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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82화 (82/100)

82화

떨리는 손으로 귀를 감싸 쥔 부신이 얼굴이 찌부러질 정도로 책상에 머리를 비벼 댔다.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한 채였다.

“으윽…….”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겨우 화희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저, 저 사람 저기서 뭐 하는 거죠?”

윤성이 외치자, 대화를 나누던 민철과 세원이 놀란 듯 취조실 안을 돌아보았다. 보기 껄끄럽다는 듯 혀를 찬 세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설명했다.

“의사 말로는 주기적으로 환각을 보며 발작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곧 잠잠해질 테니까 보기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환각? 이게 주기적인 발작이라고? 윤성은 놀란 기색이 전혀 없는 그들과 취조실 안의 화희를 번갈아 보다가 깨달았다.

그들에겐 박화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이건 나한테만 보이는 환영인 건가? 서재가 비쳐 보이는 것이 그 증거일지도 몰랐다.

손에 든 단검을 성의 없이 돌리던 화희가 유리 벽 너머로 힐끗 윤성을 쳐다보았다.

실제가 아닌 걸 아는데도 눈이 마주친 순간 섬뜩한 살기에 온몸이 굳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희게 질린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빤히 응시하던 화희가 기가 막힌 듯 짧게 헛웃음 쳤다.

그러나 그뿐, 천부신에게 시선을 돌린 화희는 곧장 단검을 치켜들었다. 단검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를 때마다 부신은 사지를 떨며 자지러졌다. 겉보기엔 멀쩡한데 마치 실제로 베인 것처럼.

윤성은 이를 악물고 천부신이 난자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미워할지라도 아버지가 괴로워하며 미쳐 가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화희는 부신의 처참한 몰골을 즐기는 것처럼 내려다보다 부신의 머리에 검을 겨누었다. 그의 눈이 적나라한 살의로 번뜩였다.

“아, 안 돼……!”

윤성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유리 벽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단검은 천부신의 머리를 꿰뚫었고, 부신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졌다.

피, 피가 없어. 실제가 아니야.

그의 비명에 놀란 민철이 윤성의 어깨를 잡아채며 물었다.

“뭐, 뭐야? 왜 그래?”

그의 손을 뿌리친 윤성은 홀로 의자에 축 늘어진 부신을 다시 확인하고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들어섰다.

민철과 세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그런데 모두를 무시한 화희가 윤성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눈길이 험악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는 주춤 물러섰다.

살기가 진득하게 들러붙은 눈빛과 같은 슈트……?

암만 봐도 방금 취조실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 터라 윤성은 자신이 정말 환영을 본 것인가 의심했다.

무엇보다 그의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 문신처럼 한문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윤민형을 괴롭히던 그때처럼.

저게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가?

윤성에게 시선을 둔 채로 화희가 비웃듯 입술을 끌어 올리며 민철에게 턱짓을 했다.

“보고해.”

“윤성 군 일은 처리가 끝났습니다. 천 회장은 보시다시피 상태가 좋지 않아서 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입니다.”

화희를 흘깃거리며 살피던 윤성은 점점 의심이 짙어졌다. 왜 날 저렇게 보는 거야? 설마 환영에서 눈이 마주쳤던 게 진짜였던 거 아냐?

환영, 그래, 윤민형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 어?

환영, 환청, 낯설지 않았다. 자신이 자주 겪는 일이었다. 내가 이런 걸 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지? 혹시 민수아가 아니라 이 남자 때문에……?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이 남자 때문이었어. 그래서 내가 미친 것처럼 이상한 걸 보고 듣는 거였어!

윤성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울컥 치민 분노가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그는 한걸음에 달려가 화희의 어깨를 세게 밀치며 소리쳤다.

“당신이지? 당신이 전부터 자꾸 나한테 이상한 걸 보여 준 거지? 민수아한테도 무슨 짓을…… 윽!”

윤성의 손을 쳐 낸 화희가 그의 멱살을 낚아채 휙 끌어당겼다.

“감히 누구를 입에 담아.”

순식간에 목이 졸린 채 발끝이 들렸다. 몸부림치면서 벗어나려 했으나 화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건방진 주제나 되는지 알아봐 주지.”

위협적인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때리는 동시에 싸늘한 냉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느낌이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난데없는 벌레 떼가 손을 뒤덮고 있었다.

“이, 이게 뭐……!”

아니, 벌레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검고 작은 문자들이었다. 문자들은 손등을 검게 물들이며 피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으로 스며든 문자들이 팔을 타고 목으로, 뺨으로, 입술까지 기어올라 가 머릿속을 강제로 헤집는 느낌이 끔찍했다.

“……으, 으윽……!”

윤성은 있는 힘껏 팔을 뻗어 화희를 밀어내려 했다. 버둥대던 그의 손이 목덜미에서 빛나는 글자에 스치듯 닿았다.

그 순간, 눈앞이 번뜩이며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큰 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너는 용종을 낳을 그릇일 뿐이다! 한데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을 변질시켜? 내 반드시 네년의 자식을 살인귀로 만들어 주마. 네년 뱃가죽을 가르고 꺼낸 귀물은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게 될 것이야!>

천부신의 목소리였다. 왜 이런 끔찍한 말을……? 대체 누구에게 한 소리지?

말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깊은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슬픔이 덮쳐 와 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윤성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인 화희의 눈과 마주쳤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붉게 타오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불? 급히 자신을 내려다보니 피가 불로 변한 것처럼 손등부터 핏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삽시간에 불길은 온몸으로 퍼져 나갔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안으로 스며들었던 문자들만 타서 검은 재로 사그라졌다.

찰나 문자를 모두 태운 불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허공에 검은 먼지만 흩날렸다.

윤성은 본래로 돌아온 제 손을 살펴보다 뒤늦게 화희를 밀쳤다. 그리고 그를 피해 급히 물러서다 책상에 부딪쳐서야 멈춰 섰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힘없이 밀려난 화희가 할 말을 잊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표정이 험한 꼴을 당한 건 윤성이 아니라 그인 것 같았다.

“……이사님? 윤성 군, 갑자기 왜들 그러시는지…….”

민철이 당황하여 물었으나 순간 방 안에 천부신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아까 넘어질 때 뭘 건드렸는지,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혀가 굳은 것처럼 어눌한데도 악의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배, 배은망덕한……! 모든 건 다 그 계집 때문이야! 주, 죽였어야 했는데, 기, 기필코 주, 죽여 버릴……. 사, 살려 줘…….”

윤성을 노려보던 화희가 이를 갈면서 취조실을 힐끗 노려보았다. 검은 안개 같은 그림자가 휙 날아드는가 싶었는데 천부신이 책상 위에 머리를 쾅쾅 박아 댔다.

“가, 갑자기 왜 저래! 어서 막아!”

김세원이 문을 열고 뛰쳐나가며 소리치고 스피커를 통해 사람들이 뛰어 들어가 천부신을 결박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쓰는 소리, 만류하는 소리, 온갖 소음이 뒤섞여 취조실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 * *

거참.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세원은 아까부터 차창 밖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윤성을 흘깃거렸다.

직접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한 그를 군말 없이 따라왔으면서 여느 억울한 피의자들처럼 도와달라거나 하소연조차 하지 않았다.

사춘기는 벌써 끝났을 나인데, 분위기가 딱 질풍노도 시기의 소년이었다.

하긴 그간 겪은 일을 보면 삐뚤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하다고 해야 하나. 천부신도 참 악독하기 짝이 없다. 비리를 측근에게 덮어씌우고, 그 측근의 살인죄를 어떻게 20년 가까이 키운 아이에게 덮어씌울 수 있나.

이런 정황을 짐작하면서도 검찰 쪽에서는 언론이 부신 게이트라면서 일을 부풀리고 위에서는 결과를 내놓으라 압박하니, 급한 불을 끌 희생양으로 증거가 가리키는 윤성을 잡았을 뿐이다. 물론 이 일을 덮으려는 비리 관련자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화희 같은 거물이 돕지 않았다면, 천윤성은 천부신과 그의 일당이 짜 놓은 각본에 꼼짝없이 마녀사냥을 당할 판이었다.

그런데 왜 그를 보자마자 덤볐을까? 물론 부신 게이트를 터뜨린 건 화희니까 감정이 좋진 않겠지만, 유일한 구원자나 마찬가진데.

게다가 민수아는 갑자기 왜 입에 담았지? 그때 같이 납치되었다가 구해 준 것도 화희였는데.

세원은 아까부터 들끓는 호기심에 결국 참지 못하고 윤성에게 물었다.

“아까 이사님에게 왜 그런 겁니까?”

윤성이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뭘요, 그 남자한테 죽을 뻔한 거요?”

“죽을 뻔하다니요? 이사님은 떼어 내려고만 하신 것 같은데…….”

물론 멱살을 좀 세게 잡긴 했지. 그래도 죽이려고 했다는 건 너무하지 않나.

잠시 침묵하던 윤성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딱 잘라 말했다.

“하, 됐어요.”

“이사님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저번 납치 사건 때 민수아 씨와도…….”

“뭐가 궁금한 건데요?”

세원을 돌아보는 윤성의 시선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순간 그런 눈빛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세원은 뜨끔했다.

어라, 애처럼 굴 땐 언제고?

윤성이 도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자 세원은 조급해졌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릴 기세였다. 그는 애처럼 달래려던 태도를 바꾸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검사로서 말고 인간적으로 충고하려고요. 무슨 사이인지는 몰라도 현재 윤성 군에게 제일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사님이니 잘 지내보란 뜻입니다.”

“왜요?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건 그쪽 일이잖아요.”

“물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법망 안에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오늘도 그렇고 납치 사건 때도 그렇고, 안타깝게 악인에게는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계가 없다는 걸 알잖아요.”

“그럼 한계가 없는 박화희는 악인이겠네요?”

윤성이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세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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