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89화 (89/100)

89화

“힘들지? 나는 여기에서 기다리기만 하는데도 무섭던데.”

윤성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수아를 보고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러나 곧 겸연쩍다는 듯 눈을 굴리며 목소리를 깔고 대꾸했다.

“무섭긴 뭘, 죄지은 것도 없는데.”

“그럼 다행이고. 저기, 시간 있으면 같이 저녁 먹자.”

“왜 이래, 갑자기? 그렇게 만나자고 조를 땐 안 들어주더니.”

“그땐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거지. 그 사정에 대해 말할 것도 있어.”

“그럼 우리 둘만 가. 누나 남친이랑 같이 먹으면 체할 것 같으니까.”

윤성이 대놓고 화희를 눈짓하자 수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팔짱을 낀 채 둘을 지켜보던 화희가 못마땅하게 미간을 접으면서도 수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1미터. 내외 규정만 지켜 주면 난 빠져 주죠.”

“1미터요? 윤성이와는 내외할 사이가 아니…….”

“그러니까 반드시 1미터. 윤성이 생각은 수아 씨와 다를지도 모르니까.”

수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화희를 흘겼다.

“정말 이러기예요?”

“이럴 겁니다. 아까 차에서 내외 권리를 줬잖아요. 그래도 내가 손해죠. 나는 수아 씨에게 뒤를…….”

“다, 닥ㅊ……. 알았으니까 그만 다그치라고요!”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분명 닥치라고 한 것 같은데. 뭘 가지고 내기를 했기에 얼굴까지 빨개져서 욕을 할까.

……그런데 열심히 자기들 뒷수습을 해 준 건 난데 왜 나만 소외된 것 같지?

민철이 셋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사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은 윤성이 수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누나, 그만 가자. 배고프다.”

“어? 어, 그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대놓고 윤성이 1미터의 내외 규정을 어겼다. 그러나 의외로 화희는 눈썹을 치켜세웠을 뿐, 그를 막지 않았다. 들으란 듯 혀를 차며 중얼거리긴 했지만.

“앞이 깜깜한 주제에 보는 눈은 높아서.”

어라, 뭔가 관계의 판도가 크게 달라진 것 같은데. 멀어지는 수아와 윤성의 모습을 지켜보는 화희의 표정이 전과 다른 것처럼 느껴져 민철은 한참 셋을 번갈아 보았다.

* * *

수아와 윤성은 근처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음식을 주문한 후 수아는 할 말을 고르며 새삼 윤성을 자세히 살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친숙하거나 애틋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렇게 깊은 인연일 줄은 몰랐다.

윤성에게 느껴지는 특별한 애틋함은 실감 나지 않는 전생의 ‘아이’보다는 아마 피가 이어진 혈육이 있다면 느낄 수 있는 애정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윤성이 눈을 마주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괜찮아 보여서. 납치당했던 트라우마가 심할 수도 있다고 들어서 걱정했는데.”

“아, 너도 고생했잖아. 넌 괜찮아?”

“난 괜찮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지. 결국엔 내 아버지 때문이니까. 미리 막지 못한 내 탓도 있고.”

수아는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윤성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괴롭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보니 가슴이 지끈거려서 그녀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꺼내기로 했다.

“아니야, 넌 내 일에 휘말린 거야. 나랑 있으면 위험해지거든. 처음에 그래서 너와 거리를 두려고 했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위험해지다니?”

수아는 윤성에게 옥외 광고판 사고부터 **역 혐오 범죄, 유조차 충돌 사고, 끝으로 그와 겪었던 엘리베이터 사고까지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어쩌면 납치도 같은 맥락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사람들과 거리를 둔 건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지 내 잘못이라고 여겨서는 절대 아니었어. 나쁜 건 사람을 해할 의도를 가지고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잖아. 그러니까 너도 절대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아. 내 주위의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 같거든.”

그녀의 말을 고민하는가 싶던 윤성이 고개를 저으며 체념조로 말을 이었다.

“난 태어나면서부터 고아원에 버려졌어. 그것도 모자라서 고아원 원장은 살해당하고 이딴 집안에 입양되어 범죄에 이용당하고 있고. 게다가 누나한테도 나랑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었잖아.”

“……윤성아.”

“사실이니까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견딜 수 있거든. 아, 누나한테 얘기한 환청만 빼고. 그건 어떻게 안 되더라.”

“요즘에도 들려?”

“얼마 전에 누나 남친과 있을 때. 우습게도 이번엔 아버지 목소리였어.”

화희는 윤성의 환청을 듣고서 그녀의 ‘아이’에 대해 깨달았다고 했다. 천부신이 그녀에게 퍼부은 그들의 아이에 관한 끔찍한 저주였다.

<내 반드시 네년의 자식을 살인귀로 만들어 주마! 네년 뱃가죽을 가르고 꺼낸 귀물은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게 될 것이야!>

이건 기가 막힌 우연일까, 숙명일까.

천 년이 지난 현재에 천부신은 그들의 ‘아이’인 윤성을 불행에 빠뜨렸다.

화희가 있었기에 그녀에게 천부신은 지난 일이 되었지만, 윤성에게는 아직도 현재 ‘악’의 ‘구렁텅이’다.

이제까지 그가 양아버지인 천부신의 악행에 가담하지 않고 잘 버틴 것이 용했다.

수아는 천부신에 대한 분노가 새삼 끓어올랐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외롭고 힘들었을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우선 솔직하게 말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그녀조차 수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겨우 믿었던 화희의 말을, 윤성이 단번에 믿어 줄 리 없겠지만.

“네가 들은 환청은 우리의 과거와 관련이 깊어. 내가 겪고 있는 무서운 일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라니?”

“음,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전생에 나랑 화희 씨가 부부였는데…….”

“뭐, 전생?”

역시나 윤성은 말을 꺼내자마자 경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수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어, 그런 게 있더라고. 나는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자살해서 그 죗값으로 험한 일들을 겪는 거고 네가 듣는 환청은 전생에 내가 겪은 일인데…….”

“잠깐! 전생에 둘이 부부였는데 내가 깊게 얽혀 있다면, 뭐야? 내가 둘 사이의 자식이라도 된다는 거야?”

“어? ……응.”

“하,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불쑥 말을 막은 윤성이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수아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본 그도 곧 웃음기를 지우고 얼굴을 굳히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차마 천부신에 관한 건 더 말할 수 없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말하자 싶어진 수아는 겨우 말을 끝맺었다.

“우리는 널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이런 인연을 알기 전에도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썼겠지만,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줘.”

그녀의 말이 끝나도 윤성은 한참 말이 없었다. 어색해진 그들의 머리 위로 갑자기 명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만두, 너! 내가 두부 갖고 왔는데 먼저 가 버렸더라? 언니, 안녕!”

손에 뭔가를 든 채 팔랑거리며 뛰어온 해린이 테이블 앞에 멈춰 서더니 손가락으로 수아와 윤성, 그리고 자신을 차례로 가리켰다.

“어머, 근데 막상 보니까 이 조합은 좀 애매하다. 그러니까 이쪽이 엄마, 만두가 아기. 화희 오빠는 만두 아빠인데 나는 만두 아빠의 전 약혼녀니까…….”

여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대체 얘는 이런 걸 어떻게 알지? 수아가 기가 막혀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해린이 박수를 짝 치면서 외쳤다.

“어머, 그럼 내가 만두 새엄마가 될 뻔한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 그렇지? 말도 안 되지, 전 약혼녀니까 전 새엄마가 될 뻔했던 거지?”

“아씨, 새엄마 소리 좀 그만해!”

윤성이 급기야 벌컥 화를 내자 해린이 검지를 세워 흔들면서 혀를 찼다.

“쉿, 아가는 어른 얘기에 끼어드는 거 아냐.”

“그럼 고양이는 사람 얘기에 끼어들어도 되고?”

참지 못한 수아 역시 발끈하여 대꾸하자 해린이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 벌써 팔이 안으로 굽는 거예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음, 사실은 너한테 두부 주려고 쫓아왔는데 심각한 얘기 중이길래 기다렸어. 네가 소리 지르는 게 다 들리던걸? ‘뭐야, 내가 둘 사이의 자식이라도 된다는 거야!’ 가끔 만두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기로 보이던 게 그래서였구나, 싶었지.”

말문이 막힌 듯 해린을 올려다보던 윤성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심상찮은 웃음소리에 해린마저 움찔하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뭐야, 이거. 더럽게 재미있네.”

“만두, 너 왜 그래?”

“사람 같지 않은 그 남자가 전생에 내 아버……. 아씨, 이제 말이 돼? 어? 단체로 미친 게 아니고서야.”

웃는 그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수아가 그를 말없이 응시하자, 윤성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든, 적어도 외롭지는 않네. 미쳐도 혼자 미친 건 아니니까.”

* * *

서태산은 특수 치료 시설 병동, 가장 안쪽에 있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가 오랜 시간 의식이 없었는지 병실의 공기는 무겁게 정체되어 있었다.

‘우연’이 이 친우에게 이끈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 전, 화희와 헤어지고 걷다가 추워서 버스를 집어 타고 와 보니 오래 묵은 친우가 입원한 이 병원 앞이었다.

그때 친우를 깨워도 일어나지 않기에 다시 온 것이지만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근처에서 사 온 냉면 용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태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오랜 친우를 살펴보았다.

“강우량 자네…….”

못 본 사이 많이도 늙었다. 그래도 이렇게 식물인간처럼 꼼짝도 못 할 만큼은 아니었다.

친우, 강우량은 하필이면 그의 터전이 복잡한 도심이 되는 바람에 같은 연대 토지령 중 분신을 가장 빨리 잃었다.

그리고 터전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심하게 오염된 공기와 대지 탓에 늘 골골하며 만성 두통에 시달리다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태산이 주선해서 화희의 재단 산하의 병원에서 그를 돌봐 주고 있었다.

“자네가 몸져누운 게 부지를 매입하고 거기에 묻은 대량 쓰레기에서 나온 유독 가스 때문이었지?”

얼마 전, 천부신의 비밀 파일을 훔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이 친우의 터전이 오염된 건 부신 건설의 악성 공사 탓이었다.

다 알면서도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으므로 말도 못 하고 앓기만 했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부신 건설의 경영 비리에 관한 수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검찰은 새로운 증거와 증언을 확보함에 따라 천부신 회장의 불법 행위에 대한…… (중략) ……현재 천 회장은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보호 관찰 중입니다. 이러한 소식에 부신 건설 주가는 연일 급하락세로…….

병실 안에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뉴스 소리가 퍼졌다. 뉴스가 다른 주제로 넘어가자 TV를 끈 태산은 식물인간처럼 꼼작도 하지 않는 강우량에게 안타깝게 말을 걸었다.

“자네 터전을 더럽힌 놈은 벌을 받는 중이야. 앞으로 그런 악독한 짓은 절대 못 하게 될 테고. 그러니 이젠 일어나도 괜찮잖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라고 부신 건설에 관한 뉴스까지 보여 줬건만.

“설마 아직도 뭔가 남은 게야? 그래도 나한테는 살짝 말해 줘도 되잖은가.”

“…….”

“그래, 그게 무리라면 말고 이거라도 들어. 자네가 좋아하는 함흥냉면이야.”

서태산은 미동도 없는 강우량의 팔을 붙들고 하소연하듯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냉면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해…….”

그러나 안타까운 친우의 목소리에도 끝끝내 강우량은 눈을 뜨지 않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해바라기.sy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