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92화 (92/100)

92화

* * *

“네놈은 여전히 똑같구나.”

화희는 침대맡에서 한참 구속복에 묶인 채 약에 취해 잠든 중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과거 그의 아버지이자 황제였고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회사의 회장이지만, 어떠한 위치에 있었건 지금은 비루하고 추한, 정신 나간 인간일 뿐이었다.

그를 처치하기 전 의식을 뒤졌을 때 별다른 계획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쌓아 놓은 것들이 무너질까, 빼앗길까 오기와 두려움만 가득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잠재된 사념이 부추겼을 확률이 높았다.

과일이 한번 썩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전체가 다 썩어 버리듯, 지금의 천부신에게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업이 쌓인 인과응보, 천벌로 혼이 썩어 들어가 심신에 구더기가 들끓어도 그는 매 생마다 악행을 반복했다. 참으로 질기고 더러운 목숨이었다.

그래, 자신은 그의 ‘질긴 목숨’을 간과하고 있었다. 수아의 전생을 통해 다른 시점으로 천부신을 들여다본 순간 그가 이토록 쉽게 끝날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부신을 막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택했던 수아는 몇 번의 생 동안 사람들을 구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혹한 응보는 현재까지 지속됐다.

악독한 천부신을 죽인 죄가 그리도 크다고? 그럴 리 없었다.

만약 벌이 아니었다면?

늘 한 발 차이였다.

인재는 범인이 움직이기 전까지 예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범인보다 늦었고, 그녀를 구할 시간이 모자란 것뿐인지도 몰랐다.

이번 생의 수아는 그 ‘한 발’ 차이를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리고 선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행한 선행들은 늘 그녀를 구하기 모자랐던 ‘찰나’를 벌어 주고 있었다.

그래, 그녀가 사기가 들끓는 곳에 놓이는 이유는 과거의 죗값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을 봐야 하는 그의 벌이 아니라, 모종의 계획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었다.

민수아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목적인 자신과 사기가 들끓는 장소에 끌려가는 그녀가 만난다면, 재난을 막을 수 있으니까.

의심이 들어 수아와 처음 만났던 3년 전 옥외 광고판 사고까지 들여다보니 어김없었다. 간판이 떨어진 건 건물을 지탱하던 뼈대 철골이 부실한 탓에 휘면서 받침 기둥까지 비틀렸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가 몇 층이 통째로 무너질 판이었다.

원인을 파악한 건설 회사가 언론을 통제하고 수리했으니, 결국 광고판이 떨어지면서 더 큰 재앙이 막아진 셈이었다. 부신 건설이 최초 시공사였다.

어제 싱크홀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제 잡은 김동석은 10년 전 천부신에게 몇몇 도로 지반에 하수도 누수를 유발하도록 지시받았다. 살해된 부신 건설 관련 공무자들은 이런 사실을 눈치채서 살해당했고.

오래전부터 지진과 다름없는 재앙을 일으킬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더러운 놈이었다.

화희는 천부신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박살 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일단 네놈이 벌인 일부터 처리해야겠지.”

그를 막지 않는다면 수아는 재난이 일어날 곳으로 무작정 끌려다닐 테니까.

천부신의 조각난 의식을 뒤져 봐도 명령을 내리는 장면만 있고 대상과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해야 한다. 귀신 같은 놈이 알아채지 못하게.>

일을 주도하는 천부신의 수족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추적하는 동안 그 수족이 또 다른 재난을 벌일지 모르니, 당장 주도하는 자부터 바꾸는 게 최선이었다. 일종의 ‘덫’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천부신을 노려보던 화희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잘게 찢어진 현재 천부신의 의식을 모으는 대신 아예 없애 버렸다. 그러면 이제 재난을 준비한 ‘사념’이 천부신을 장악할 것이다.

“그래, 복수라. 그것 또한 좋겠지.”

어차피 이렇게 될 바에는.

단검이 천부신의 이마 정중앙에 날카롭게 꽂혔으나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괴로운 듯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천부신을 노려보던 화희는 아쉽게 검을 거두고 병실을 나섰다.

달칵, 조금 열린 병실 문틈으로 깨어나는 천부신의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 * *

부신은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을 증오했다.

가난 때문인지, 사생아였기 때문이든지, 그를 낳은 부모는 하필이면 그를 신당에 버렸다.

수호수를 모시는 신당에서는 무녀가 권력 그 자체였고 신민은 넘쳐났으며 부신과 같은 시종은 수가 적고 제일 하층이었다.

수호수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녀, 신의 말을 전하는 신관은 황족으로 무녀보다 월등히 높은 위치였으나 해마다 한 번씩 올 뿐 먼발치에서라도 본 적은 없었다.

부신은 신당에서 오로지 무녀와 신민들과 지냈는데 그들은 그를 짐승처럼 부려 먹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갖 잡일에 심부름을 시켰고 트집을 잡으며 매타작은 예사였다. 그럼에도 겨우 연명할 만큼만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갈수록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몇 해째 가뭄이 들어 나라 사정은 궁핍해졌으나 신민들과 무녀들은 사람들이 갖다 바친 공물로 윤기가 흘렀다.

굶주리고 학대받을수록 부신의 증오는 날마다 커져 갔다. 자신을 멸시하는 이들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그는 날마다 신에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발 힘을 주십시오! 멍청한 저들보다야 제가 낫지 않습니까?”

당연히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부신은 신당 안의 수호수로 눈길을 돌렸다. 신녀와 신관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내러 오고 평소 무녀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수호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이 보낸 사자라고 전해졌다.

수호수는 때마다 형태를 달리하는데 이번은 나무였다.

근처에 가는 것마저 허락받지 못했지만 부신은 깊은 밤을 틈타 몰래 수호수를 엿보았다.

저딴 게 수호수라고?

신당의 신성한 숲 한가운데,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모를 거대하고 늙은 나무가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그는 배고파 굶주리는데도 나무 앞 단상에는 먹을 것과 비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딴 나무보다 못하다고?

기가 막힌 부신이 한참 쳐다보는데 누군가 뒤에서 호통쳤다.

“어찌 천한 것이 감히 이곳을 드나드느냐? 내 너를 고해바쳐 쫓겨나게 할 것이다!”

하필 유난히 그를 못살게 굴던 무녀였다.

여기에서 들켰으니 끝장이었다. 겁에 질린 부신은 이렇게 쫓겨날 바에야 그간의 원한이라도 갚고 싶어졌다.

그는 무녀의 입을 틀어막고 보란 듯 수호수 앞에서 잔혹하게 겁간했다.

평소 그를 멸시하던 여자를, 그녀가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수호수 앞에서 짓밟는 짓은 희열 그 자체였다.

겁간 후 고해바치면 죽이겠다고 무녀를 협박해 놓고 며칠 칼을 품은 채 숨어 지낸 그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에게 겁간당한 무녀는 부정해졌다며 쫓겨날까 두려워 그를 상관에게 고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신이 자신에게 응답해 준 것만 같았다. 원하는 것을 직접 쥐여 주지는 않아도 방법을 가르쳐 준 것 같았다.

힘을 얻은 부신은 수호수에게 날마다 빌었다.

“힘을 주십시오. 저를 사람들의 가장 위에 서게 해 주십시오. 그리해 주시면 이들이 바친 것보다 몇 배 더 좋은 것을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수호수는 그 후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기근이 들자 가장 하급인 그의 끼니부터 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수호수에게 바치는 먹거리는 넘쳐났다.

굶주림이 극에 달하자 부신의 분노와 억울함 또한 극에 달했다.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겁간한 무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들통나 신당은 발칵 뒤집혔다.

“저, 저놈입니다! 저 짐승이 억지로 저를 범하였습니다!”

“감히 신을 모시는 신성한 무녀를 더렵혀?! 저놈의 사지를 잘라 돼지의 먹이로 주어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처럼 끌려온 부신은 흠씬 얻어맞은 후 팔다리가 잘릴 예정이었다. 처음엔 겁에 질렸지만 이판사판 악에 치받친 그는 몽둥이를 빼앗아 신민의 대가리를 후려치고 달아났다.

그러나 신당을 벗어나도 갈 곳이 없었다. 그가 아는 세상은 신당이 전부였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너희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처음부터 날 짐승 취급 한 건 너희들이잖느냐! 그리하여 짐승 짓을 했기로서니, 뭐가 나빠서?

나 혼자만 죽을 순 없지.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그는 품속에 칼을 넣고 신당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집도 없이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우고 굶주림에 지쳐 풀을 뜯어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궁핍에 지친 좌절감은 점점 악으로 변했다. 이대로 굶어 죽을 바에야 원수라도 갚겠다고 결심한 부신은 신당에 잠입했다. 그리고 신민과 무녀들의 침소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놓았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들은 칼로 목을 그어 죽였다.

신당 전체가 곧 거대한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그들이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신은, 수호수는 그래도 침묵할 뿐이었다.

거봐라, 신은 내 편이다! 무능하고 멍청한 것들은 전부 죽으라는 것이 신의 뜻인 게다!

부신은 수호수 앞에서 기쁨의 춤을 추다 문득 궁금해졌다. 수호수를 베면 내가 그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신의 힘이 깃든 것뿐인데, 꼼짝도 못 하고 바닥에 얽매인 나무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내가 낫지 않은가?

그가 도끼를 찾아들고 나무를 찍기 시작했을 때, 어디선가 배가 부른 무녀가 뛰어왔다. 신당의 쪽방에 유폐되었다가 불이 번지는 바람에 뛰쳐나온 것이었다.

“감히 신께 무슨 짓이냐! 멈춰, 멈춰라! 신이 두렵지도 않으냐!”

무녀가 달려들어 말리자 부신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세게 부딪힌 그녀는 부푼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성인 세 명이 둘러 안아도 모자랄 만큼 거대한 나무는 그의 도끼질에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점차 성이 나고 있었다.

도끼가 나무에 꽂힐 때마다 무녀는 흙을 긁으며 비명을 질렀다.

“멈춰라,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이놈!”

어느새 날이 밝고 있었다. 그러나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의 빛을 가렸다. 천지에 태양 빛이 스며들지 못하고 어두웠으며 간간이 신의 고함처럼 벼락이 내리쳤다.

신의 노여움을 산 줄 안 부신은 순간 흠칫 떨었지만 이내 그것이 오히려 그를 부추겼다.

이제껏 아무리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던 신이 자신을 쳐다봐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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