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나는 수아 씨가 가장 민수아다울 때 미치도록 좋습니다. 이렇게 걱정까지 해 주면 환장하게 좋고.”
웃으며 나직하게 말한 화희가 그녀의 손을 끌어 가슴에 올렸다. 수아는 문신처럼 느껴지는 흉터를 어루만지며 되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보기 싫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정말 날 위한다면 ‘부분’보다 ‘본체’에 집중해 줘요. 좋기도 하지만 솔직히 매우 가혹합니다.”
“가혹하다고요?”
“수아 씨가 야성미 넘치게 벗겨서 순간 되게 설렜는데, 환자 취급했잖습니까. 남자로서 자존심 상할 수밖에요.”
혹시 상흔에 대해 말을 돌리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에 노골적인 욕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를 너무나 원한다는, 지금 당장 갖고 싶다는.
수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꼼짝없이 사로잡혔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를 좋아해 줄 수가 있을까?
이런 그의 시선에 넘어가서 벌써 며칠째 제대로 못 잤건만, 그가 작정하고 이렇게 쳐다보면 속수무책이었다.
빤히 올려다보던 화희가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수아 씨가 원한다면 울 수는 있지만 눈물 말고 다른 쪽으로 울고 싶거든요, 나는.”
야한 농담인데도 목소리가 무거워서 그런지 간절하게 느껴졌다. 홀린 것처럼 수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수아의 입술을 삼켰다. 이성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이 마른 것처럼 입술을 깊게 빨아들이던 화희가 자신의 혀를 난폭하게 안으로 밀어 넣고 이곳저곳 비벼 댔다. 달콤한 타액으로 미끈한 혀가 서로 하나처럼 뒤엉키자 수아는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깊은 키스로 온몸이 달아올라 질펀하게 젖어 드는 것 같았다.
끈적끈적하게 그녀의 입 안을 점령하고 빈틈없이 핥으며 희롱하던 화희가 어느새 나신이 되어 그녀를 단단히 짓눌렀다.
잠시 키스가 멈춰지자 수아는 저도 모르게 습기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가 야하게 눈웃음치며 속삭였다.
“수아 씨가 이런 표정 하면 어쩔 줄 모르겠던데.”
“……내 표정이 어떤데요?”
“여기를 만져 달라고 조르는 것 같아서. 아, 미안해요. 손을 원하는 게 아니군요?”
그녀의 허락을 구할 때까진 정중하던 그는 그녀의 애를 태우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매우 짓궂어졌다.
그녀의 잠옷을 벗긴 화희는 거칠게 뽀얀 가슴을 삼켰다. 뜨겁고 축축한 점막 안으로 살결이 빨려 들어가고 정점이 굴려지며 깨물리자 결국 신음이 터졌다.
“아……! 으응…….”
오로지 그만 줄 수 있는 강렬하고 황홀한 환희를 조르는 것처럼 내부가 들끓었다. 수아는 매달리는 것처럼 그의 등을 안으며 바짝 끌어당겼다. 그것이 신호인 듯 화희가 곧 그녀를 온전히 파고들었다.
“……아앗!”
무지막지하지만 다정한 몸짓에 수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안쪽 깊은 곳에서 불꽃처럼 튄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관통했다.
격한 남자의 움직임에 몸은 부서질 것 같은데 쾌감은 극까지 치솟아 더, 더, 절정을 원하게 됐다.
수아의 몸이 파도처럼 왔다 갔다 흔들리자 화희가 절대 제 품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쉴 틈 없이 그가 밀어붙이는 동안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황홀한 비명을 토해 냈다.
“……하아, 민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가 참기 힘든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열에 들떠 가라앉은 화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통해 마음까지 애무하는 것 같았다. 마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비명 섞인 신음만 흘러나왔다.
하지만 화희는 그것이 바라던 대답인 것처럼 웃으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 * *
요양원에 도착했을 땐 벌써 오후였다.
“괜찮습니까?”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희가 차 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잠시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본 수아는 아쉬움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사직서를 내고 온 참이었다. 결혼 준비로 앞으로 바쁘게 될 테고 무엇보다 화희가 대표로 있는 회사를 계속 다니기에는 이것저것 사람들의 시선이 껄끄러웠다. 박 회장과 원장이 번갈아 가며 불러 대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인사부에 미리 언질을 준 덕분에 그녀의 자리는 충원되었고 업무 인수인계가 완전해질 때까지 2주 정도 수아가 틈틈이 나오기로 결정됐다.
결혼식 후에 다른 데를 알아보면 되겠지.
스스로 아쉬움을 떨쳐 버린 수아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조사는 몇 시쯤 끝날 것 같아요? 나도 같이 가요.”
“굳이 왜요?”
“윤성이에게 우리가 알아낸 걸 얼마간이라도 말해 줘야죠. 그동안 환청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리로 인해 겪은 고통이잖아요.”
윤성이 들었던 ‘환청’은 전생의 수아와 화희밖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로 인해 생겨났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아이’를 떠올리면 얼떨떨했다. 전생에 자신의 처참한 죽음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깝고 슬프지만 대부분은 남의 일 같았다. 그러나 마음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윤성의 존재가 새겨진 것 같았다.
윤성이 정말 전생의 자신의 아이라면.
화희가 기억하지 못했던 그날, 둘의 간절한 바람으로 생겨났지만 결국 자신이 죽는 바람에 태어나지도 못한 우리의 아이라면.
전생의 아이에 대한 감정은 순간적이었지만 매우 슬프고 안타까웠다. 환영에서 스치듯 보았을 뿐이었어도 자신은 죽는 순간 몇 번이나 아이의 얼굴을 되새겼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죄책감과 증오를 버리고 제가 가진 모든 감정을 쏟아부어서 아이를 사랑했을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 감정이 현재의 자신에게 전해진 것일까? 죄책감보다 가볍고 책임감보다 무거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윤성을 떠올릴 때마다 크기를 키우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한, 어떻게 해서든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특별한 애정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수아는 요 근래 화희도 윤성의 일을 도와주는 데에 진심을 다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윤성에 대한 그녀의 애정만큼은 저어했다.
“앞이 깜깜한 놈은 내가 알아서 관리할 테니 수아 씨는 내게만 집중하죠?”
“앞뒤 꽉 막힌 화희 씨의 뒤를 뚫었으니, 이젠 앞이 깜깜한 윤성이의 뒤도 밝혀 줄 차례죠.”
수아가 그의 얄궂은 태도에 눈을 흘기면서 대꾸하자 화희가 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은근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일부러 그런 겁니까?”
“뭘요?”
“내 뒤를 뚫었다고…… 뭔가 당한 것 같아서 되게 두근거리는데요.”
“이, 이봐요! 과거를 말한 거잖아요?”
“알죠, 아는데. 수아 씨가 내 모든 걸 샅샅이 봐야겠다면서 나를 거칠게 다루던 순간이 떠올라서요.”
“…….”
“거침없이 내 뒤를 들여다보던 당신에게 나는 수치스러우면서도 꽤 흥…….”
“야!”
어감이 많이 이상하잖아, 어감이! 아씨, 이 남자는 별말 아닌 것도 야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수아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한참 웃던 화희가 재촉에 못 이겨 겨우 차를 출발시켰다.
* * *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증거들이 전부 천윤성 씨를 가리키는데!”
민철은 검사가 늘어놓은 증거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은행 계좌, 주식, 무기명 채권 등 종류도 다양했다.
화희가 잡아 넘긴 민수아 납치범들은 권 실장을 직접 건물에서 떨어뜨린 놈들이었기에 살인 교사 누명은 벗었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민철의 재촉 어린 시선을 받은 윤성은 증거들을 쳐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눈길을 돌렸다.
천부신이 제 명의로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고 변명하거나 막을 힘이 없었다고 떼를 쓰지 않으니 다행이긴 한데, 어딘가 체념 어린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윤성의 태도에 답답해진 민철이 막 검사에게 항변하려는 순간, 취조실 문이 열리고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증거대로 일을 꾸며 낼 만큼 똑똑해 보이진 않는데.”
“박 이사님이 왜 직접 오셨습니까?”
검사가 당황하여 물었으나 화희는 본 척도 않고 윤성만 아래위로 훑었다.
급히 그에게 의자를 빼 준 민철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번에는 그렇게 화를 내고 가더니 오늘은 또 왜 온 거지?
그의 시선을 받은 윤성이 인상을 쓰고 노려보자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화희가 픽 웃었다. 그리고 윤성에게 시선을 둔 채로 검사에게 딱 잘라 말했다.
“3일.”
“네?”
“저놈이 아니라는 증거만 있으면 될 일 아닌가.”
“여기 증거들이 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아, 천부신이 양아들을 검찰에 바칠 산 제물로 만들었다는 증거?”
황당하다는 표정이던 검사는 화희가 눈살을 찌푸리자 슬쩍 눈길을 피하며 대신 민철을 노려보았다.
등을 떠밀리듯 민철은 화희에게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물었다.
“저, 이사님. 특별히 3일을 말씀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화희가 대답 대신 검사가 늘어놓은 자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건네준 서류들을 건네받은 그는 잠시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뭔가를 떨쳐 내듯 툭툭 털었다.
“지금 뭐 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을 지켜보던 윤성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허공엔 아무것도 없는데 뭘 보고 놀란 거야?
엉겁결에 놀라 그쪽에 시선을 주었던 민철은 그와 화희를 번갈아 보다 그의 앞으로 툭 떨어진 서류를 들쳐 보고 반색했다.
종이가 탄 것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남은 것은 몇 개의 이름뿐이었는데 아마도 진짜 명의자나 주범일 것이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혹시 천윤성 눈에는 이사님 능력이 발현되는 게 막 보이는 거 아냐?
얼굴을 찌푸린 윤성이 민철의 어깨너머로 서류를 넘겨보더니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을 본 체도 않은 화희는 서류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3일이면 충분합니다. 그때 다시 뵙죠.”
민철이 탄 것 같은 종이를 얼른 수습하며 말하자, 화희의 기에 눌렸던 탓인지 검사는 알았다며 취조를 끝냈다.
검사가 나가고 막 윤성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김세원 검사에게 전화가 왔다. 윤성도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는 세원의 말에 민철은 전화를 스피커로 돌렸다.
-권 실장 살해 피의자들이 감형을 조건으로 권 실장이 저지른 살인을 밝혔는데 엄청납니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공무 관련자들이더라고요.
“공무원이라면 어느 소속입니까?”
-공소 시효가 끝난 것들만 밝혔는데 주로 부신 건설의 시공과 감사를 담당한 이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천 회장에게 캐낼 더 큰 건이 남았나 본데요?
가만히 듣던 윤성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피해자가 몇 명인데요?”
-현재까지는 다섯 명입니다. 윤성 군도 참고인으로 소환될지 모르니 준비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민철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윤성을 잠시 쳐다보다가 세원에게 물었다.
“이사님은 이 일을 아십니까?”
-피해자들 관련 업무 자료를 전부 뽑아 달라시던데요.
관련 업무를 전부? 어째 앞으로 일이 많아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취조실에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 발걸음이 더 무거웠다. 그들이 취조실을 나오자 밖에서 화희와 나란히 서 있던 수아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 민수아까지 웬일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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