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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85화 (85/100)

85화

수아는 한참 가만히 서서 기절하듯 잠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죽일 순 없더라도 제 식솔을 모두 죽게 만든 그 또한 고통스럽기를 바랐다. 하지만 막상 죽어 가는 그를 보자 마음은 무너졌다.

잠시 망설이던 수아는 남자의 예복을 벗겨 상처를 살폈다.

단단한 가슴팍에 드러난 상처는 깊지 않아 보였으나 피가 멎지 않는 데다 열까지 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한 끝에 그녀는 탁자 위의 화병을 던져 산산조각 냈다. 날카로운 조각을 들어 손바닥을 그은 후 문을 열고 시녀들을 불렀다.

‘화병을 깨뜨려 손을 다쳤습니다. 약을 가져다주세요.’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태의감을 부를까요?’

‘언성을 낮추세요. 전하께서 곤히 침수에 드셨습니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으니 약만 주고 모두 물러나세요.’

놀란 상시장과 시녀들이 그녀의 상처를 치료한다, 깨진 화병을 치운다, 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아가 평소와 달리 엄히 말하자 급히 약을 들인 후 물러났다.

상처를 맑은 물로 소독하고 지혈제를 뿌린 그녀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러고도 피가 멎지 않자 다친 손에서 제 피를 쥐어짜 그의 입에 흘려 넣으며 안타깝게 빌었다.

‘당신만은 이 끔찍한 황궁에서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사람들을 해한 벌로 아주 오래 살아남아서…….’

이토록 그를 살리려 애쓰는 자신에게 하는 변명이기도 했다.

해가 어둠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동틀 무렵까지 그녀는 면 수건에 물을 적셔 남자의 얼굴을 닦아 열을 식히며 그의 곁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천천히 상처에서 피가 멎고 열이 가라앉았다. 이제 그는 단지 회복을 위해 깊은 잠에 빠진 것뿐이다.

안도한 수아는 그에게 금침을 정갈히 덮어 주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침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갑자기 나타난 황제의 금위군들이 그녀의 침소를 빈틈없이 에워쌌다.

‘여기에도 핏자국이 있다! 어서 황태자 전하의 안위를 확보하라!’

시녀들의 비명과 함께 금위군 대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금위군에게 끌려간 그녀는 황궁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사지를 옥죄는 끈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 끝없는 절망이 밀려들었다.

황제가 그녀가 한 짓을 알고도 그 자리에서 바로 시해죄로 잡아들이지 않고 한발 늦게 움직인 것은 매우 나쁜 징조였다.

그녀는 이제껏 황제에게 인질일 뿐이었다.

처음 수아가 황제를 죽이려 했을 때, 그녀를 잡아 가두고 ‘목숨’을 빌미로 화희를 옭아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희가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황제는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는 용종을 낳을 그릇일 뿐이다! 한데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을 변질시켜? 내 반드시 네년의 자식을 살인귀로 만들어 주마. 네년 뱃가죽을 가르고 꺼낸 귀물은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게 될 것이야!>

간수들을 내보내고 홀로 감옥을 찾아온 황제는 그녀를 멸시하는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비릿한 미소를 띤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태자를 상처 입힐 수 있다니. 나약하고 무능한 계집인 줄로만 알았는데 신녀는 다르구나.’

증오에 차 그를 노려보던 수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불안한 예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다시 말하면 너만은 내 아이를 없앨 수 있단 뜻이겠지.’

희게 질린 그녀를 즐기듯 내려다본 황제가 창살 사이로 뭔가를 툭 내던졌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녀의 앞에 떨어진 건 그녀의 생모가 아껴 늘 하고 다니던 비녀였다.

‘서, 설마……!’

‘너는 네 피붙이 때문에 이제껏 네 몸뚱이를 팔았지. 내 너의 그 효심을 갸륵히 여겨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악다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느끼지 못했다. 목이 졸리는 것 같아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귀양 간 그녀의 식솔을 죽인 건 황제였다. 그리고 그것이 화희의 짓인 것처럼 꾸몄다.

분노와 슬픔으로 헐떡대며 그녀는 황제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증오를 즐기듯 잠시 쳐다보던 그는 말을 되씹듯 내뱉었다.

‘네년 때문에 내 아이가 변했다. 그러니 네년이 책임져야지. 마지막 남은 네 피붙이를 구하고 싶다면.’

저 남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업을 쌓고 지옥에 가도 좋으니 제발 저 악귀만 없앨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당신을…… 죽이겠어. 내가 죽더라도 나, 나는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그녀의 피맺힌 저주를 들은 황제가 코웃음 쳤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찰나 비열한 증오와 두려움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네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화희가 네년을 구하기 위해 이번엔 무엇을 내놓을지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창살을 후려치며 일갈했다.

‘어서 이년을 매우 쳐라! 귀한 내 아들을, 황태자를 해하려 했다! 죽기 직전까지 주리를 틀고 그 죗값을 물어라!’

황제의 명을 들은 간수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러나 수아는 그들의 손에 들린 채찍과 무기보다 황제를 노려보았다.

두려움보다 절망으로 그녀는 몸부림쳤다.

절망의 나락은 끝도 없이 깊었다.

* * *

달빛이 슬프게 내리는 밤이었다.

그녀는 잠들 생각도 없이 부서진 창 너머로 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자신의 인생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생모는 정말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 해도 언젠가는 황제의 손에 죽게 되겠지. 인질로서 쓸모가 없어지면.

화희 역시 쓸모가 없어지면 황제는 그마저 해하려 할 것이다. 신녀를 언급하는 그의 눈빛엔 숨길 수 없는 희비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녀 때문에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말이 미련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나의 비를 찾는 것은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으므로, 반드시.>

그는 왜 내게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그녀를 구하고 금위군을 필사적으로 막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면 너무 슬펐다. 애달프고 원통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키느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

그저 인연이 잘못되었다. 어떻게 해도 서로를 잡아먹는 물과 불이 될 수밖에 없는. 수(水)아와 화(火)희, 우리 존재의 이름처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 받은 것 중 유일하게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수아는 그를 이 검으로 찔렀었다.

그녀는 처연하게 달을 올려다보며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비는, 나의 신부는 내가 원하는 한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며 그때 그에게 하지 못했던 대답을 입 밖에 냈다.

‘아니요, 당신이 틀렸습니다.’

나는 이 검을 구명줄처럼 온 힘을 다해 쥐고 있지만, 이것으로 제 생명을 잘라 낼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당신과 만날 수 없도록.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검을 움켜쥔 그녀는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폐가에는 갖은 소리가 들렸지만, 방금 전의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검은 형체가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황제의 살수인 줄 알았던 그녀는 몇 번이고 인영을 확인했다.

어, 어떻게 날 찾아냈지? 게다가 이런 처참한 모습으로…….

핏물을 뒤집어쓴 화희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겨우 안간힘을 써서 방 안에 들이고 살펴보니 그는 만신창이였다.

금위군에게 다친 게 아닌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 터져 나오려 한 것처럼 피부가 잘게 찢기고 부러진 뼈가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왔다.

상처들은 눈에 띄게 아물고 있었다. 부러진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 어그러지는 모습은 처참하고 괴로웠다. 이 때문에 의식을 잃었는지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결국 나 때문에 또 이리되었겠지. 죄책감에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얼마나 그를 지켜보았을까. 해가 뜨고 다시 밤이 되었을 때,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동자를 드러냈다.

‘……신부?’

검고 맑았던 눈동자는 그녀를 보고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꿈인가?’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의 열에 들떠 뜨거운 손이 갈퀴처럼 그녀를 잡아챘다.

가까이 마주하게 된 그의 눈을 보고 그녀는 깨달았다. 이지(理智)를 상실한 눈, 그는 지금 본능만 남은 상태였다.

그녀를 꼼작 못 하게 붙든 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인하게 중얼거렸다.

‘꿈을 깨기 전에…… 나를 떠나는 그대의 어여쁜 발목을 잘라 버리고 싶습니다.’

‘…….’

‘하지만 나는 당신을 해할 수 없으므로,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당신을 옭아맸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눈을 다시 떠 그녀를 응시했다. 초점이 흔들리는 눈에 찰나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요, 아이가 좋겠군요. 피붙이를 끔찍이 여기는 그대이니.’

그의 말에 잠시 ‘아이’를 떠올렸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곧 황제의 악에 받친 저주가 머릿속을 흔들었다.

<내 반드시 네년의 자식을 살인귀로 만들어 주마. 네년 뱃가죽을 가르고 꺼낸 귀물은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게 될 것이야!>

……아이는, 우리의 아이는 당신에게 더한 인질이 되겠죠.

차마 답하지 못한 말 대신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흐느끼지도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에 시선을 준 남자의 눈이 아픈 듯 일그러졌다.

그녀의 소리 없는 울음은 그의 입술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온몸을 옭아매듯 집요하게 탐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의 몸짓은 절박했다.

차마 밀어내지 못한 채 그녀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더 주저할 것도 없었다. 이기적인 욕심이라 해도 좋았다.

‘……우리에게 아이가 있다면 나를 버리지 않을 겁니까?’

그녀를 집요하게 탐하던 화희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잘게 떨리는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거짓말처럼 그녀의 뺨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수아는 답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절박한 몸짓으로 서로를 얽매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달빛이 그들을 비추다 사그라져도 그들은 서로를 안은 손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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