치게 만든 사람이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그래, 그라면 가능할지도.

멍하니 핸드폰을 들고 있던 윤성은 뇌리에 스친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HH 재단 이사실에 아침부터 윤성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으나 화희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 만류하던 비서를 눈짓으로 내보낸 그는 책상에 기대서서 윤성을 빤히 훑어보았다.

이사실을 가로질러 화희에게 달려간 윤성은 소리 지르며 따졌다.

“당신이지? 당신이 풀어 줬지?”

“그게 왜 궁금하지?”

“왜 궁금하냐고? 그야……!”

너무나 여유롭고 당연하다는 태도에 윤성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목적어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대답하는 걸 보면 그가 한 짓은 맞는 것 같았다. 윤성이 올 것도 예상했던 것 같고.

반박하거나 화를 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놀란 마음과 충격이 오히려 가라앉았다. 태연한 그의 태도에 안심이 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의미 없이 이사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꿈을 꿨어. 수아 누나가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죽는……. 그런데 그게…… 아버지 짓이었어.”

“그래, 죽겠지.”

“뭐? 아무리 꿈이라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

팔짱을 낀 채 코웃음 치던 화희가 돌연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쉬워? 고작 한 번 봐 놓고 징징거리는 주제에, 감히.”

“그, 그럼 왜 그랬는데? 아버지가 누나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기나 해? 아버지가 풀려나면 제일 위험한 건 누나…….”

“알아. 그래서 가장 빠른 길로 타협을 택했을 뿐이야. 네 아버지가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을 벌이니 어쩔 수 없잖아.”

“일을 벌이다니? 그럼 꿈이 정말 일어날 일이라는 거야?”

대답 대신 찌푸린 얼굴을 펴고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소를 지은 화희가 윤성을 다시 아래위로 훑었다.

“그렇다면 넌 수아 씨를 구하기 위해 뭘 할 수 있는데?”

가치를 평가하는 시선에 윤성은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낙인찍히는 것 같았다.

모욕감에 얼굴이 붉어진 그가 이를 악물자 화희가 윤성의 머리 위에 시선을 둔 채 말에 힘을 주었다.

“나는 다른 사람 따윈 어찌 돼도 상관없어. 수아 씨만 무사하면 돼.”

“그런 비겁한 말이……!”

“그래서 넌 뭘 할 거냐고 묻잖아. 아버지한테 빌게?”

“…….”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면 들어준다던가? 네가 친애해 마지않는 양아들이니까?”

가시 돋친 빈정거림에 모욕과 좌절감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윤성이 이를 악물고 노려보자 팔짱을 푼 화희가 갑자기 책상에 팔을 뻗어 뭔가를 집어 들었다.

“그리 네 아버지가 풀려난 게 분하면, 풀어 준 나부터 어떻게 해 보지 그래?”

윤성은 그의 손에 들린 게 단검이라는 걸 깨닫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화희가 먼저 윤성의 손목을 틀어쥐고 바짝 끌어당겼다.

윤성은 제 손에 억지로 쥐어진 단검을 질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단검의 칼날엔 오래된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이, 이건 누구 피지?

칼을 쥔 손가락을 부러뜨릴 듯 악력이 센데도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화희가 그의 손을 쥐고 제 심장 쪽으로 거침없이 칼끝을 가져다 댔다.

“정확히 여기를 찌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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