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약혼식에 초대하지 않았다고 많이 서운해하는 눈치였어. 너와 그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루퍼스 공작을 보며 엘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친한 건 아니에요. 우연히 만나 몇 번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많이 서운해하던데. 조만간 백작저로 초대 한번 한다더군. 같이 식사나 하자고.”
“그냥 하는 말이겠죠.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으세요.”
트로비아 백작이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접근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자극하려는 의도인 걸까? 뭐가 되었든 간에 엘리는 트로비아 백작이 악마라는 말을 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 역시 이사렐라와 라피네가 불안해하는 것처럼 그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엘리는 절대로, 자신이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산다는 걸 루퍼스 공작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 트로비아 백작도 악마야?”
생각지도 못한 루퍼스 공작의 물음에 엘을 안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 왔다.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힘겹게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며 엘리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카로스가 트로비아 백작 파티에 초대받았던 게 떠올라서. 알잖아. 아무나 그 파티에 초대받을 수 없다는 거. 그런데 악마인 카로스가 그 파티에 초대받은 게 이상하잖아. 파티에서 보니 둘이 꽤 친해 보이기도 했고.”
예리한 루퍼스 공작의 물음에 엘리의 당황은 더욱 커졌다. 그 순간 엘리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엘이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만요. 엘이 또 졸린 모양이에요. 일단 엘부터 재울게요.”
타이밍 맞게 울어 준 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대답을 할 시간을 벌었다. 엘리는 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원장실 안을 서성였다. 그녀의 토닥거림에 엘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잠투정이 섞인 울음이었는지, 엘의 동그란 갈색 눈이 서서히 감겼다. 엘리는 엘의 등을 계속해서 토닥이며 그에게 내놓을 답변을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트로비아 백작이 악마라는 사실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잠든 것 같은데.”
그녀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엘이 잠든 모양이다.
“그러게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일찍 잠든 걸 보면.”
루퍼스 공작은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아까 그녀가 못 한 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의 눈빛에 엘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알잖아요. 악마는 못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일종의 최면 같은 거였어요. 트로비아 백작님은 최면에 걸려서 저와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저 역시 파티 초대장을 받아 카로스 님과 함께 그 파티에 초대받게 된 거고요. 카로스 님이 떠난 이후에도 그 최면 효과가 남아 있는지 트로비아 백작님은 저와 친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가 믿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카로스는 왜 그런 일을 한 거지?”
“원래 카로스 님은 화려한 파티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어떤 귀족 파티가 가장 화려하냐고 묻기에 트로비아 백작의 파티가 가장 화려하다고 제가 알려 줬고요. 이사렐라 언니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거 같아요. 자신이 잘 지내는 모습을.”
그녀가 하는 대부분의 말은 거짓이었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갈색 눈을 들여다보며 루퍼스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군. 트로비아 백작이 왜 그렇게 너와 친한 척을 하는지.”
다행히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믿는 눈치였다. 거짓말을 한 건 미안했지만, 엘리는 트로비아 백작이 악마라는 걸 그가 끝까지 모르길 바랄 뿐이었다. 괜히 그걸 말해서 그의 불안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네. 그래서 전 트로비아 백작님이 더 불편해요. 거짓된 친분이라 그런지 자꾸 피하게 되더라고요.”
“그럴 것 같아. 또 너와 성향이 너무 안 맞는 사람이니까.”
“맞아요. 초대가 와도 거절할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공작님도 그냥 모른 척하세요.”
“그래.”
“음, 엘도 자는데 이제 트로비아 백작님 이야기는 그만하고 저녁부터 먹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퍼스 공작이 그녀가 하는 말은 뭐든 믿어 주는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 * *
레이몬드가 준비해 온 저녁을 채 다 먹기도 전에 잠이 깬 엘은 또다시 시끄럽게 울어 댔다. 엘리는 곧장 아기 침대로 다가가 우는 엘을 안아 들었다. 엘은 엘리에 품에 안기자마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눈물을 뚝 그쳤다.
“안 잘 땐 계속 그렇게 안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아기가 가볍다 해도, 계속 저렇게 안고 있으면 손목에 무리가 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을 보니 그는 더욱 걱정이 되었다.
“저와 떨어져 있으면 많이 불안한 모양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하루 종일 안고 있으려면 많이 힘들잖아.”
“괜찮아요. 제가 엘에게 줄 수 있는 건 따뜻한 온기뿐이잖아요. 엘에게 제 온기가 위안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든 걸 잘 모르겠어요.”
엘을 내려다보는 엘리의 눈빛이 다정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저런 눈빛을 받는 저 자그마한 아기에게 슬며시 질투가 치솟았다. 하지만 엘을 바라보는 엘리의 표정이 너무 예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아기가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러게요. 제가 이렇게 아이를 좋아하는지, 저도 미처 몰랐어요.”
“우리 아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아?”
다분히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기에, 아이를 욕심내지 않으려 했지만 홀로 남겨질 엘리에게 어쩌면 아이가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놀란 엘리의 물음이 되돌아왔다. 생각보다 더 당황한 듯한 그녀의 반응에 그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냥 별 생각 없이 해 본…….”
“……갖고 싶어요. 공작님 닮은 예쁜 아이.”
그 말을 하는 엘리의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난 널 닮은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음, 이왕이면 딸이면 좋겠어. 너를 아주 쏙 빼닮은. 아니, 그러면 내가 너무 불안하려나? 이렇게 예쁜 사람 둘을 지키려면.”
레이몬드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엘리에게 상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게,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도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엘리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전 공작님을 닮은 아이가 더 좋은데.”
“그러면 둘을 낳으면 되겠네. 너 닮은 아이 하나, 나 닮은 아이 하나. 대신 너무 아이들만 예뻐하지 마. 내 자식들에게도 질투하는 못난 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
진지한 그의 말투에 엘리가 웃음을 삼켰다.
“정말 그럴까 봐 걱정이 되네요.”
“걱정할 시간에 날 더 사랑해 주면 돼.”
그가 엘리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며 말했다. 엘리는 엘을 품에 안은 채 그의 어깨에 편안하게 머리를 기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 줄 필요가 없겠다.”
엘리의 옅은 갈색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겪은 일들이 동화보다 더 재미있잖아. 안 그래?”
“맞아요. 저도 어렸을 땐 아버지가 해 주는 이야기들을 동화보다 더 좋아했어요. 물론 크면서 점점 그 이야기들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요.”
“우리 애들도 그러는 거 아니야? 엄마 아빠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어쩌면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글쎄. 난 특별한 너를 만나, 내 삶이 더 특별해진 것 같은데. 다음 생에는 더 빨리 너를 찾아낼 거야. 꼬꼬마 어린 시절부터 널 따라다녀야지.”
야심 찬 그의 말에 엘리의 입에선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엘리.”
“네?”
“우리도 동화책 결말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엘리의 말에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꼭 그렇게 살자, 우리.”
레이몬드는 고개를 숙여 엘리의 이마에 슬며시 입을 맞췄다. 사실은 여전히 두려웠다. 이렇게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시간도 1년이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할 수만 있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좀 더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헛된 꿈이라도 계속해서 꿀 수 있게.
* * *
그런 두 사람의 바람과 다르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추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이 되었다.
엘도 그사이 조금은 성장했다. 여전히 낮에는 엘리에게 꼭 붙어 있으려고 했지만, 밤에는 깨지 않고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잠이 들었다.
그 덕분에 엘리는 이제 밤에는 공작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퇴근은 엘이 잠든 이후에 하고, 아침 일찍 보육원으로 출근을 해야 했지만, 루퍼스 공작과 함께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그사이 보육원 건물 증축 공사도 끝이 났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보육원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채워졌다. 지하에는 비가 와도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체육관도 생겼고, 커다란 도서관도 생겼다.
2인 1실의 깔끔한 새로운 숙소도 아이들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리고 미하일 제국 사람들이 기다리던 루나 축제 역시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축제였지만, 그중 가장 애타게 루나 축제를 기다린 사람은 바로 레이몬드였다.
“어때?”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은 레이몬드는 옆에 서있는 남자를 향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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