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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84화 (84/100)

84화

한참 후,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상처 입은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태하게 들려서 수아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화희가 그녀의 손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살랑이며 손가락에 스치듯 닿았다. 작은 몸짓임에도 그의 아슬아슬한 감정이 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틈을 준 그는 혼잣말처럼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걸 잊고 지금의 당신만 기억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내 머리를 부숴서라도 기억을 없애고 싶어.”

“……무엇을 잊고 싶은데요?”

조용히 물은 수아는 숨을 죽이고 답을 기다렸다. 신음을 참는 것처럼 목 안쪽을 낮게 울린 화희가 그녀의 손에 머리를 파묻었다. 깊고 어두운 감정에 침잠하여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수아는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찬 기운이 묻어나는 머리칼과 식은땀이 밴 이마가 안타까웠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애절한 걸까.

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화희 씨.”

“나는 언제까지 벌을 받아야 하는 건지……. 당신만 있으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얼핏 고개를 든 그와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달빛을 받은 눈동자가 물에 젖은 것처럼 아스라이 일렁였다.

“과거의 나 때문에 당신까지 벌을 받는 거라면…… 당신을 ‘나’로부터 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나는 어떡해야 하지?”

그가 참고 있는 무거운 슬픔이 느껴져 수아 역시 뜨거운 눈물로 목이 멨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아무것도 물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슬픔의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자신’이었기에.

민수아, 민수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참으로 낯설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애달팠다.

* * *

어느새 방에 햇볕이 스며들었다. 잠이 든 줄도 몰랐던 수아는 놀라서 눈을 떴다.

급히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화희는 보이지 않았다. 놀라 벌떡 일어난 그녀는 방을 뛰쳐나와 그의 침실로 달려갔다.

“……화희 씨!”

막 침실 안 드레스 룸에서 셔츠를 걸치고 나오던 그가 수아를 발견하고 멈칫 걸음을 멈췄다.

“더 자지 그랬어요? 얼마 못 잤을 텐데.”

그러나 곧 화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허겁지겁 뛰어 들어갔던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하며 그를 살폈다. 밤새 그에게 무겁게 내려앉았던 슬픔은 흔적도 없었다.

“어제는…….”

“아, 어제는 연락도 없이 집을 비워서 미안해요. 출장이 갑자기 잡혀서요.”

“……출장이요?”

어이없이 되묻는 그녀의 시선을 슬쩍 피한 그는 멋쩍게 웃으며 침대 위에 놓인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내 정신이 출장 갔다 쳐주면 안 됩니까?”

……뭐지, 이건. 감정을 숨기려고 농담으로 둘러대는 그의 말투가 거슬렸다.

그와 함께 아파하며 괴로워했던 마음이 배신당한 것처럼 화가 치밀기 시작했지만, 수아는 일단 조용히 되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정신이 멀리 다녀왔는데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아 씨는 알 필요 없어요.”

“왜요? 화희 씨 일인데 왜 난 몰라야 돼요?”

그의 다정한 무시에 참으려 했던 화는 금방 폭발했다. 수아는 불쑥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와 맞닥뜨린 순간부터 목덜미에 드러난 문신 같은 붉은 상흔이 내내 눈에 박혔었다.

“상처, 전혀 낫지 않는 거죠? 오히려 더 심해졌잖아요.”

“조금 뜨거울 뿐입니다. 그보다 수아 씨가 이렇게 날 보는 게 더 곤란하다고 했을 텐데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지만 분명 그는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아픈 것처럼 움찔했다.

대체 이건 어떤 고통인 걸까?

모르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상처는 어제 그가 보였던 무거운 슬픔과 연관되었다. 낫는 것 같다가도 묻어 둔 감정을 자극할 트리거만 있으면 더욱 지독하게 도지는 것 같았다.

안타까워진 수아는 문신처럼 새겨진 붉은 자국에서 시선을 떼며 딱 잘라 말했다.

“박화희 씨, 당신은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절절매는 사춘기 같아요.”

“…….”

“이뤄지지 못해서 더 애틋한 건가요? 아무리 그렇대도 그 여자는 오래전에 죽었잖아.”

“수아 씨, 그만…….”

“당신이야말로 그만해요. 잊을 수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 따윈 경멸하고 무시해요, 그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당신이잖아!”

굳었던 화희가 대번에 고함을 질렀다. 애써 평정을 가장했던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는 게 가슴 아팠다. 하지만 곪을 대로 곪은 그의 상처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과거에 자신이 그에게 준 상처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 여겼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의 상처는 긴 시간 스스로 자신을 옭아맨 독이었다. 과거와 가까워지자 점점 짙게 번지는 상흔이 그 증거였다.

입술을 깨문 수아가 한 발 물러서자,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화를 내려던 게 아니라…….”

“아뇨,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결코 잊을 수 없다면 나도 더는 모르는 척하지 않을 테니까.”

“수아 씨, 제발…….”

“전생은 죽은 삶이고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린 것 같아요. 내 주위에 계속 나타나는 과거의 인연들도 그렇고, 무엇보다 당신이 기억하잖아요. 화희 씨가 말해 주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볼 거예요.”

감정이 다시 복받치는 듯 길게 한숨 쉬며 말을 잊지 못하는 그를 응시하던 수아는 휙 침실을 나왔다.

자신도 틀렸지만, 그도 틀렸다. 현재의 인연은 과거에서 비롯되었고, 그리 깊은 인연은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나는, 당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그러니 당신은 그렇게 아파할 필요 없어.

수아는 ‘사실’이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정말 자신이 화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꿈으로 되살아나는 기억이 전부 그에 관한 것일 리가 없다. 그토록 꺼림칙하던 천부신에 관한 건 직접 그를 맞닥뜨리기 전까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따뜻한 실내 공기에도 불구하고 그 방에서는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한 수아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박물관’ 같은 내부는 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오래된 초상화, 불에 탄 서책, 스크랩한 기사들, 유품과 증거로 진열된 각양각색의 죽음은 모두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죽음’으로 벌을 받아야만 했던 것일까.

그런데 많은 물건 중 ‘검’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비어 있는 선반을 실망스럽게 쳐다보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벽에 걸린 스크랩 기사들을 살폈다.

신문 기사 중 가장 최근 것은 36년 전 기사였다. 부산에서 납치되었다가 호텔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젊은 여자에 관한. 사인은 익사였다.

“……읍!”

기사를 읽던 수아는 갑자기 이질적인 감각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아 소스라쳤다.

갑자기 바닷속으로 뚝 떨어진 것처럼 사방이 온통 물이었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리자마자 순식간에 차고 짜디짠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벗어나려 해도 사지가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어서 숨 막힌 비명을 지르는 게 전부였다.

그녀의 마지막 죽음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겪은 적 없는 기억이 머릿속에 억지로 욱여넣어졌다.

지금보다 네댓 살 어린 나이, 친구들과 부산에 놀러 왔던 그녀는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되었다. 가까스로 도망쳤으나 친구들을 먼저 보내다 놈들에게 다시 잡혔다.

누군가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그녀를 귀찮은 벌레처럼 쳐다보며 상스럽게 지껄였다.

‘시발, 물건만 제대로 준비됐어도. 저 빌어먹을 년 때문에.’

악의에 찬 목소리가 귓가에 저주처럼 들러붙었다.

지금보다 젊고 다른 얼굴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천부신이었다.

전생에 그녀를 죽인 건 천부신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

화염 속을 걸어 나온 검은 옷의 남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으로 사람들을 베면서 그녀를 찾아 헤맸다.

그토록 사력을 다했음에도, 화희는 그녀를 놓치고 구하지 못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기절한 채 내던져졌던 그녀는 배가 폭발하는 굉음에 잔인하게도 의식을 되찾았다.

발목에 무거운 뭔가가 매달려 있어서 제대로 발버둥 칠 수도 없었다. 그저 한없이 끌려가듯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흐읍!”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억울함과 분노가 솟구쳤다. 수아는 숨통이 막히는 기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나는 화희에게 돌아갈 거야.

이를 악물고 발버둥 치는 순간 어느새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대고 있었다.

진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것 같았다. 아직도 차디찬 물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수아는 마른 제 옷을 몇 차례나 확인해야 했다.

“이딴 걸 왜 알아야 하는데?”

어느새 방에 들어와 거칠게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화희가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나는 당신이 죽는 걸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수아는 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봐요, 그놈이 날 죽인 거지 당신 탓이 아니야. 전생의 나도 절대로 화희 씨 때문에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같이 사실을 알아내요.”

“나 때문이라면? 이번 생에도 당신은 나 때문에 그놈에게 죽을 뻔했잖아. 나는 당신을 걸고서는 그 어떤 것도 봐줄 수 없어. 설사 내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럼 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절대 당신을 안 놓을 테니까.”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며 고백하듯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화희 씨는 내 약속을 안 믿어요?”

잠시 후 대답처럼 그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스르르,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손이 미끄러져 결박하듯 깍지끼었다.

수아는 그의 등을 안으며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당신에게 오해당한 채 영원히 죽어 있으면 그녀가 너무 안쓰럽잖아요. 왜 내가 꿈을 꾸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단 말이에요.”

이를 악문 화희가 흐느끼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검붉은 피가 말라붙은 오래된 단검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마치 그녀가 그를 이 검으로 찔렀던 그날처럼.

* * *

검에 찔리고도 화희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축원을 읊고 긴 제례까지 모두 치렀다.

그러나 제단에서 내려올 때쯤 되자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곧은 걸음으로 그녀를 데리고 침소까지 와서야 그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수아는 피로 흥건히 젖은 용포와 그들 뒤로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을 번갈아 보다 이 상황이, 그들의 운명이 기가 막히게 슬퍼졌다.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그러면 모든 것이 편해질 겁니다.’

힘겨운 것처럼 용포를 벗고 탁자를 짚고 선 그가 그녀를 향해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신부가 없는 나는, 그저 살인귀일 뿐입니다.’

‘이미 당신은 그러합니다.’

‘……그대가 나를 버리면 나는 더한 살인귀가 될 겁니다, 반드시.’

헛웃음 치며 쓰게 웃는 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잘게 떨렸다. 그녀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에는 흉포한 집착이 담겨 있음에도 의지보다는 애원이 드러난 것처럼.

수아는 그의 시선을 피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피로 물든 손이 끔찍했다.

제 손을 곱고 화려한 옷에 문질러 닦으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많이 늦고 너무나도 잘못되었습니다.’

‘……무엇이?’

그의 질문에 차마 소리 내어 답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인연이요. 당신은 모두를 죽여야만 하고 나는 당신을 죽여야만 하니까.

반역을 일으켜 수백의 군사와 싸우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남자가 고작 자신의 단검에 쓰러진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신녀’라는 것 때문일까. 아무런 힘도 없이, 오로지 단 ‘한 사람만’ 죽일 수 있는 능력 따위로 인해.

역시 나는 그를 해할 운명이었구나.

나는 어느 목숨에 값어치를 둬야 할까요. 나의 마음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요.

수아는 남자 앞에서 무너지려는 제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집착 어린 애정이 독처럼 제 마음을 죽이는 것만 같았다.

‘놓아줄 수 없으면 차라리 나를 죽…….’

‘그만!’

입술을 깨물고 흐느낌을 억누르는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언성을 높여 말을 막았다.

그러나 곧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쉰 그는 더 버티기 힘든 것처럼 침상에 기대앉으며 눈을 감았다.

‘……내일. 내일 놓아주겠습니다.’

‘…….’

‘그저 이대로 하룻밤만 더 내 신부로 있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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