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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87화 (87/100)
  • 87화

    * * *

    화희는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에서 홀로 깨어났다.

    마지막 기억은 황궁에서 황제를 없애고 자신을 놓아 버리려 할 때였다.

    황제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길 원했다. 모래처럼 무너지던 황궁과 비처럼 날아들던 화살,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비명은 흐릿한데 들끓는 살기가 독처럼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는 느낌만 선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체념한 그가 완전히 육신을 놓아 버리기 전,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는 나를 봐 줄까.>

    분명 희미한 목소리가 그를 일깨우려는 것처럼 속삭였었다.

    ‘……화희…….’

    하지만 역시, 착각이었나.

    모든 것을 무위로 돌렸어도 소용없었다. 그녀에게 주었던 단검이 주인을 잃고 되돌아왔다.

    화희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쥔 단검은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천천히 검의 기억을 되짚었다.

    부서진 창 아래, 흰 달을 올려다보는 그녀가 보였다.

    슬프게 달을 응시하던 수아는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제 가슴팍에 겨누었다. 한 줄기 남은 미련처럼 검을 든 손이 떨렸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안 돼……!’

    쓰러진 그녀가 흘린 피는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처연했다. 화희는 그녀의 붉은 피 웅덩이 속에 빠져 질식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검의 기억을 끝없이 되짚으며 그녀를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녀의 가냘픈 육신에 담긴 따뜻한 체온, 선한 나약함, 자신을 똑바로 봐 주지 않던 차가움까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검의 기억을 들여다봐도 그녀의 사념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가 놔주었든 말든 그의 신부는 처음부터 죽음을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지키려 했으나 지키지 못했고 가지려 했으나 놓쳐 버렸다.

    그대를 놔주어도 소용이 없다면, 나는.

    화희는 단검을 들어 그녀가 했던 것처럼 곧바로 제 심장에 찔러 넣었다.

    생에 미련은 없다. 다만 제 말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것이 슬프고 분했다.

    ‘나는 당신을 여전히 연모합니다. 그리하여 죽어도 잊지 못합니다.’

    죽음으로부터 부디 잘 도망쳐 보십시오, 신부.

    그대를 찾는 것은 나의 의지로 멈출 수 없으므로, 반드시.

    * * *

    화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천 년 전의 죽음은 고독하고 차가웠으나, 따뜻한 체온이 그를 위로하듯 감싸 안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온몸으로 그를 안은 수아는 잘게 떨고 있었다.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네요. 거짓을 기억해서라도 당신이 살길 원했는데…….”

    자신의 처참한 기억보다 그의 죽음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기억’으로 생생하게 겪어야 했던 수아가 미치도록 애틋했다. 화희는 단검을 던져 버리고 그녀를 끌어당겨 제 품에 담았다.

    회한이 담긴 긴 한숨을 내쉬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감정이 안에서 휘몰아쳤다.

    머나먼 시간을 돌아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고달픈 기다림에도, 비통한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거부한 줄 알았지만, 결코 아니었다.

    사랑해 주지 않음으로써, 사라져 버림으로써 그녀는 그를 안쓰럽게 여겨 주고 다시 만나길 소망해 주었다. 그래서 그의 곁에 지금 수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전신에 전율이 스쳐 갔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천 년 전, 황궁을 무너뜨리면서 스스로 놓아 버리려고 했던 그를 불렀던 건 지금의 수아였다.

    <……화희…….>

    <……화희 씨! 눈 좀 떠 봐요!>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과거의 사념에 빠진 자신을 깨우던 수아의 목소리였다. 복잡하게 얽힌 인연의 실타래 속에서 사념을 통해 찰나 스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는 무너진 황궁과 함께 영원히 소멸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수아가 과거의 그를 구원했고, 과거의 화희는 천 년 후의 그녀를 지켜 냈다.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수아가 속삭였다.

    “고마워요. 나를 기억하고 찾아 줘서.”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리 처참한 과거를 들여다보고도 수아에게서는 나약함이나 우울함 따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먼 과거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소원처럼.

    화희가 고개를 기울여 이마에 입을 맞추자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하지만 이제 지난 일은 잊어요.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당신의 바람이라면, 얼마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담겨 품에 안았다. 서로를 온전히 품으니 긴 시간의 공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희는 수아를 안은 채 그녀의 유품들로 가득 찬 방을 나섰다. 앞으로 이곳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달칵, 문이 닫히고 서로를 찾아 헤맨 긴 시간이 끝났다.

    9.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한겨울의 새벽빛이 도시에 잠긴 어둠과 추위를 살라 먹는 무렵은 늘 감격스러웠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봄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특히 저 남자에게는.

    도심 특유의 칼바람에 오들오들 떨면서 서태산은 대로에 우뚝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이고, 추워. 아침 댓바람부터 뭐 하는 거야.”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화희는 팔짱을 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종자가 떡 버티고 서 있으니 행인들은 놀란 기색이었지만 힐끗거리면서도 알아서 그를 피해 갔다.

    화희의 시선이 높은 빌딩의 옥외 광고판에 닿아 있었다. 물론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태산과 화희의 주변으로 도시의 시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도로의 차들이 빛을 뿌리며 강물처럼 흘러가고 빌딩들이 사람들을 받아들였다가 토해 내기를 반복했다. 낮과 밤이 바뀌고 순식간에 계절이 바뀌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희가 휘 손을 저었다.

    건물 안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오는 젊은 여자가 흐르는 시간 사이로 느리게 움직였다.

    3년 전의 수아였다.

    그녀는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듯 길거리를 조심스럽게 걷다가 아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들이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 빌딩 꼭대기에서 거대한 물체가 아슬아슬 흔들렸다.

    “아, 그나마 저놈들은 우리 수아가 살린 거로구만. 까딱하면 저거에 깔렸었겠네.”

    뿌듯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서태산은 연이어 저승사자처럼 갑자기 나타난 3년 전 화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 깜짝이야. 누가 저 표정을 보고 구해 주러 왔다고 믿겠어? 저승으로 데려가러 왔다고 믿겠구만.

    지금 보니 그사이 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 아니, 그런데 왜 나까지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 건가.

    옥외 광고판이 낙하하고 혼비백산해서 주저앉은 수아를 한참 응시하는가 싶던 화희는 다시 시간을 빠르게 되돌렸다.

    시간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 광고판이 떨어진 빌딩의 공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멈췄다.

    “대체 뭘 보려는 건가?”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서태산이 다가가자, 건물의 철근 뼈대를 올려다보던 화희가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이상한 점 없나?”

    “응? 여기서 자네 말고 이상할 게 뭐가…….”

    서태산의 성의 없는 대답에 화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눈길이 꽤 매서웠다. 도무지 이 종자의 박력에는 당할 수가 없다니까.

    서태산은 슬쩍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큼큼, 이유를 알아야 제대로 답을 하지. 대체 내가 뭘 알아야 하는 건지 말이나 좀 해 줘.”

    그를 아래위로 죽 훑어보던 화희가 못마땅하게 툭 내뱉으며 휙 걸음을 옮겼다.

    “영감도 말 안 했지. 내 아이에 대해서.”

    “어? 그건 나도 안 지 얼마 안 되어서……. 무엇보다 내가 알려 주면 인연이 틀어지는 거 잘 알잖나.”

    그를 쫓으며 서태산이 변명하듯 말했으나 코웃음 친 화희는 길가에 주차한 차 문을 열며 딱 잘라 말했다.

    “피차일반이야.”

    “엥? 뭐가 피차일반인데? 설마 말 안 해 줬다고 삐져서 엿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서태산이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화희는 그를 무시하고 가차 없이 차 문을 닫아 버렸다.

    “여기 왜 온 건지만이라도 말…… 악! 어이, 팔불출!”

    하마터면 문에 머리를 찧을 뻔한 태산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차를 몰고 가 버렸다.

    차가 일으킨 찬 바람에 어깨를 움츠린 태산은 쏜살같이 멀어지는 차를 보며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살살이라는 걸 모르는 종자가 저리 움직이니 어째 불길하구만.”

    피차일반이라……. 자신에게 실마리를 말하면 뭔가 틀어진다는 뜻 같은데.

    그럼 나는 우연이 이끄는 대로 가 볼까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손바닥에 침을 퉤 뱉어 손가락으로 찍어 방향을 점치고서 흐적흐적 걷기 시작했다.

    * * *

    잠깐 잠들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침실 안에는 아침의 햇볕이 드리워져 있었다.

    수아가 힐끗 창문을 넘겨보기가 무섭게 화희가 혀를 차며 그녀의 귓불을 짓궂게 깨물었다.

    “싫은데요.”

    “읏, 뭐가 싫어요?”

    “내게서 눈 돌리지 맙시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지니까.”

    지금도 충분히 곤란했다. 오싹한 귀를 만지작거리던 수아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일찍 어딜 다녀온 건지 슈트 차림인 그는 재킷만 벗고서 굳이 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지분거렸다.

    눈 뜨자마자 잘생긴 얼굴을 보는 건 좋지만…….

    새것처럼 반듯한 그의 셔츠와 엉망으로 구겨진 제 잠옷을 번갈아 보던 수아는 제 목덜미를 더듬는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그가 불만스럽게 눈썹을 치켜세우자 그녀는 지지 않고 투덜거렸다.

    “혼자만 아침부터 그렇게 상큼하기 있기예요?”

    “나만 상큼한 게 싫으면 직접 더럽혀 주시면 되잖습니까.”

    “그게 아니라 자다 깬 모습은 보여 주기 창피하단 말이에요. 우리 30분 뒤에 다시 만나요.”

    “자다 깬 게 아니라 잠시 쉰 거지. 딱 5분만 더 놀아 달라고 했는데 ‘잠시만’이라고 해 놓고 잠들었잖습니까?”

    “지,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대체 화희 씨는 언제 자는 거예요?”

    불공평하다. 어떻게 해도 그의 체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며칠째인지, ‘그 방’에서 나온 이후 화희는 그녀를 한시도 혼자, 가만두지 않았다. 그것도 매우 낯뜨거운 쪽으로.

    게다가 밤새 한잠도 안 잔 것 같은데 얼굴빛은 왜 이렇게 좋아?

    아, 혹시 그새 상처가 다 나은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보던 수아는 자신을 도로 눕히려는 그를 붙잡았다. 본의 아니게 셔츠의 멱살을 잡은 모양이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추를 몇 개 풀어 급히 그의 가슴팍을 빤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아쉽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대로네요. 오해가 풀리면 찬란한 빛이 막 뿜어져 나오면서 드라마틱하게 싹 나을 줄 알았는데, 왜 전혀 차도가 없죠?”

    그날 이후 분명 화희는 전생의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런데도 상흔은 조금 옅어진 것 외엔 여전히 붉은 사슬처럼 그의 상체를 휘감고 있었다. 내적 트라우마 같은 문제가 아니었던 건가?

    “정말 드라마처럼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낫는 걸까요? 한번 울어 볼래요?”

    화희는 어이없다는 듯 풀어 헤쳐진 제 셔츠를 흘깃 내려다보며 헛웃음 쳤다.

    “천 년 해후의 감동이 날마다 아주 다채롭게 변하는군요.”

    “네?”

    “……참 수아 씨답다고요.”

    “지금 욕한 거죠?”

    “감히 그럴 리가.”

    기어코 그녀를 끌어다 제 위에 올려놓은 그는 눈을 내리깔고 묘하게 웃었다. 눈웃음치듯 그의 긴 속눈썹이 잘게 물결치는 걸 보며 투덜거리던 수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남은 걱정되어서 그런 건데, 왜 이렇게 치명적으로 웃어. 가슴 설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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