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90화 (90/100)
  • 90화

    * * *

    탁탁.

    어두운 골목길에 동석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소리를 죽이고 싶어도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범인 때문에 동석은 잠시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누가’ 쫓는 것인지는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왜’인지 모를 뿐이었다.

    이상했다. 분명 부신 건설은, 천부신은 망했다고 뉴스에 나왔는데.

    20년 전 건설 붐이 한창 불 때, 그는 지금의 부신 건설의 모체가 된 건설 회사에 취직했다. 당시에 회사는 인맥으로만 일을 따내는 건설 인력 사무소나 다름없었다.

    사장인 천부신은 협박이나 뇌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이비 교주나, 오른팔인 권영훈을 시켜 폭력으로 사람들을 짓밟는 깡패에 가까웠다.

    입사하는 날부터 동석의 후회는 시작됐다. 하청을 준 건설 업체 담당자가 공사비를 착복하기 위해 불량 자재를 쓰거나, 뒷돈을 받고 건물이 올라갈 부지에 폐기물을 묻는 것을 도와야만 했다. 그의 회사는 그런 더러운 일들을 도와주고 큰돈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아예 큰 건설 회사를 컨택해 주도하기 시작했다.

    양심에 걸린 동석은 몇 번이나 회사를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장과 권영훈은 그의 가족까지 건드리며 무섭게 협박했다.

    비단 동석뿐만이 아니었다. 천부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심한 경우 소리 소문도 없이 강도나 교통사고로 죽기까지 했다. 그에게 뇌물을 받은 고위급 관련자들이 많았기에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그리고 10년 전, 부신 건설의 사장이 된 천부신은 직접 동석을 불러 이상한 일을 지시했다.

    <봐라, 배포가 작다니 무슨 헛소리냐!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인 것을!>

    명령을 내린 후, 거울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는 순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해서인지 천부신이 미쳤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너무나도 두려웠던 나머지 동석은 시키는 대로 하고 말았다. 후로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다.

    제 차례가 머지않은 것을 즉감한 동석은 해외로 도망쳤다. 그 후로 지금까지 가족에게 연락도 하지 못하고 떠돌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살았다.

    뉴스를 보았을 때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천부신은 정신 병원에 수감 중이고 권영훈은 죽었다.

    더는 숨어 살 필요 없이, 내내 양심에 크게 걸렸던 일을 그만 털어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 꼴이 되었다.

    숙소 삼은 모텔 앞 골목에서부터 수상한 놈들에게 쫓기며 뒤늦게 깨달았다. 그 당시 ‘그 일’의 주체자가 한 명 더 남았다는 것을.

    노정일은 천부신의 왼팔 같은 자로서 건설 쪽의 불법 루트나 착복에 매우 지능적이었다. 유난히 천부신을 신봉했지만 워낙 권영훈이 실세 중의 실세였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도록 뛰면서 동석은 후회와 자책을 반복했다.

    지금까지 이러는 걸 보면 그 일은 아직 진행 중인가 본데 더 일찍 움직였어야 하는 건 아닌가.

    나 하나 입 다문다고 바뀌는 일도 없는데 그냥 끝까지 숨어 살걸.

    “하학, 이, 이러지 마! 사, 살려 줘, 제발!”

    뭐든 끝이 다가왔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른 동석은 공포에 질려 막다른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 둘이 헐떡거리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고 휘둘렀다.

    “씨발, 빨리 뒈져! 귀찮게 하지 말고!”

    늘 공포에 질려 상상하던 일인데 막상 닥치니 더 끔찍했다. 동석은 부들부들 떨며 홉뜬 눈으로 자신에게 뻗어 오는 칼을 쳐다보았다.

    “……큭!”

    더는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거센 힘에 떠밀린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어 억눌린 비명과 둔탁한 소리가 들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숨 쉬는 것도 잊었다.

    골목길 입구에 장신의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동석을 쫓던 놈들은 기형적인 모양으로 허리를 꺾은 채 쓰러져 있었다.

    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지? 어떻게 저, 저놈들을……?

    비현실적으로 나타난 건 둘째치고 남자는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슈트 차림인 데다 행동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눈만 내리깔아 쓰러진 놈들을 슥 훑던 시선이 겁에 질린 동석을 향했다.

    놈들과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다를 바 없이 무척 싸늘했다. 칼을 든 놈들보다 이 남자가 더 두려워진 동석은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저벅,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성큼 다가와 팔을 뻗었다.

    아니, 남자는 팔짱을 끼며 그를 내려다보았는데 검은색 그림자가 그를 향해 뻗어 왔다.

    “으아아악!”

    겁에 질린 동석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으나 막상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 * *

    평일 낮인데도 백화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적한 요양원과 화희의 집만 오갔던 수아는 낯설게 느껴지는 분위기에 새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와 상견례 예식 옷을 고르러 나온 참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공사 중이라 그런가 많이 밀리네. 먼저 들어가 있어.]

    막 엄마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그녀가 핸드폰을 보고 있던 걸 아는 것처럼 전화가 걸려 왔다. 근처에 볼일이 있다면서 그녀를 데려다주고 갔던 화희였다.

    -나 빼고 어머님과 쇼핑은 즐겁습니까?

    “차가 밀려서 좀 늦으신대요.”

    -아, 그럼 혼자 심심할 텐데 그리 갈까요? 일은 바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

    -방금 굉장히 싫은 기색이 느껴졌는데? 설마 기분 탓이겠죠.

    “어, 그, 음, 화희 씨 취향이 나랑 많이 다르잖아요.”

    말끝을 흐린 수아는 그와 옷을 골랐던 기억을 떠올렸다.

    창립 50주년 파티를 위해 수아가 고른 드레스를 보고 화희가 대뜸 눈살을 찌푸렸었다. 치맛단이 길게 트이고 등판이 없는 드레스가 과하다 싶긴 했지만 TV나 영화에서 보면 그런 자리에선 이런 걸 입는 것 같기에 고른 옷이었다.

    <거지 같은 여신 같네요.>

    <거지요? 지금 욕한 거죠?>

    <칭찬입니다, 여신이잖아요. 다 찢어진 옷을 걸쳤지만.>

    <……몰랐는데 취향이 참 보수적이네요.>

    <나도 몰랐습니다. 남이 뭘 입든 전혀 관심 없으니까. 수아 씨가 싫다면 취향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신사적인 미소를 띠며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눈빛은 ‘난 그 옷 진짜 싫다.’라고 레이저를 쏘는 것 같았다.

    라벤더 일색인 방과 옷장 안의 꽃무늬와 레이스로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옷들을 떠올린 수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원래 약속대로 세 시간 후에 만나요. 오늘만큼은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살 거예요.”

    -정말 무정하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화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뜸을 들였지만, 수아는 넘어가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 백화점 밖으로 걸어 나가던 그녀는 문득 캐주얼 매장 앞에서 멈췄다.

    성인 남자, 여자, 아이 마네킹이 크기만 다른, 같은 티셔츠를 입고 놀러라도 가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없는데도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 마네킹 얼굴에선 신난 표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이 마네킹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문득 전생의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전생에 자신이 그렇게 죽지만 않았다면 태어난 아이도 화희와 함께 이렇게 행복했을까?

    마네킹들을 홀린 듯 보던 수아는 머릿속으로 똑같은 티를 입고 있는 화희와 윤성, 자신을 떠올렸다.

    으악, 대체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이건 윤성이한테도 실례야!

    흠칫 닭살이 돋아 팔을 문지르던 수아는 혼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얼른 매장 앞을 지나쳤다.

    “공사한다더니 진짜 트럭이 많네.”

    택시 정류장 앞에서 송 여사를 기다리던 수아는 신호 대기 중으로 줄지어 서 있는 거대한 덤프트럭들을 질린 눈으로 보았다. 신호가 바뀌기 전인데도 출발하려고 시동 거는 엔진의 진동으로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엄마, 파란 불이야! 빨리 와!”

    횡단보도의 깜빡거리는 초록불을 쳐다보던 수아는 아이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다섯 살가량의 아이가 그녀의 곁을 지나 횡단보도로 뛰쳐나갔다.

    신호만 보고 무작정 뛰는 아이를 시선으로 좇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앞을 넘겨보았다.

    “어, 안 돼!”

    오토바이 한 대가 막 출발하려는 트럭들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러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오토바이에 치이기 직전인 것을 보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수아는 달려가서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끼이이익-

    그들을 발견한 오토바이가 방향을 틀었지만 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옆 차선으로 길게 미끄러졌다.

    이미 출발하려고 움직이던 차들이 오토바이를 피해 급히 멈추느라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4차선을 가로질러 길게 미끄러진 오토바이는 다행히 차와 부딪치지 않았지만, 덤프트럭과 차들이 한데 뒤엉켰다. 신경질적으로 울려 대는 경적 소리에 순간적으로 귀가 멀 것 같았다.

    “아, 괜찮…… 어?”

    품 안의 아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던 수아는 흠칫 놀랐다.

    착각인가? 방금 땅이 흔들린 것 같았는데.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서려던 그녀는 휘청거리며 도로 주저앉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연이어 바닥이 크게 흔들리고 눈앞의 땅이 거짓말처럼 기울었다.

    * * *

    화희는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잠시 웃었다. 그러나 곧 옆에서 들리는 호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힐끗 눈길을 돌렸다.

    “이, 이 건방진 인간 놈! 이, 이거 안 풀어?!”

    그에게 멱살을 잡힌 노인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노인의 발밑으로는 18층 높이의 허공이 아찔하게 펼쳐져 있었다.

    옥상 난간에 기댄 채 버둥거리는 그의 멱살에 힘을 준 화희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꼼짝 않고 누워만 있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욕창 생기기 전에.”

    “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말해.”

    멱살을 잡은 손이 위협하듯 흔들리자 발아래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본 강우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 대체 뭘 말하라는 거냐!”

    “다 나았으면서도 쥐새끼처럼 숨어서 꼼짝도 안 하는 이유.”

    “마, 망할 서태산 놈! 그놈한테 뭘 들었는지 몰라도 난 절대 말할 수 없다! 입방정을 떨면 인간사가 바뀐다고!”

    “내가 바꾸고 싶은 건 인간사가 아니야. 단 한 사람의 생이지.”

    성난 것처럼 억세진 손길에 목이 바짝 조여졌다. 강우량은 목이 졸린 채 인간의 육체에 수호수의 혼을 담은 남자를 마주 보았다.

    윤회를 거듭하며 많이 사그라들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수호수의 일부였다. 그 예로 도무지 놈한테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납치당한 제 신부를 구한다며 깨웠을 때도 그러더니, 왜 이 인간은 제 혼 값을 못 하는 게지? 그런 주제에 왜 육체에 난 구멍은 더 커지고 있는 게야, 마치 혼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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