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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93화 (93/100)
  • 93화

    “봐라, 하늘이 노하셨다! 제발 그만두지 못하- 으윽!”

    기어코 기를 쓰고 일어난 무녀가 그의 팔을 붙잡았으나 부신은 그녀의 뺨을 후려쳐 쓰러뜨리고 배를 걷어찼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붉은 피가 흘렀다.

    “멍청하긴, 신이 계신다면 고작 이런 나무에 뜻을 두시겠느냐? 보아라, 내가 이것을 없애고 대신 신을 받들 것이다!”

    콰쾅, 부신이 도끼질할 때마다 벼락이 쳤다. 어두운 세상이 잠시 번쩍거릴 때마다 여인의 다리 사이에 흐르는 피가 기이하게 빛났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비명도 벼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부신의 귀에만 들렸다.

    “신이시여, 무엄한 모욕에도 왜 가만히 계시옵니까? 신과 저를 유린한 저 짐승 놈에게 부디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급기야 고통에 쓰러진 여인은 하늘을 향해 악을 썼다.

    그때였다.

    콰콰쾅,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강한 벼락이 내리쳤다. 지축이 흔들리고 귀청이 나갈 정도였다.

    벼락은 부신이 도끼로 찍어도 꼼짝 않던 수호수에 곧장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불이 붙었다.

    그것을 보고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던 무녀의 다리 사이로 피가 섞인 양수가 터졌다.

    그녀의 고통이 기꺼워 큰 소리로 웃던 부신은 몸을 떨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온갖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 주세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뒤섞인 사람들이 그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 같았다.

    부신은 머릿속을 찢어발기는 악다구니에 귀를 틀어막았다. 그사이, 벼락을 맞은 나무가 새까맣게 타 쓰러지고 그 옆에서 죽어 가는 무녀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핏덩어리를 낳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울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불이 붙은 수호수를 고스란히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기절한 무녀를 한쪽으로 치운 부신은 홀린 듯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어미의 피와 양수를 뒤집어쓴 얼굴은 잘 빗은 조각처럼 표정이 없고 반질반질한 눈은 초점이 또렷했다. 칠흑처럼 새까만 눈동자에 유성처럼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이상했다.

    어느새 머릿속에 들리던 악다구니는 사라지고 무거운 적막이 그를 짓눌렀다.

    번뜩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수호수는 흔적도 없고 백골이 된 무녀의 시체가 보였다. 신성한 숲은 불에 몽땅 타 버린 것처럼 검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찰나에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어, 어떻게 된 거지?”

    놀란 부신이 다시 아기를 돌아보았을 때 갓난아기 대신 네다섯 살가량의 남자아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설마……?

    그는 아이가 무녀가 낳은 핏덩어리가 자란 것임을 직감했다. 시간을 건너뛴 것은 범상치 않은 이 아이의 힘이리라.

    부신은 떨리는 손으로 흰 피부에 눈동자가 유난히 검게 빛나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감격에 겨워 목이 메었다.

    “너, 너는 신이 내리신…… 나의 아이다!”

    신이 내게 신묘한 아이를 하사하신 것은 나의 뜻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화희라 명명하였다.

    화희(火戲), 불의 유희란 뜻이었다.

    자신의 성은 주지 않았다. 그는 하늘이 내린 더없이 귀중한 도구였으므로.

    부신은 아이를 품에 안고 단언했다.

    나의 뜻이 곧 신의 뜻, 나는 신의 사명을 받드는 것이다.

    하여, 이 신당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모두 불 싸지르리라.

    그 후 20년 동안, 정말 신은 그의 편을 들어 주셨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화희는 스러지는 나라를 뒤엎고 사람들의 정점에 서려는 부신에게 있어 완벽한 무기였고 명분이었다. 군신(軍神)이자, 예언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검으로 사한 것은 부신 자신이 되었다. 그가 공들여 쌓은 황궁을 무너뜨리며 화희가 일갈했다.

    <나는 멸하는 자일 뿐, 너의 검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 네놈이 없애야 할 악의와 업이 되었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한낱 계집의 손에 숨이 끊어지면서 천부신은 악에 받쳐 생각했다.

    화희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신이 내리신 아이가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나를 버리다니.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억울하고 분통하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신의 뜻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어찌나 원한이 강렬하고 지독한지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부신은 생마다 자신의 의식 한구석에서 기생하며 악다구니 쳤다.

    그런 그의 의지가 통한 것일까. 누군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마치 신의 속삭임처럼.

    ‘……어디, 네 마음대로 발버둥 쳐 보려무나. 끝은…….’

    부신은 눈을 번쩍 떴다.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갑자기 현재의 기억이 그에게 쑤셔박혔다. 다만 의지는 멍청하고 겁 많던 천 회장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 나는 왜……!

    오랜 시간 갇혀 지내던 ‘의식’처럼 좁고 꽉 막힌 방 안에서 버둥거리던 부신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 신이……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구나!”

    짙은 어둠에 싸인 방 안에 조금 열린 문틈으로 빛이 스며들어 왔다. 마치 신이 인도하는 것처럼.

    * * *

    한밤중, 야산에 둘러싸인 저수지는 달빛조차 잘 들지 않아 사위가 매우 어두웠다.

    오래전 물이 메말라 버린 저수지니만큼 바닥이 딱딱해야 하는데 갓 흙이 쌓인 것처럼 부드럽고 푸석푸석했다.

    발끝으로 바닥을 푹푹 찔러 보던 서태산이 한 발짝 뒤에 선 강우량에게 물었다.

    “여기 맞는 것 같지?”

    “그래, 느낌이 오는구만. 아직 따끈따끈해.”

    못마땅하게 주위를 둘러본 강우량이 고개를 끄덕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함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쭈그리고 앉은 둘은 흙 위에 손을 얹었다. 땅이 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점차 말캉말캉 진흙탕처럼 변해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서태산이 힘겨운 듯 끄응, 힘을 주자 흙이 파도처럼 물결치다 한순간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아, 잠…… 으악!”

    강우량이 버럭 짜증을 냈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부터 흙을 몽땅 뒤집어쓴 그의 몰골을 확인한 서태산이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미안하이. 오랜만이라서 힘 조절이 안 돼…….”

    “빌어먹을 영감탱이, 힘을 뿜을 데가 따로 있지. 간만에 외출한다고 목욕재계까지 했거늘…….”

    “아, 아직 내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하하핫!”

    투덜거리며 머리를 털던 강우량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겸연쩍게 헛기침을 한 태산은 얼른 깊게 팬 웅덩이를 가리켰다.

    흙 속에 파묻힌 다섯 개의 커다란 자루가 얼핏 보였다.

    휙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루를 만져 본 태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무서운 놈들이구만. 어떻게 사람을 산 채로 묻어?”

    “그래, 이걸로 어떻게 한다는 거야?”

    강우량 역시 자루를 조금 뜯어 기절한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원,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구만.”

    “싱크? 조크? 아무튼 그 탱크홀을 지시한 놈을 추적하는 거지. 이놈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주한 놈이 나올 테니까.”

    “그럼 자기가 직접 하지, 그 귀신 놈은 어디 갔는데?”

    “다음 탱크홀이 어디서 어떻게 생길지 모르니까 시간을 번다던데?”

    “빌어먹을, 내가 그 귀신 놈 시종도 아니고.”

    “중요한 건 도움인 듯 도움 아닌 도움 같은 거라네. 우리는 인간사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반면 재난을 막는 것도 필요하니까.”

    먼저 웅덩이 위로 뛰어올라 손을 털던 강우량이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자 서태산은 손을 내저으며 일침을 가했다.

    “이봐, 난 자네에 대해 암말도 안 했다네. 자네가 지레 쫄아서 분 거지! 그렇게 티 나게 숨어 버리면 뭐가 있구나, 여기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쪼, 쫄긴 누가 쫄아? 그저 나는 이제까지 그 귀신에게 병원 신세 진 값을 갚는 것뿐이라고.”

    “이왕지사 그럼 그 종자 신부가 납치당했을 때 자발적으로 도와주지 그랬어? 수아는 아주 착한 앤데.”

    “천 년 전이나 신녀였지, 지금까지 그런 줄 누가 알았는가? 아주 평범해 보였단 말일세.”

    “정말 하늘의 뜻은 알 수가 없어. 대놓고 이런 계획이다, 딱 말해 주면 좀 좋아?”

    “아, 왜 자꾸 내 터전에서만 일이 벌어지는가 몰라! 그러니까 자꾸 그 귀신 놈이 찾아오잖아, 아주 오금이 저리다고.”

    자루를 조금씩 뜯어 숨구멍을 뚫어 놓은 후 웅덩이에서 펄쩍 뛰어오른 서태산이 갑자기 손바닥을 마주쳤다.

    “귀신 같은 종자가 그런 꿍꿍이 때문에 육신에 뚫린 구멍을 안 닫고 있었나 봐! 누가 오만방자한 그 종자 혼꾸멍 좀 안 내 주나?”

    “혼 구멍 뚫린 그놈을 누가 혼꾸멍낼 수 있겠나? 보니까 묵은 혼을 되찾아서 인간과 완전히 멀어졌던데!”

    “그러니까 신녀가 아주 중요한 거지. 그 종자가 검이라면 신녀는 방패인 셈이니까. 팔불출이 괜히 팔불출이 아니었어.”

    바스락. 으아아앙- 어디선가 날카롭게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적막한 저수지에 울려 퍼지자 둘은 화들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으, 으악-!”

    엉겁결에 소리 질렀던 강우량이 민망한 듯 얼른 입을 다물었으나 서태산 또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검은 들고양이 한 마리가 안광을 새파랗게 빛내며 지나갔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서태산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제 양팔을 어루만졌다.

    “사람일까 봐 놀랐구만. 이런 오밤중에 사람과 마주치는 게 제일 무섭지.”

    “암, 그렇지. 요즘 시대에 너무 적응이 잘됐나, 이렇게 컴컴하니 으스스하구만.”

    희게 질린 서로의 면면을 마주 본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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