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수아는 미동도 없이 깊은 잠에 빠진 남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은 그를 받아들였다. 그와 짐승처럼 몸을 섞으면서 울고 매달렸다. 그간 차마 그에게 직접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려던 것처럼.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제 마음을 인정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선황과 자신의 사람들을 죽인 현황, 둘 중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식솔을 두고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을 화희에게 덮어씌우느라 무조건 그의 온정을 외면하기만 했다. 제 마음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시간처럼 그를 향해 흐른다는 것을 모르고서.
그에 대한 감정이 흐르고 흘러 깊어진 마음을 인정하니 이제야 남자가 제대로 보였다.
이지를 잃을 정도로 처참한 상처를 입고도 그녀를 찾아온 그는 무엇이 이리도 간절한 걸까.
수아는 그의 목덜미에 피가 맺힌 상처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새긴 것처럼 또렷한 글자였다.
守護(수호)
목숨을 걸고 황궁 밖으로 그녀를 보내면서 그가 간절하게 물었었다.
<앞으로 어떤 목숨도 해하지 않겠습니다. 이리 약속해도 신부는 나를 받아 주지 않을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화희는 홀로 약속을 지킨 모양이었다.
살인귀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가 시키는 대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그녀와의 약속을 먼저 지켰다.
그녀가 아낀다는 이유로 돌봐 주었던 그녀의 가족처럼, 검은 고양이처럼, 목련처럼.
마지막엔 그녀를 놔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황제에게 검을 들었다. 생존 본능만 남은 상태였음에도 그녀에게만은 애절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악’ 그 자체가 아닌,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검’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해할 수도, 지킬 수도 있는.
<신부가 없는 나는, 그저 살인귀일 뿐입니다.>
만약 내가…… 그를 받아 주었더라면 화희는 어쩌면…….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두근, 아주 작지만 제 안에 다른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그의 절박한 바람처럼.
<……우리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를 버리지 않을 겁니까?>
놀란 수아는 배를 감싸 안았다. 품 안에 아이가 방글거리며 옹알이를 하는 환영이 보였다. 남자를 꼭 빼닮은 아이였다. 그녀와 마주한 해맑은 눈 속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
아이를 본 순간, 자신의 삶이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나약하게 절망에 빠진 탓에 막바지까지 다다랐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녀는 누구보다 화희를 지켰어야 했다.
신녀로서도 수호수를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나락으로 떠밀었다.
깨달음은 너무나도 늦었다.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황제의 군대가 그녀를 찾아낸 것이다.
아, 안 돼.
수아는 화희를 급히 돌아보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삽시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황제의 군대가 집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노기 어린 황제의 목소리가 벼락같이 울렸다.
‘쥐새끼처럼 숨으면 못 찾을 성싶더냐! 네년을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다!’
그녀에 대한 살의만 불태우는 황제는 화희가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마지막일지라도 아직 기회는 있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수아는 제 목숨을 끊으려던 단검을 찾아 꽉 쥐었다. 차마 화희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검을 소매에 숨긴 채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자 화살과 창이 그녀에게 겨누어졌다.
처음엔 황제를 알아보지 못했다.
막강하던 위세는 흔적도 없이, 불에 녹은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엔 오로지 악의만 남아 있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자, 이 모든 일의 원흉.
반드시 저놈만은…….
어차피 마지막을 각오했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자신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화희가 걸렸다.
당신만은 무사하길.
우리의 아이도…….
여기서 끝이구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간 수아는 황제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 내 어머니는 어찌 되셨지?’
아무런 무기도 없이 홀로 선 그녀를 본 황제가 일그러진 입술로 비웃었다.
‘진즉에 죽어 없어졌다. 어리석은 것, 내가 전 황가의 핏줄을 살려 둘 듯싶으냐!’
‘……하아!’
‘저년을 잡아!’
그녀가 비통하게 흐느끼며 비틀거리자 창을 세워 든 군사들이 그녀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이를 갈며 지켜보던 황제가 근위병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네년은 내 손으로 죽여 주지! 그놈이 내 모든 걸 빼앗았으니, 나도 그놈이 끔찍이 여기는 네년을 도륙하리라.’
수아는 막상 다가오는 그를 보고 체념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악귀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망연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황제가 그녀의 앞까지 곧장 걸어오자 두려운 것처럼 주춤 물러섰다.
겁에 질린 그녀의 표정에 황제가 이를 드러내며 더 바짝 다가섰다. 수아는 그가 가까워지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이제껏 그녀를 경계하여 틈을 보이지 않던 그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곧장 걸어온 천부신이 검을 휘둘렀다. 휘익, 긴 검이 허공을 가르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수아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보면서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는 힘껏 손에 쥔 단검을 뻗었다.
장검이 제 몸을 가르는 느낌보다 단검이 그의 살을 뚫는 느낌이 더욱 강렬했다. 사람을 죽이려는 자신의 악의가 처음으로 기꺼웠다.
나와 내 사람들을 해친 원흉이 진심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죽어, 제발.’
‘……크흑!’
단검이 황제의 심장을 직통으로 찔러 들어갔다. 달려드는 그녀에게 재차 검을 휘두르려던 황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이, 이년이……!’
충격으로 눈을 부릅뜬 황제가 단검을 쥔 그녀의 손을 사납게 붙들었다. 그러나 수아가 박힌 검을 뽑아낸 순간 그는 거대한 거목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경련하는 황제를 보면서 수아는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그녀의 몸을 단단한 품이 뒤에서 받쳐 안았다.
‘……신부?’
그녀를 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은 화희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피로 흥건히 젖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수아는 그를 마주 보고 싶었지만 숨을 몰아쉬는 것도 버거워 천천히 눈이 감겼다.
군사들이 그들에게 창을 겨눴으나 화희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았다.
상처를 더듬는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제 손을 물어뜯은 화희가 그녀의 입에 피를 흘려 넣었다. 그러나 그녀의 숨은 끊어질 듯 약해지기만 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그는 손도 모자라 제 손목까지 물어뜯어 수아의 입술에 댔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검에 찔린 순간에 자신은 이미 절명해야 했다. 그녀를 버티게 하던 악의가 사라지자, 마지막 순간을 버티고 있는 것은 오로지 화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모습이 이리도 약하고 초라하다는 것이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어젯밤 그대는 나를 받아 줬잖아. 우리의 아이가 있으면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그런데 이렇게 죽겠다고?’
꺼져 가는 그녀를 으스러질 듯 껴안은 그가 이를 악물고 불쑥 고개를 들었다.
‘진작 다 없애 버렸으면…… 그대는 살 수 있었던 건가.’
그녀를 살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의 눈에서 감정이 사라져 갔다. 유일하게 제 마음을 보였던 어젯밤이 오히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그의 눈에 살의가 들어찼다.
세상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였다.
황제의 시체를 노려보는 그의 전신에서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
막 그들에게 창을 겨누고 덤비려던 근위병들이 한순간에 시퍼런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불길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불길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가 군사들을 휘감았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불 바람에 쓸려 갔다.
고통과 두려움에 쥐어짜여 내지르는 비명이 사방에 진동했다. 불길은 끝도 없이 번져 나갔다.
오직 그들 주위만 불길도 바람도 없이 고요했다.
그녀를 안은 채 주위를 노려보던 화희는 그녀의 손에서 황제를 찌른 단검을 빼앗듯 가져가 쥐었다. 자신의 목에 검날을 들이대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기묘하게 기울어진 세상에 붉은 천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나풀거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피로 모든 것을 불태운 뒤, 자신을 놓아 버리고 그녀와 함께 사멸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손을 잡았다. 간신히 말을 뱉는 그녀의 입술이 피를 울컥 토해 냈다.
‘……하아…… 제발…… 이러지…….’
화희가 목에 검을 댄 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나와 이 세상 때문에 그대가 죽는 거잖아. 그러니 다 없애면 돼.’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결하려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올 수 없는 말 대신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완전히 이지가 사라져 살의만으로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자 잠시 흔들렸다. 붉어진 그의 눈시울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니…… 나는 기꺼이 죽었어…… 이 검으로……. 제발…… 그렇게 기억해요……. 당신을 버…… 린…… 나만 미워…… 해…… 요. 당신…… 탓이…… 아니야…….’
‘……하, 날 버린 당신만 기억하라고?’
화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꺼풀이 힘없이 감기기 전, 수아는 마지막으로 그를 눈에 담으며 빌었다.
당신 탓이 아니니 제발 잊어요. 신녀로서도, 신부로서도 당신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나는 내게 지워진 사람들의 무게가 버거워 당신을 버리고 스스로 죽은 것이니 제발. 처음부터 내가 없던 것처럼 살아가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간절한데 이미 그녀의 숨은 끝을 다했다.
죽음이 곧 그녀의 육체를 통째로 씹어먹기 시작했다. 시야를 뒤덮은 붉은 천마저 사라져 온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모든 감각도 사라졌다.
그녀를 잠식하던 증오도 사라졌다.
그저 피로 물든 대지에서 홀로 남은 남자가 안쓰러웠다.
신이시여, 제발.
그로 인해 허무하게 사그라진 무고한 생명들은 모두 저의 죄이므로, 제가 모든 벌을 짊어지겠습니다.
억겁의 시간이 걸려서라도 모든 죄를 갚고 용서를 구할 테니 죄가 사해지면,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더.
이미 숨이 끊어진 그녀에게 남은 것은 간절한 소망이 담긴 사념이었다. 그와 가질 수 없었던 미래였다.
내가 모든 죄를 갚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당신이 나를 바란다면…….
나약하여 그를, 아이를, 아무도 지키지 못한 나는 면목이 없지만.
나와 당신이 오직 사랑하는 사이로만 늙고 늙어서 더 살 수 없는 삶을 단 한 번만 누릴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우리’를 지키겠습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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