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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91화 (91/100)
  • 91화

    두려워진 강우량은 입을 다물고 못마땅하게 화희를 노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옥상 아래 지상을 내려다보던 화희가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표정 없이 쏘아보는데도 화희의 눈에서 섬뜩한 이채가 번뜩였다.

    “그래서 네놈은 터전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정곡을 찔린 강우량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설마 알고 물었던 건가? 얼른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늦었다.

    답을 알아챈 화희가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었다.

    “다 알고도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단 핑계를 대면서 버티기만 할 거라면 차라리 죽어.”

    “……그, 그게 아니야. 나는…….”

    “범인이 움직이기 전까지 예지할 수 없다는 헛소리인가?”

    “아니…… 할 수 없는 거다.”

    고개를 저으며 강우량은 희게 질려서 중얼거렸다.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야. 너무 크고 너무 많다.”

    “……뭐?”

    “모래성처럼 다 무너질 거야. 너조차 막을 수 없을 거다.”

    갑자기 아래에서 괴로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대지가 괴로움에 몸을 비트는 소리였다.

    하아, 벌써 시작되는구만.

    화희 역시 뭔가를 느낀 것처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씁쓸함에 눈을 돌리던 강우량은 그를 돌아보고 흠칫했다.

    화희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몸을 엮고 있던 붉은 주술들이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특히 심장에서 뻗어 나온 굵은 사슬 같은 결계가 나풀거리며 어디론가 뻗어 가고 있었다.

    “너, 너, 네 혼으로 뭔 짓을…… 으, 으악!”

    강우량이 경악하여 손가락질했지만, 미간을 찌푸린 화희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휙 손을 휘둘렀다. 공중에 내던져져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아찔해진 강우량은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고 했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화희는 사라지고 시간이 멈췄다.

    “이, 이-!”

    아슬아슬 발끝에 난간이 닿은 채로 꼼짝없이 허공에 박제가 된 강우량은 이를 부득 갈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비, 빌어먹을 놈!

    그는 시간의 주박이 풀리자마자 난간에 발을 디디기 위해 팔을 휘저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 * *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발아래서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아스팔트 바닥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놀라서 달려오던 아이 엄마가 비명을 지르며 불쑥 튀어 오른 바닥에 걸려 넘어졌다.

    “선호- 아악!”

    “어, 엄마!”

    엄마를 발견하고 잔뜩 겁에 질린 아이가 그녀의 품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달려가는 아이 앞으로 땅이 길게 갈라지는 것을 본 수아는 급히 팔을 뻗었다.

    “안 돼, 잠깐만……!”

    몸을 날려 겨우 틈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잡아챘지만 그녀의 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기우뚱 기울었다.

    바로 눈앞에서 도로가 모래로 쌓은 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스팔트와 흙, 쇳조각이 뭉그러지고 으깨지는 굉음에 순간 귀가 먹을 것만 같았다. 흙과 먼지가 눈을 찌르고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이 끝없이 무너진 도로 아래로 산사태처럼 흙이 쏟아져 내렸다. 공포에 짓눌린 그녀는 차마 멀리도, 아래도 볼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아이만 붙들었다. 그녀의 손끝에 매달린 아이가 겁에 질려 울었다.

    “어, 엄마-!”

    “아래 보지 말고…… 으읏!”

    흔들리며 기우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수아는 아이라도 끌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무너져 내리는 바닥과 함께 속절없이 아래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러다 떨어지겠…….

    아, 안 돼……!

    점점 몸이 기울어지다 시커먼 구멍 아래로 확 쏠리는 찰나-

    갑자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굉음도, 비명도 사라지고 귀가 아플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몸을 짓눌렀다.

    모든 것은 회색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정지했다. 움직이는 것은 그녀 혼자였다.

    눈만 깜빡거리던 수아는 우는 모양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조각상처럼 꼼짝하지 않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회색의 세상에 붉은빛이 떠올라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촛불처럼, 작은 태양처럼.

    화희였다.

    저벅저벅.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수아의 손에서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 휙 던진 화희가 나직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이가 막 달려오려는 제 엄마 옆에 깃털처럼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수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가 휙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화희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모든 감각은 꿈처럼 멀게만 느껴지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각만 또렷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화희가 놀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웃는 듯 화를 내는 듯 묘한 표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물었었죠. ‘나와 결혼할래요, 섹스할래요.’ 이게 그 답입니다. 혼을 묶은 게 아니라 오래가지 않지만.”

    화희가 그녀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피로 만들었던 결계처럼 그에게서 뻗어 나온 붉은 사슬 같은 주술이 어느새 그녀의 몸을 칭칭 얽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됐군요, 귀 막아요. 시끄러울 테니까.”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지는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

    진공 상태의 공간에 공기가 밀려드는 것처럼 한꺼번에 날카로운 소음이 밀려들었다.

    흙이 무너지는 소리, 겁에 질린 비명과 고함, 차 경적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귀청이 나갈 것 같았다.

    수아는 화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를 구하느라 보지 못했지만 4차선에 걸친 도로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오토바이 때문에 출발하지 못했던 차들이 싱크홀 바로 앞에서 위험천만하게 미끄러지며 흔들렸다.

    몇몇 사람들이 차에서 뛰어내려 허겁지겁 뛰고 뒤쪽의 차들은 후진하려다 서로 부딪치며 뒤엉켰다.

    쩌저적-

    싱크홀로부터 시작된 균열이 거대한 뱀처럼 빠르게 뻗어 나갔다. 건너편 도로 끝에 서 있던 고층 빌딩이 순간 휘청이듯 기울었다.

    끼이이익- 한쪽으로 기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건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해요.”

    화희가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는 것과 동시에 반쯤 기운 건물의 유리창들이 터지듯 깨졌다. 날카로운 유리 잔재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다 사방으로 튀었다.

    “이, 이게 대체…….”

    화희가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비명이 터졌지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비딱하게 기운 고층 빌딩이 금방이라도 거대한 구멍 속으로 허물어질 것 같았다. 거친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 * *

    회의실 스크린에서 뉴스가 재생되었다.

    공중에 높이 뜬 카메라가 새까만 호수처럼 생긴 싱크홀을 연신 비추어 대고 있었다.

    - 도로 한복판에 갑작스럽게 싱크홀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낼 뻔한 아찔한 인재였습니다.

    민철이 화면을 끄자 서태산이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거운 트럭이 몇 대 지난다고 도로가 저렇게 쉽게 무너진단 말이야?”

    “그나마 다행이죠. 오토바이 사고 때문에 덤프트럭과 차들이 멈춰서 다행이지, 하중이 더 실렸다면 싱크홀은 훨씬 컸을 테고 28층 빌딩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아니, 대체 공사를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돼?”

    “대부분 도시에 생긴 건 부실 공사가 원인이죠. 지반의 성질이 약하거나, 지하수의 틈을 메우지 않았거나, 하수도의 누수로 좀먹었다거나. 알고도 공사를 했고 더군다나 이용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정확한 시기까지 예측할 수 없으니 ‘언제’가 중요하지 않다면요.”

    “이, 이게 다 뭔 일이야, 대체. 근데 나는 왜 불렀대, 나더러 뭐 하라고?”

    혀를 내두르던 서태산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희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평소처럼 표정이 없지만 유난히 눈빛이 찬 것을 본 민철이 벌떡 일어났다.

    “결과만 말해.”

    잔뜩 긴장한 민철이 서류를 넘기며 설명했다.

    “김세원 검사에게 넘겨받은 자료에 따르면 권영훈에게 살해된 피해자는 밝혀진 것만 총 다섯 명, 전부 부신 건설 공사의 감리나 공무 등을 맡고 있었습니다.”

    “부신 건설과 관련된 공사는?”

    “하청 업체이던 시절부터 따지자면 도로, 다리, 하수도, 댐, 하천 제방 등 전국적으로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다음 예상 지역은?”

    “그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부신 건설이 손댄 지역과 방법이 워낙 광범위하여 찾을 수 없습니다.”

    “강남 위주로 좁혀 봤나?”

    “뭐?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이야?”

    서태산이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화희가 차게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민철 역시 본능적인 두려움에 목이 메었으나 얼른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시뮬레이션 해 봤는데, 큰일입니다. 고층 빌딩이 밀집한 지역이라 하나만 잘못 무너져도 일대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가능성이 있답니다. 가스관 하나만 폭발해도 동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요.”

    잠시 회의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화희가 혀를 차며 손짓했다.

    “이번 건의 흔적은?”

    “네, 덤프트럭 운전자들이 모두 실종된 상태입니다. 전화와 CCTV로 발주처를 조사 중인데 모두 일인 사업자라서 연결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겠지.”

    비공식적인 방법이 있나? 민철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화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서태산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서태산이 턱을 긁으며 딴청을 피우다가 화희가 던진 말에 점차 뻣뻣하게 굳었다.

    “싱크호올? 뭔 말이 그리 어려워? 차라리 탱크가 더 어울리겠구만…….”

    “어제 같은 일은 앞으로도 반복되겠지. 그리고 수아 씨는 영문도 모르고 재난에 끌려다닐 테고.”

    “……그래서?”

    “그녀가 무사하지 않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

    “모든 게 끝나다니?”

    표정을 굳힌 서태산이 천천히 돌아보자 화희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말 그대로. 이번 생만큼은 혼자 억울해하지 않을 생각이거든.”

    “뭐야, 전생의 복수까지 하겠다는 거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나만 억울하면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마음에 걸려서.”

    “뭐라고? 누군 안 억울한 줄 알아, 엉?”

    눈을 부릅뜬 채 경악한 서태산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화희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재보다 더 무서운 놈 같으니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벌떡 일어난 서태산이 쿵쾅거리며 방을 나갔다.

    민철은 자신이 지금 뭘 들었나 의심스러워하며 화희를 돌아보았다.

    창밖을 응시하는 화희의 얼굴은 무심한 표정 그대로였지만 눈만은 살의로 짙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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